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리아디스는 1948.12 발표한 글에서 1944당시 일련의 상황들에 대해 분석하고 KKE의 오류를 지적했다. 영국이 그리스영토에 상륙했을때 KKE는 우유부단했고 명확한 전망이 없었으며 앵글로색슨제국주의의 그리스에 대한 목적과 역할에 대한 환상을 품고있었다고 비판했다. KKE가 범한 전략적오류는 그리스내전의 패배로 연결됐다. 1953 스탈린서거후 자카리아디스는 흐루시쵸프의 수정주의노선에 반대하며 새소련지도부와 충돌했다. 소련공산당은 1956.5 KKE중앙위6차전원회의에 개입해 자카리아디스를 축출하려고 책동했다. 1957.2 자카리아디스는 KKE에서 제명됐다. 이후 KKE는 고르바쵸프의 <개혁>정책까지 지지하며 철저한 수정주의노선을 걸었다. 1967.4.21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며 파파도풀로스군사파쇼정권이 들어섰다. 이후 미CIA(중앙정보국)의 공작으로 밝혀졌고 1999 클린턴은 이를 인정하며 사과했다. 당시 미국은 그리스군부내 친미세력을 이용해 정권의 대체세력으로까지 성장한 사회주의세력을 근절하려했다. 군사정권은 대규모체포령등으로 정치적자유를 억압했고 경제적으로는 외국자본을 유치하며 그리스내 미국의 예속을 심화했다. 1973.11.14 아테네폴리테크닉대학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대학생들은 <파시즘철폐!미국추방!>·<빵,교육,자유!>구호를 내세웠다. 대학을 점거하고 격렬한 바리케이드투쟁을 벌이며 군부독재정권의 타도를 외쳤다. 17일 새벽3시 군부독재정권의 탱크가 대학정문을 뚫고 진입했다. 탱크는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고 저항은 막을 내렸다. 비극적유혈사태로 끝난듯 보였지만 광범위한 대중의 분노가 분출하면서 군부독재의 생명은 오래갈수 없었다. 파파도풀로스가 위기를 맞자 미국은 학생봉기직후인 11.25 파파도풀로스의 심복이던 요안니디스를 부추겨 쿠데타를 일으켰다. 파파도풀로스는 실각해 자택에 연금됐다. 1974.7.15 요안니디스군사정권은 그리스계 키프로스민족주의자들을 조종해 키프로스섬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그리스에 병합하고자 했다. 이에 튀르키예가 키프로스를 침공해 키프로스북쪽을 점령했다. 키프로스는 분단됐다. 이사건으로 수천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튀르키예침공후 그리스 해군과 공군은 내부반란을 일으켰고 7.24 군사정권은 붕괴됐다. 8.14 그리스는 튀르키예의 북키프로스점령에 항의하며 나토통합조직에서 군대를 철수했다. 1975.1.14 요안니디스는 대반역죄, 반란혐의, 폴리테크닉봉기시기학살의 종범혐의로 구금돼 재판을 받았다. 복역중에 그는 튀르키예와의 거래에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던 미군지도자들에게 배신당했다고 주장했다. 군사정권붕괴후 KKE는 합법화됐다.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파속(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 ΠΑΣΟΚ)이 등장했는데 1974.9.3 망명중이던 안드레아스파판드레우가 복귀하며 창당했다. 그는 1943 미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박사학위를 받은 미시민권자였다. 망명중 PAK(범그리스해방운동)를 결성하고 그리스반독재시위를 조직하면서 지지를 얻었다. 파속은 사회주의를 슬로건으로 내걸었지만 본질상 사민주의적입장으로 부르주아적한계가 뚜렷했다. 파속은 다수의 좌파단체들이 합류하면서 주류정당으로 자리잡았고 KKE는 들어가지않았다. 파속은 사실상 나토와 미국의 의제를 지지해 공동주의세력은 이에 타협할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