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정권은 <단선단정>으로 수립돼 <발췌개헌>·<사사오입>개헌등 편법과 <4.3제주민중항쟁>·<여순사건>·<보도연맹사건>을 비롯한 <반공>학살만행, 최능진사형·조봉암사형(진보당사건)의 정적제거등 파쇼체제가 아니고서는 정권을 유지할수 없었다. 그중심에 김창룡의 특무대라는 파쇼기관이 있었다. 민중들의 진출이 예견되는 가운데 박정희군부가 등장해 이를 제압하고 노골적인 군사파쇼체제가 시작됐다. 이에 대응해 민주주의·혁명세력은 비합지하조직노선을 택했다. 박정희정권은 파쇼기관인 중앙정보부를 내세워 이들을 탄압했다. 산업화와 함께 노동운동이 성장했고 1979.8 YH무역회사여성노동자농성투쟁에 이어 개학시기 대학가들에서의 투쟁에 1979.10 부마항쟁까지 이르자 박정희정권은 계엄령·위수령으로 대응하지않을수 없었다. 결국 박정희는 부하들에 의해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1974.11 민주회복국민회의와 1979.3 국민연합(민주주의와민족통일을위한국민연합)등이 조직돼 비합전위조직들의 지도하에 부르주아개혁정당들과의 결합도 공고해지고 노동자·농민·청년학생등 기층민중들과의 결합력도 높이면서 부마10월민중항쟁을 비롯한 파쇼정권퇴진투쟁을 조직·지도했다. 전두환은 군부를 동원해 광주민중항쟁을 짓밟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렇게 억눌리고 억눌렸던 파쇼체제에 대한 반발과 분노속에 반파쇼민주화운동이 더욱 성장했다. 1983 국내외 조성된 <유화>국면속에 운동역량이 급속히 확장됐다. 1984 민중민주운동협의회와 민주통일국민회의의 양대세력이 형성됐는데 조직의 확대에 따라 현실적으로 통합문제가 제기됐다. 1987.1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그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고 4.13 전두환의 호헌조치에 민주화투쟁의 계기를 맞게 됐다. 5.27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과 통민당(통일민주당)이 주축이 돼 국민운동본부(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고 <4.13조치철회및직선제개헌공동쟁취선언>을 발표하며 민주화투쟁의 파고를 높였다. 국민운동본부는 민중운동세력과 부르주아개혁정당이 연합하고 노동자·농민·청년학생의 주도역량에 기초해 광범위한 중간세력이 결집한 통일전선체로 강력한 반파쇼민주전선을 실현하며 군사파쇼세력을 고립시켰다. 그중심이 된 민통련은 합법정당이 아니라는 제한된 조건에서도 통민당과의 상층통일전선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역할을 했고 6월항쟁에서도 항쟁노선을 견지하도록 했으며 결국 호헌철폐와 직선제쟁취의 성과를 이뤄냈다. 그러나 국민운동본부는 7~9 노동자대투쟁에 수수방관하며 투쟁을 고양시키지못했고 통민당이 파쇼정당인 민정당과 개헌회담에 몰두하다가 분당돼 자멸하는것을 막지못했다. 군사파쇼체제에 항거하던 남민중들의 투쟁은 장성해 이제 직접적으로 민중정권수립을 목표로 하게 됐으며 군사파쇼통치체제가 파탄나고 개량화가 이뤄지는 조건에서 반파쇼민주전선중심의 통일전선노선도 변화가 불가피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