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파쇼민주화의 요구가 고조되는 분위기속에 1979.10.26 박정희가 피살됐다. 하지만 그자리에 신군부세력으로 전두환이 실권을 장악해가면서 민주화는 다시 멀어져가고있었다. 1980 3월말 계엄사령관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겸직을 통고하고 4.14 중앙정보부장서리에 취임했다. 대학가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고조됐다. 5.12 글라이스틴주남미대사가 김대중의 동교동자택에 직접 방문해 대학생들의 가두시위를 자제하지않는다면 군부쿠데타의 빌미를 주게 된다고 조언했고 김대중은 바로 기자회견을 열어 군부쿠데타의 빌미를 주면 안된다고 호소했다고 한다. 민주주의와민족통일을위한국민연합은 5.15 <지식인134인시국선언>을 발표해 계엄해제와 민주화일정제시를 요구했다. 전두환군부는 5.17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계엄확대조치직전 계엄사는 이미 김대중등 37명을 내란음모등의 혐의로, 김종필등 9명을 권력을 통한 부정축재혐의로 체포하고 18일 새벽 무장한 33사단병력으로 국회를 점거해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7.4 계엄사령부는 계엄법·반공법·국가보안법등을 근거로 김대중을 비롯한 37명이 연루된 내란음모사건을 발표했다. 전두환은 김대중과 국민연합의 민주화운동을 <내란음모사건>으로 조작했다. 전두환신군부는 이사건에 김대중의 측근이외 재야와 학생운동 핵심인사들을 연루시켜 민주화운동진영 전체의 와해를 기도했다. 신군부는 이들에게 사실상 광주사태를 배후에서 조종했으며 또 광주사태당시 무기반납을 방해하도록 지시하고 제2의 광주사태를 준비했다는 사실등을 열거했다. 민중항쟁을 가리켜 내란이라고 하는것이 공안당국의 논리이고 그것이 공안기관의 조작이었다. 김대중의 입장은 쿠데타의 빌미를 주는 시위를 반대한다는것이었다. 그러나 1981.1.23 대법원은 군사재판에서 김대중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다. 이날 바로 국무회의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했고 이듬해 3.2 20년형으로 다시 감형했으며 12.16 서울대학병원으로 이송한 이후 치료를 이유로 미국으로 사실상 추방했다. 한편 전두환은 광주민중항쟁을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를 수립해 권력을 장악했다. 이를 기반으로 5공화국을 수립하고 파쇼통치를 강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