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시나이반도와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점령한뒤 이집트·시리아에 이스라엘국가의 인정과 지역의 비무장지대화를 조건으로 두지역을 반환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거부당했다. 이스라엘은 이지역을 자국영토로 합병하는 절차에 착수했고 이집트는 이에 반발하며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나세르에 이어 이집트의 대통령이 된 사다트는 1973.10.6 시리아와 손잡고 이스라엘에 대한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전쟁이 일어난 당일은 유대교의 속죄일이자 명절인 <욤키푸르>날이었다. 4차중동전쟁 개전48시간만에 이스라엘의 17개여단이 전멸됐다. 수에즈운하를 넘어 이스라엘점령지인 시나이반도 깊숙이 진군하며 사다트는 전쟁영웅으로 칭송받았다. 미국의 대대적인 지원으로 전세는 역전됐다. 30일간 이스라엘이 포위됐는데 미국은 비행수송작전을 통해 군수물자를 지원했다.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골란고원이 집중포격당했다. 시리아군 탱크867대와 차량3000대이상이 파괴됐다. 시리아를 지원하던 소련과 이스라엘을 지원하던 미국의 대결구도로 긴장이 격화되자 유엔은 확전을 우려해 10.22 중재를 제안했고 10.25 휴전이 선언됐다. 사다트는 전쟁후 기회주의적인 외교정책으로 선회했다. 전쟁으로 인한 재정압박에 서방으로 눈을 돌렸다. 키신저미국무장관은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돌며 순방외교를 진행했다. 1974.1 수에즈운하통제권을 이집트에 돌려주는 협정과 1975.2 시나이반도의 일부유전의 관리권을 반환하는 협정등 2차례의 시나이협정을 맺었다. 1975.6 수에즈운하의 선박통행이 8년만에 재개됐다. 사다트는 완전히 친미노선으로 전환했고 이스라엘과의 평화정책을 추진하며 아랍민중을 배신했다. 1978.9.17 카터미대통령의 중재로 사다트는 베긴이스라엘총리와 미백악관에서 캠프데이비드협정에 서명했다. 6개월이 지난 1979.3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공식적인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이협정으로 이집트는 3차중동전쟁으로 빼앗겼던 시나이반도를 돌려받고 미국으로부터 매년 15억달러의 군사지원등 원조를 챙겼다. 경제에서 무능했던 사다트는 외국자본을 도입하며 나세르의 사회주의식국유화정책을 변경했다. 이집트내의 빈부격차는 심화됐고 부정부패는 만연했다. 수에즈운하재개에도 불구하고 재정난은 계속됐다. 1977 빵과 식료품을 비롯한 주요생필품에 적용하던 보조금철폐는 빈민을 중심으로 한 시위를 촉발시켰다. 이시위에서 171명이 숨졌다. 정권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지지율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위기에 몰린 사다트는 1981.9 이집트의 나세르지지자·공산주의자·이슬람원리주의자·학생운동가·대학교수·언론인·정치운동가등을 체포했다. 그는 1달뒤 1981.10.6 4차중동전쟁을 기념하는 열병식도중 무슬림형제단소속 이슬람불리육군중위와 그부하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배신의 대가는 명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