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2 항쟁의기관차〉 유신에 종지부를 찍은 남민전사건

박정희군사파쇼정권은 정권연장을 위해 1972 유신체제를 수립했다. 박정희는 이후 <긴급조치>등을 통해 반정부세력을 임의로 탄압했다. 이에 민주화시위 또한 전면적으로 벌어졌다. 1973 가을부터 반정부시위가 타오르기 시작해 1974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의 반유신투쟁이 전개됐다. 박정희정부는 4.3 긴급조치4호를 선포해 학생들이 수업거부등의 집단행동을 할수 없도록 했으며 <민청학련이라는단체가불온세력의조종을받아반체제운동을한정황을포착했다>고 발표했다. 사건은 2차인혁당사건으로 이어졌다. 민청학련을 지도한 인혁당의 학원담당책으로 여정남이 지목되고 도예종등이 인혁당재건위의 지도위원등으로 판결됐다. 1975.4.8 대법에서 핵심8명에 대한 사형이 확정되자 18시간만에 집행됐다. 그로부터 1년이 안된 1976.2.29 청계천3가의 한음식점에서 이재문·김병권·신향식 3인은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의 결성식을 가졌다. 이재문은 인혁당사형수8명의 옷으로 남민전의 깃발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재문은 1차인혁당사건으로 형을 살았고 2차인혁당사건에서는 수배상태가 됐다. 김병권은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 신향식은 통혁당사건으로 징역을 살았다. 1975 사회안전법이 공포돼 과거 좌익활동에 관련됐던 사람들은 신고하고 전향서를 제출하지않으면 보안감호를 명목으로 다시 투옥되는 상황이어서 김병권과 신향식도 지하로 들어가지않을수 없었다. 남민전은 결성초기 최초발기인중 1인이었던 김병권이 불심검문으로 구속되고 민투(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총책인 이재오와 임동규등이 검거되면서 위기가 있었지만 조직전체를 위협하지못했다. 1979.8 조직의 청년학생들이 YH무역회사 여공들에 대한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사망한 김경숙의 투신사건을 알리기 위해 유인물을 제작하고 이를 서울 청량리일대 사설학원건물에 배포했는데 이로부터 2달뒤 10.4 핵심들이 대거 검거됐다. 내무부는 1979.10.9 가담자74명중 이재문등 20명을 검거하고 54명에 대한 검거령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남민전사건으로 총84명이 검거됐으며 73명이 기소됐다. 남민전은 민청학련 여정남을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도 받았다. 남민전사건을 북과 연계된 사건으로 발표했지만 남파공작원과의 관계는 확인되지않아 자생적인 공산주의세력으로 규정됐다. 남민전은 조직체계상에서 여타민주화운동조직과 달리 무력부와 대외연락부를 뒀으며 이는 1심에서 핵심4인이 사형선고를 받은 주요근거가 됐다. 남민전은 1980년대중반 쟁점이 된 사회성격문제와 관련해 1970년대에 이미 <미·일등국제제국주의에의한신식민지체제>로 규정하고있었다. 남민전의 강령은 반일·반미민족운동, 민족통일, 반파쇼민주화를 그 이념과 목표의 근간으로 하고있다. 1980.4 이재문은 재판부에 제출한 서면최후진술서에서 구한말의 양대양요를 향한 투쟁에서 반외세투쟁의 시원을 찾아 이운동의 역사가 동학농민전쟁, 의병운동, 일제하의독립운동, 분단하의통일운동, 군사독재하의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진다고 밝혔다. 2006.3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가 남민전사건관련자중 29명을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했다. 옥사한 이재문과 사형당한 신향식은 제외됐다. 중정이 남민전을 인지하지못한 상황에서 내무부치안본부에 의해 사건이 드러난것에 대해 경호실장 차지철과 김재규중앙정보부부장사이의 갈등설도 10.26사건의 배경으로 나온다. 객관적으로 남민전사건발표이후 10월민중항쟁이 벌어졌고 이를 진압한후 가진 술자리에서 박정희가 피살되며 <유신>은 종지부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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