외세에 의한 예속으로, 봉건적질곡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되지못한채 시작된 남코리아농업은 농촌근대화의 <새마을운동>으로 더욱 유린됐다. <새마을운동>은 일제시기 조선총독부의 <농촌진흥운동(아타라시이무라츠쿠리)>을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적용·발전시킨것이다. 박정희가 쿠데타에 성공한 1960년대까지만 해도 농민이 전체인구의 70%를 차지하고있었다. 군사쿠데타직후인 1961.5.25 박정희군부가 시급히 <농어촌고리채정리령>를 발표하고 다음달 이법을 공표한것은 군사쿠데타의 무리수에 당시 농민들의 민심을 잡기위한 조치였다. 1962 3공화국헌법은 대통령임기를 4년중임제로 정했다. 1969 박정희는 정권연장을 위해 3선개헌을 추진했고 1971 대선에서 당선됐다. 이대선을 앞둔 1970 박정희는 <가난한농부의아들>이라며 농촌을 공략했다. 이렇게 등장한것이 <새마을운동>이다. 박정희정권은 당시 소비처를 찾고있던 시멘트회사와 유착돼있었고 국가자금으로 1970~71 <새마을가꾸기사업>을 벌여 전국3만3267개마을에 각각시멘트336포씩 공급하고 마을앞길을 확장하고 공동빨래터·공동우물등을 설치하도록 했다. 1972 <새마을가꾸기사업>은 <농촌새마을운동>으로 확장됐다. 특히 <10월유신>과 함께 더욱 정치성을 띄게 된다. 1973.11 1차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에서 박정희는 <새마을운동이10월유신이고10월유신이새마을운동>이라고 말했다. 이운동은 1974 <공장새마을운동>, 1976 반상회의 등장과 함께 <도시새마을운동>으로, 직장·학교<새마을운동>으로 지역과 세대를 넘어 확대됐다. 1976 민간추진기구를 설치했으며 1980이후 전두환정권에서는 민간으로 이관해 확대발전시켰다. 이명박·박근혜시기 이를 되살리려는 책동이 이뤄졌다. 박정희정권은 <새마을운동>의 목표를 <농촌개발>·<수출산업육성>등 <경제유신과업>을 실현해 <수출액>·<국민소득>을 증대하는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농촌인력을 <환경개선>명목에 군용도로와 군용교량 건설에도 동원했고 근대화라는 명목에 과잉상품의 강매조치로 농민들의 부채만 늘어났다. <새마을운동>은 파쇼적인 반민중적관제운동으로 <정신개조>·<의식구조를바꾸기위한정신혁명>을 하겠다는 민중통제감시체계고 <공산주의가농촌에들어갈수없게한다>는 명목으로 <승공통일>전쟁을 준비하는 <일대정신운동>이며 관권과 연결된 지주·자본가들의 치부증대를 위한 가혹한 강제수탈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