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드레퓌스사건이 일어났다. <유대인은프랑스의적이다.매점매석한다.신을살해한민족이다.>라며 로마가톨릭교회의 반유대선동이 기승을 부릴때다. 1894 프랑스정보국요원이 파리의 독일대사관에서 몰래 빼낸 편지를 통해 프랑스군내부의 군사기밀을 독일로 넘긴 간첩행위자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는데, 유대인인 드레퓌스육군포병대위가 필적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범인으로 지목됐다. 1896 진범이 밝혀졌지만 참모본부는 이를 눈감았다. 유대계오스트리아언론인 헤르츨은 이과정을 지켜보며 시오니즘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897 스위스 바젤에서 시온의정서가 만들어졌다. 이들의 목적중 하나는 예루살렘에 있는 이슬람오말사원을 파괴하고 자신들의 유대성전을 세워 전세계를 다스리는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제국주의세력과 시오니스트간 결탁으로 건국됐다. 영국정부는 1915.10 오스만제국내 아랍인들의 반란을 지원하는대신 전쟁후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보장하겠다는 내용의 맥마흔선언을 발표했다. 영국은 애초에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1916 전쟁수행능력이 한계에 달한 영국은 적국인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1년뒤 유대인들과 2중계약을 체결한다. 밸푸어영외무장관은 로스차일드가문에 편지를 보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위한민족의집>건설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영국의 배신행위에 아랍민중은 치를 떨었다. 한편 1933.8 독일나치정부는 팔레스타인시오니즘조직과 하바라협정을 맺었다. 히틀러의 유대인탄압에 반발한 유럽과 미국의 유대인들은 대규모독일제품불매운동을 벌여 독일의 공산품수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이에 나치는 유대인을 몰아내려던 기존정책을 독일내 유대인의 팔레스타인이민장려정책으로 교묘히 탈바꿈했다. 이런 배경에서 세계곳곳에 흩어져있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들었으며 30여년간에 걸쳐 약70만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지역에서 쫓겨났다. 1936 분노한 팔레스타인인들은 유대인에 대항하는 대규모항쟁을 일으켰다. 이들은 영국정부에 팔레스타인독립·유대인이민금지를 요구했고 영국은 팔레스타인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영국에 테러를 감행했다. 1946 킹데이비드호텔테러에서 영국인28명·아랍인41명·유대인17명등이 사망했다. 난감해진 영국은 유엔에 팔레스타인문제를 떠넘겼다. 1947.11.29 유엔총회에서 팔레스타인분할안이 찬성33표·반대13표·기권10표로 통과됐다. 팔레스타인국가와 유대국가를 따로 세우고 예루살렘은 유엔이 관리하는 방안이었다. 미국무부는 처음에 신탁통치안을 내세우며 반대했지만 1948.3.25 찬성으로 돌아섰다. 1948.5.14 영국군의 철수와 함께 이스라엘은 건국을 선언했다. 건국선언후 11분만에 트루먼미대통령은 신탁통치안도 무시한채 돌연 미국의 <신생팔레스타인유대국가승인>을 발표했다. 아랍민중의 분노를 자초하면서 이스라엘만을 위한 조치를 단행했다.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을 인정할수 없다며 저항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