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 군사정권붕괴후 신민당(신민주주의당)과 파속의 양당체제가 지속됐다. 카라만리스는 그리스왕정에서 총리직을 역임했다. 1963 사임하고 1967 군사쿠데타직후 망명생활을 하다가 군사정권이 무너진뒤 임시내각의 책임자로 위촉돼 귀국했다. 이후 계엄령과 언론통제가 해제되고 KKE를 비롯한 모든 정당의 활동이 합법화됐다. 카라만리스는 신민당을 창당하고 1974 총선에서 2/3가 넘는 압도적다수의석을 확보하며 집권당이 됐다. 이후 왕정을 폐지하고 1975.6 공화제헌법을 선포했다. 1977.11 재집권에 성공한뒤 1980 나토에 재가입했다. 1981.1.1 EC(유럽공동체)에 가입했다. 신민당의 집권기간 고물가·고실업·빈부격차가 심화됐고 지지율은 급격히 떨어졌다. 1981 총선에서 파속은 포퓰리즘정책을 내세워 인기를 끌었고 신민당을 밀어내며 집권당으로 올라섰다. 파판드레우의 파속정부는 경제적으로 EC에서 새로운 인프라와 자금이 지원되고 각종산업에서 소득이 증대되는것을 활용해 생활수준을 올렸다. 한편 대대적인 복지시스템을 무분별하게 도입한 결과 재정위기가 심화됐다. 1980년대 그리스의 국가부채는 GDP의 28%에서 89%로 증가했다. 1981~91 공공부문부채가 42%나 증가했는데 이과정에서 정부는 점점 관료화됐다. 1985 총선에서 파속이 재선에 성공하자 KKE중앙위는 파판드레우내각에 대해 <사회주의적개혁을성취하겠다는당초공약을저버렸다>·<그가주창하는범그리스적사회주의운동과보수성향의권위주의정책으로는그리스사회에산적한문제들을해결할수없다>고 비난했다. 1989 파판드레우의 스캔들이 터지면서 민심은 완전히 돌아섰다. 여기에 측근들과 각료들이 크레타은행비리사건에 대거 연루된 사실까지 드러났다. 1989.6 총선에서 다시 신민당이 집권했지만 과반의석을 확보한 정당은 나오지않았다. KKE지도부는 파속의 부패스캔들에 대응하려면 우익정부에 참여하는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논리로 신민주당정부에 참여했다. 그러면서도 파속이 부패스캔들에 휘말린것은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결과며 대안은 노동자투쟁을 강화하고 부패를 배양하는 자본주의를 타도하는것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보였다. 일시적으로 신민당과 KKE가 연립정부를 구성했지만 3개월시한이 만료된 11월 재선거에서도 다수득표정당은 나오지않았다. 오히려 파판드레우의 건재함이 확인되면서 신민당·파속·KKE의 대연정이 3개월간 구성됐다. 결국 KKE의 시도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못했다. 거국내각에서도 그리스주둔미군기지재협상등 대외정책에서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못하는 무기력함을 보였다. KKE는 1995 전국협의회테제와 2008 18차당대회테제에서 과거 KKE의 오류를 비판했다. 무엇보다 당이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정책을 사회주의에 유익한 개혁정책으로 평가하며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던 사실을 인정했다. 당내투쟁에서도 당이 수정주의·기회주의노선으로 기울어 1980년대반혁명을 초래하는 매개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