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후 김일성주석이 북측지역에서 빠르게 자리잡을수 있었던것은 조국광복회의 대중지반이 작용한것이라고 볼수 있다. 1946.2 북조선임시인민위를 건설해 중앙정부기능을 보장했으며 1945.11 북조선민주여성총동맹, 북조선직업총동맹, 1946.1 북조선민주청년동맹, 북조선농민동맹을 조직했다. 직업동맹은 853개의 노동조합분회와 철도·금속·화학·광산·전기·목재·수산·출판·섬유·식료·토건·체육·교통운수·일반등14개산별조직들을 묶어 건설됐다. 이외에도 북조선예술총연맹(조선문학예술총동맹)·북조선공업기술연맹·북조선기자동맹·북조선불교도연맹·북조선그리스도교연맹·북조선인민교육문화후원회·북조선보건연맹·북조선농림수산기술총연맹·북조선애국투사후원회등이 조직됐다. 이를 통해 북에서는 분산적이고 분파적이었던 대중단체들의 조직체계를 극복하고 대중을 조직적으로 결속하는데 기여하도록 했다. 공산당은 인민정권을 수립하고 민주개혁을 실시하는데서 주동적으로 민주주의적정당·사회단체들과 공동행동을 벌인 기초위에 1946.7.22 북의 정당·사회단체가 북민전(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고 산하에 600만명의 조직된 군중이 결속됐다. 반면, 남에서는 미군정의 등장과 건준·인민위원회의 불법화로 갈피를 잡지못하고 매우 복잡한 정황에 빠졌다. 남에서는 애초 미군정이 들어온다는 우려에 조급하게 공화국건설을 추진했는데 결국 효용이 없게 되자 실질적인 대중적통일전선체로 1946.2 남민전(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했다. 미군정은 정판사사건을 날조해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고 대중들로부터 공산주의자들을 고립시켰다. <좌우합작>운동 또한 중도좌파를 끌어당기고 공산당세력을 고립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미군정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좌우합작위원회의 주요인물들을 망라시켰다. 남조선공산당은 그패권적행태로 인해 대중적 지지와 엄호를 받지못했으며 노동당으로의 통합이후에도 여운형이 근로인민당을 창당하는등 남조선노동당은 지도력을 확고히 하지못했다. 여기에 미군정은 남민전의 인사들을 대거 검거하며 탄압했다. 김일성주석은 1948 북을 방문한 김구에게 공산주의자들중 결함이 있는 사람들이 있으나 몇몇 개별적인 사람들의 작풍이 문제라고 하면서 반미구국통일전선을 형성하는데서 중요한것은 공산주의자들과 민주인사들사이에 합작을 실현하는것이며 공산주의자들과 민주인사들사이에 합작하지못할 아무런 이유와 조건이 없다고 말했다. 1948 남북연석회의와 남에서의 <단선단정>에, 9월 공화국창건까지 이뤄지자 김구·김규식등은 통일독립촉성회를 통일촉진협의회로 발전시켜 통일정부수립을 위해서 활동했다. 나라의 분열을 영구화하려는 책동이 심화되고 무장충돌이 심해지면서 언제 전쟁으로 비화될지 모르던 1949.6 북민전과 남민전은 남·북·해외70여개정당·사회단체들이 망라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으로 통합하고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조국을 자주적으로, 평화적으로 통일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