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 항쟁의기관차〉 개혁거부와 외세굴종의 〈붕당정치〉

고려시대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세력을 제압하는 중앙집권적관료체제확립을 위해 과거제를 도입했으며 유학적소양을 기준으로 관료들을 선출하고 이를 위한 교육기관도 설치했다. 공민왕의 개혁과 함께 신진사대부층이 형성됐으며 우왕의 폐위로 친원세력으로 형성된 권문세족이 척결되고 신진사대부가 정치권력을 쥐게 됐다. 반면 토지는 권문세족들에 의해 사유화된 상태에 중앙정부, 국가의 조세조차 보장되지못했으며 민중들의 생활은 더욱 처참했다. 신진사대부중에서도 먼저 정계에 진출한 이들은 대토지소유의 이권을 가졌고 뒤에 관직에 오른 이들은 불합리한 토지제도에 불만을 가지게 됐다. 신진사대부는 백성을 중심으로 왕권을 본 맹자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강조하는 세력과 충효를 강조하며 고려왕조를 유지하려는 세력으로 나뉘어졌다. 고려가 불교를 정치철학으로 삼았다면 조선은 성리학을 정치철학으로 건국됐다. 성리학의 유입과 함께 지배계급의 정치철학논쟁이 심화되고 이를 중심으로 집단이 형성됐고 이는 조선중기 <붕당정치>로 이어진다. 붕당정치는 세조의 왕위찬탈공신들인 훈구파와 지방향인출신 사림파의 대립에 기원을 두고있으며 선조의 즉위로 사림파가 정권을 주도하게 된 이후 인사권의 핵심지위인 이조전랑직임명문제로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됐다. 동인은 대체로 영남지역출신으로 조선초기 권력을 쥐지못하고 낙향한 이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훈구파청산에 원칙적입장을 취했다. 서인은 서울근방에 기거한 고관들이 주를 이루면서 외척이 다수를 이뤘다. 이이는 동인과 서인의 중간을 자처하다가 나중에 서인에 합류했다. 동인은 사림파중 신진세력으로 김효원·류성룡·이산해등이 연합해 결성했으며 이들은 영남학파 이황의 문하였다. 이들은 정치적이념과 학문적경향에 따라 결집해 정파·학파적성격을 동시에 가졌다. 서인은 노론과 소론 으로,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사색당파>가 형성됐다. 노론은 성리학에 대한 원칙성으로 청을 멸시해 삼전도비를 쓴 문장을 비난하는데로부터 시작됐다. 청에 볼모로 갔다가 선진문물에 긍정적입장을 가지게 된 소현세자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노론은 영조시기 이인좌의난으로 소론·남인세력을 척결한뒤 정권을 완전장악했고 사도세자의 개혁에도 반대했다. 이후에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도정치>의 외척, 안동(장동)김가세력으로 됐으며 항상 반개혁입장에 있었고 종당에는 제국주의침략에 굴복해 친일매국세력으로 전락했다. 1930년대 윤치호에 따르면 당시에도 노론은 남인정약용을 배척해 그의 책을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고 기록했다. 봉건시대정치는 왕을 중심으로 한 군주정치와 사상적기반에 종교를 두는 종교정치, 신분상속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신분정치에서 벗어나지못했다. 조선말기 실학사상·개화사상이 나타나고 신분제도를 반대하는 동학사상이 등장해 이를 중심으로 한 조직적활동이 전개됐으나 민중에 의거하지못한 개혁세력은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는데 실패하고 우리민족·민중도 제국주의세력의 침략에 의해 식민치하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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