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 항쟁의기관차〉 그리스공산당의 수정주의와 종파기회주의

KKE의 치명적실책

KKE(그리스공산당)는 기회주의자들의 분열책동과 투항주의로 인해 그리스내전에서 패배했다.

발칸반도는 1차세계대전당시 전쟁의 화약고였고 2차세계대전당시 독일·이탈리아파시즘에 의한 전쟁피해가 집중된곳중 하나다. 2차세계대전시기 1전선을 형성해 분투해온 소련과는 달리, 1943까지 서유럽방면으로 2전선을 구축하기로 소련과 확약한 미국·영국이 이약속을 위반하고 남유럽·북아프리카에 전력을 집중하며 그리스역사가 복잡하게 꼬이게 됐다. 

그리스내부상황도 매우 복잡했다. 1920부터 역대파쇼정부들은 KKE에 탄압을 집중했다. 1924 보안위원회를 조직해 파업투쟁을 전개하던 공동주의자·노동자에 대한 체포·추방도 빈번하게 벌어졌다. 1928 KKE지지자4268명이 체포돼 그중 22명살해·817명고문·481명추방된 사실은 대표적사례다. 1940 니코스자카리아디스KKE총서기가 공개서한을 통해 그리스민중들을 반파쇼전쟁에로 불러일으키며 공세를 취하자 1941 그리스우익정부는 영국군의 진주를 허용했다. 

이탈리아의 그리스침공을 막아낸 공동주의자·그리스민중을 겨냥해 1941.4 나치독일이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개시해 그리스를 점령했다. 이에 KKE중심의 저항운동세력은 1941 EAM(민족해방전선)을 조직했다. EAM에는 KKE·농업당·통일사회당·인민민주연맹·공화당·사회당등이 포괄됐다. 전체조직원수는 그리스인구750만명중 적게는 50만명에서 많게는 200만명으로 추산된다. 1942.5 KKE와 EAM중앙위는 ELAS(그리스인민해방군)를 결성했다. ELAS병력규모는 1944.9 예비병력까지 포함해 150만여명에 달했다. 그리스전국에 EAM조직이 체계적으로 갖춰져 사실상 정부역할을 하고있었다. 

EDES(민족민주그리스연맹)를 중심으로 한 우익민족주의자들은 나치독일까지 끌어들여 1943.12 ELAS를 공격하며 내전을 촉발했다. 이전투는 플라카협정으로 일단락됐지만, 근본문제는 해결되지않아 향후 그리스내전의 불씨로 남아있었다. 

KKE는 자카리아디스가 바이에른의 다하우강제수용소에 수감돼있던 사이, 1944.9 카세르타협정을 체결하며 치명적실책을 범했다. 1944당시 ELAS는 그리스의 4/5를 해방시켜 장악하고있었음에도 영국은 그리스내정에 개입하고 파쇼정부부활을 획책했다. 영국과 그주구 요르요스파판드레우의 교활한 분열책동에 EAM과 ELAS는 파판드레우의 사임을 내걸고 통합정부를 구성하는데 합의했다. 그러면서 미·영·그리스망명정부·ELAS·EDES대표들은 모든 저항단체를 그리스망명정부와 영국군휘하에 둔다는 내용의 카세르타협정에 합의한다. 협정결과 영국은 합법적으로 그리스에 진주하게 됐다.

자카리아디스는 1948.12 글<그리스의자유와민주주의를위한투쟁>을 통해 KKE지도부가 카세르타협정을 수용한것을 <오류>라고 평가하며 영국군이 그리스에 상륙하는것을 허용하지말아야했다, 영국의 유일한 목적은 바로 인민의 해방운동의 진압이었다고 뼈저린 총화를 했다.

1944.12 파판드레우내각은 EAM·ELAS를 해체하는 포고령을 발포했고 이에 저항하는 KKE세력을 영국군까지 동원해 공격했다. 윈스터처칠영총리는 <아테네의무장한남성들에게는누구를막론하고발포를주저하지말라>고 명령했고 영군부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럼에도 ELAS는 영국군을 적대시하지않고 우경적으로 행동하며 군력을 분산시켰다. 그리스전지역에서 영국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않았고 아테네에서조차 ELAS의 소수부대만이 영국군에 대항하고있었다. 파쇼정부는 EAM·ELAS의 정부참여배제, ELAS의 무장해제등을 강요했는데 KKE측은 이에 굴욕적으로 합의하는 바르키자협정을 체결하며 1차그리스내전은 마무리됐다.

KKE의 분열과 패배

2차세계대전후 그리스정부의 KKE와 그리스민중에 대한 탄압은 매우 극심하게 감행됐다. 백색테러에 1945말 4만8956명의 ELAS지지자들이 수감됐고 바르키자협정체결후 1946.3총선까지 ELAS는 1289명이 학살되고 6681명이 부상당했으며 사무실677곳이 파괴됐다. 극히 혼란한 와중에 1945.5 자카리아디스가 아테네로 귀환했다. 이해 8월 자카리아디스는 테러를 중단하지않으면 무장투쟁을 전개하겠다고 선언했다.

한편 전후냉전시기 미국은 그리스를 소련과 발칸사회주의국가들을 견제하기 위한 교두보로 삼으려했다. KKE는 1차내전에서 패배했으나 여전히 막강했다. 반면 미국측분석에 따르면 그리스파쇼정부는 <완전히반동적이며믿을수없이취약하고어리석으며부패>했다. 

1946.3 비민주적조작선거로 치러진 총선결과 우익정부가 들어섰고 2차그리스내전의 1국면이 시작됐다. 4월이후 게릴라병력이 증원됐고 주변사회주의국가들에서 무기등 전투물품을 지원했으며 7월 KKE는 마르코스바피아디스를 게릴라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군명칭을 DSE(그리스민주군)로 변경했고 12월기준 병력은 1만여명까지 확대됐다. DSE의 목표는 민족해방과 민주주의회복이었다. 영국군·그리스정부는 1947봄까지 진행된 여러차례의 총공세에서 계속 실패했고 DSE는 그리스산간지역남쪽까지 대규모군대를 파견하며 세력권을 확장했다.

1947.5 2국면이 시작됐다. 이때 미국이 그리스내정에 직접개입하며 그리스는 미국의 식민지로 완전히 전락했다. 1947.5 미군사고문단·CIA(중앙정보국)가 그리스정부군을 교육·훈련시켰고 미군은 직접 전쟁에 뛰어들었다. 한편 DSE는 이해 7월 2만3000여군대로 급성장했고 정보·보급담당<세포>는 5만여명, DSE방조인원은 25여만명에 이르며 전성기를 맞이했다. 6월 KKE중앙위는 프랑스공산당대회에 참석해 <그리스자유민주정부>수립안을 내놨다. 8월 DSE는 8.16 자유독립공화국이 수립됐고 자유그리스에서 지방선거가 실시될것을 알렸으며 12.24 그리스임시정부수립을 선언했다. 이시기 DSE는 그리스의 4/5를 장악하며 내전에서 승리할수 있는 자체역량이 충분하다는것을 증명했다.

1947.12 3국면이 시작됐다. 미군은 2차세계대전시기 공격형전투지휘관중 1명인 제임스밴플리트를 미군사단사령관으로 임명하며 대게릴라전을 본격화했다. 정부군참모총장·그리스최고국방위원회를 능가하는 최고사령관으로 행세한 밴플리트와 그리스정부군은 DSE를 집중공격하는 한편, 그리스정부는 1944이전 사형선고를 받은 진보인사 238명을 총살하고 839명에 사형선고를 내리며 진보세력을 대량학살했다.

1948.4 미군·그리스정부군은 루멜리산맥남중부지방을 소탕하고 북부 그라모스지역에 네이팜탄을 퍼부으며 DSE말살책동을 벌였다. 1948.10 4국면이 시작되면서 밴플리트는 최후의 소탕작전을 준비했다. 북부국경선을 따라 DSE를 봉쇄하고 펠로폰네소스를 소탕, 북부지방에서부터 중부지방을 휩쓸며 DSE근거지를 파괴하고 전국적으로 DSE근거지를 제거하려는 계획이었다. 

미군·정부군은 1949.8 DSE주요방어거점에 대한 최후공격작전을 개시했다. 전투기는 그리스·알바니아국경에 있는 그라모스산맥에 6일동안 무려 826회나 출격하며 250t의 폭탄·로케트탄·네이팜탄을 퍼부었다. 10월 DSE는 종전을 선언했고 미정부는 11월 미의회에서 그리스정부군의 승리를 선언했다.

2국면까지 승승장구하던 DSE가 결국 패배한 근본원인은 KKE내부의 종파기회주의세력의 분열행위에 있다. 3국면시기인 1948초 DSE가 남쪽까지 활동하고 여러섬까지 세력을 확대했으나 이해 이오시프스탈린소련공산당서기장에 대한 유고슬라비아 요시프브로즈티토공산당서기장의 반발과 분열은 DSE내 분열을 촉진했다. 스탈린은 일관되게 KKE·그리스민중의 자결권을 우선으로 내세우며 그리스문제를 대한 반면 티토는 그리스까지 포괄한 <발칸연방>을 조작하기 위해 공작하고 KKE와 DSE를 분열시키며 종파적으로 행동했다. 자카리아디스는 원칙적으로 스탈린에 충실했던 반면 바피아디스는 티토에 의존하면서 DSE의 내부가 분열됐다. 자카리아디스와 바피아디스간 사상투쟁이 격화됐고 친티토세력이 정리되는 과정에서 바피아디스는 1949.1 총사령관에서 해임됐다. 그러자 티토는 1949하반기 유고슬라비아·그리스국경을 폐쇄해 유고슬라비아경내에 있던 DSE부대원4000여명과 북부DSE주요집결지를 격리시키면서 DSE에 심각한 위해를 가했다. 티토는 급기야 미군·그리스정부군이 DSE근거지를 공격할수 있도록 유고슬라비아국경을 열어주는 범죄적만행을 저지르며 전쟁패배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티토의 배신과 달리 스탈린은 마지막까지 알바니아를 통해 DSE에 전쟁물자를 지원했고 그리스의 자결권을 침해한 티토를 코민포름에서 제명했다. 자카리아디스와 견결한 그리스공동주의자들을 소련영내로 받아주며 끝까지 국제주의적신의를 다했다.

흐루시쵸프의 수정주의와 KKE의 자카리아디스제명

수정주의로 변질된 티토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관료적부르주아독재로 바꾸고 사회주의적경제를 자본주의적경제로 바꿨으며 국제적으로도 제국주의의 부역자로 전락했다. 1960 티토와 그리스반동들은 지중해에서 미6함대와 공동으로 알바니아무장공격을 계획하기까지 했다. 당시 알바니아는 견결한 공동주의자 엔베르호자가 노동당총서기로서 국가를 운영하고있었다. 

니키타흐루시쵸프는 티토의 <제자>를 자처했다. 1956 소련공산당20차대회에서 흐루시쵸프는 배신적인 스탈린격하운동을 실시했다. 흐루시쵸프는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를 <성지>로 여기며 <티토의경험을배울것>·<(티토)와같은이념에속해있으며같은이론을따르고있다>고 떠들었다. 1961 흐루시쵸프는 소련공산당22차대회에서 <평화공존>·<평화이행>을 내세우고 프롤레타리아독재를 부정하는 수정주의이론을 주창하며 소련공산당을 완전히 변질시켰다.

흐루시쵸프의 수정주의와 사상전을 전개한 공동주의지도자는 김일성주석과 모택동중국공산당총서기, 호자알바니아노동당총서기와 자카리아디스 4명이었다. 그중 자카리아디스는 소련망명중임에도 원칙성을 철저히 견지하며 공동주의운동의 모범을 창출했다.

내전후 자카리아디스는 1만8000명KKE성원들과 소련우즈벡의 수도 타슈켄트에서 당을 재조직했고 1950.10 KKE3차회의를 개최했다. 회의에서 1940이후 우파기회주의에 대한 정확한 정치적평가를 진행했다. 

스탈린사후 소련공산당을 장악한 흐루시쵸프와 수정주의자들은 KKE지도부가 반스탈린·수정주의노선을 따를 의지가 없다는것을 확인했다. 흐루시쵸프가 내세운것은 유고슬라비아를 <사회주의>국가로 인정할것, 반스탈린입장, 코민포름해체였으나 자카리아디스는 이모든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흐루시쵸프는 타슈켄트당내 반스탈린기회주의자그룹을 조작하려했으나 자카리아디스와 원칙적공동주의자들에 의해 가로막히자 1955.9 KKE기회주의자들을 사촉해 타슈켄트에서 유혈폭력을 일으켰다. 200여명의 기회주의자들이 타슈켄트당조직사무실을 공격했으나 자카리아디스와 KKE핵심을 잡는데 실패했다. 이후 기회주의자들은 자카리아디스가 쓴 책을 불태우는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이같은 사건들로 인해 수백명의 공동주의자들이 폭력사건에 연루돼 체포·수감됐다. 한편 KKE는 흐루시쵸프의 조종대로 자카리아디스의 결정에 대해 1956.3 중앙위6차총회에서 <심각한실수>·<종파적정책>이라고 비난했고 1957.2 자카리아디스를 당에서 제명했다.

알려진것만 독살·벽돌테러·차량충돌등의 자카리아디스에 대한 3번의 암살시도가 있었다. 한KKE정치국위원은 그의 저서에서 <소련지도부의한대표가나에게1949시작된음모를완수할수있도록도와주면그대가로내가KKE총서기가되는것을도와주겠다고제안했다>며 흐루시쵸프의 배신과 음모가 일찍이 시작됐다는것을 폭로했다. 자카리아디스는 이후 시베리아에 사실상 유폐됐고 1973.8 70세의 나이에 시베리아 수르구트의 자택에서 숨진채 발견됐다. 암살된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1949이후 해외에 망명한 KKE당원들의 90%가까이는 소련공산당20차대회결정사항을 거부하며 강력한 투쟁을 전개했다. 1958 6000명당원들이 당내외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주변공산당들에게 집단적으로 서신을 보냈다. KKE당원들은 서신을 통해 오늘날 KKE중앙위는 더이상 인민들의 혁명적투쟁을 이끌었던 지도부가 아니라고 규정했다. 그이유는 현당지도부가 1955.9 타슈켄트 당지부에서 KKE를 겨냥한 정치적도발의 결과로 성립됐고, 1956 6차총회의 결정을 바탕으로 세워졌고, 수정주의지도부의 정책이 6차총회전 KKE가 견지했던 혁명적노선을 수정했고, 맑스레닌주의제반원칙들에서 이탈한 기회주의적노선을 추종했고, 그결과 인민들의 투쟁을 약화시켰고, 인민대중의 운동을 그리스부르주아계급의 이해에 종속시켜서라고 폭로했다. 1962부터 소련은 변질된 KKE의 협력하에 자카리아디스의 지지자에 대한 대대적검거를 실시했다. 지지자들과 당의 중책을 맡았던 책임비서들은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되거나 구금됐다. 

6차총회이후 KKE는 1946~49 무장투쟁을 부정하고 의회주의를 채택했다. KKE주도세력은 그리스내 비합법당조직을 해산했고 공동주의자들과 자유당에 합류하지않은 사회민주주의세력을 포함해 EDA(통일민주주의좌익)에 통합시켰다. 당조직이 해산된 조건에서 소련식<인민민주주의>를 따르던 KKE는 1961 8차당대회를 조직했다. 당대회에서 1956이후 KKE정치노선을 승인하고 단계적전략을 편성하며 <민족부르주아지>를 동력중 하나로 포함시켰다. 그리스의 부르주아자유주의정당 <중앙연합>은 EDA와 <민주정부>구성을 제안하며 EDA의 분열을 촉진했고 EDA는 1964 총선에서 중앙연합후보자당선을 위해 24개선거구에서 불출마를 결정했다. 그럼에도 중앙연합은 정부구성후 KKE의 비합법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EAM을 인정하지않았으며 정치적난민의 본국송환을 허용하지않았고 공동주의정치범을 석방하지않았다. KKE는 소련이 붕괴될때까지 소련식수정주의를 완전히 따르면서 공동주의원칙을 훼손했고 공동주의운동을 변질시켰다.

KKE와 시리자

시리자(SYRIZA 급진좌파연합)를 구성하는 여러정파중 핵심은 SYN(Synaspismos 연합)이다. 1968 KKE내부분열의 결과 유로코뮤니즘세력이 현재 SYN으로 이어졌다. 시리자의 성격은 사회민주주의정당이다. 일례로 2022 해산된 민주좌파당은 2015 총선에서 사민주의정당인 파속(PASOK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과 연대해 연립정부를 구성했는데 이정당은 2010 시리자에서 친유럽주의분파가 분리돼 만들어졌다. 

2008 경제위기·민생파탄을 규탄하는 민중시위에서 15세고등학생이 경찰의 총격에 사망하며 그리스민중의 분노가 크게 폭발했다. 청년들은 이사건에 항의하며 1달 넘게 거리를 점거하고 투쟁을 이어갔다. 시리자는 원내정당중 유일하게 이투쟁을 지지하며 함께했다. 이는 2010이후 시리자가 정치적으로 빠르게 부상할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반면 KKE는 이투쟁을 <아나키스트들의폭력성>·<프락치들의선동으로일어난것>이라고 비난했다. 2008이후 그리스민중의 투쟁은 계속 고조됐으나 KKE는 정작 대중운동의 비중을 줄여왔고, 대중적자발성을 적대적으로 간주하기까지 했다. 대중투쟁을 하나로 결집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아테네중심부에 위치한 신타그마광장에서의 투쟁들을 <계급의식이나정치프로그램이없는소부르주아집단>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KKE에 대해 노동조합과 학생운동에 상당한 영향력이 남아있으나 매우 분파적정당이라고 평가하며 구체적으로 KKE가 공산당에서 분리한 세력을 <배신자>로 낙인찍고 자생적운동을 <아나키즘>으로 폄하하며 대중집회외부에서 독자집회를 여는 식의 분열적행위를 하고있다고 비판하고있다.

2010년대 KKE는 <이념적정치적차이>를 이유로 좌파연합정부구성가능성·시리자와협력·시리자정부신임투표등을 모두 거부했다. 이시기 시리자는 사민주의정당이지만 그내부구성에서 마오주의조직이 2번째로 큰조직이고 그외 여러좌파세력이 결집해있으며 이들이 어느정도 영향력을 행사하고있었다. 무엇보다 시리자는 이당시 그리스민중이 촉구하던 <긴축반대>를 주요공약으로 내세우고있었다. 2012총선에서 시리자는 <통합좌파정부구성>구호를 내세우고 <긴축친화적세력>과는 동맹을 맺지않으며 KKE와 대비됐다. KKE가 2012총선에서 시리자에 지지기반을 빼앗겼던 주된 이유중 하나다.

2015총선에서도 시리자는 <좌파연합정부구성>을 논의하기 위해 KKE와 접촉했으나 KKE는 이를 원천적으로 거부했다. KKE는 총선에서 2012.6선거대비 약1%높은 지지율을 획득한 5.4%를 기록했는데, 이를 <성과>로 자찬했다. 2012.5선거결과와 비교하면 3%가 하락한것이고 34년전 지지율인 11%에 비하면 절반수준이다. 자국이 극심한 경제위기와 엄청난 사회적재앙에 직면한 조건에서, 스스로 <혁명적>이라 자부하는 공산당이 5.4%득표율에 만족하는것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에선 KKE가 시리자에게 협력의 전제조건으로 노동계급중심의 정책을 최대한 제안하고 이를 시리자가 거부할경우 이사실을 폭로·규탄하며 시리자의 노동자기반에 지지를 호소했다면 KKE의 대중기반이 더욱 강화됐을것이라고 분석했다.

한편 2015 KKE와의 선거연합에 실패한 시리자는 우익신민주당에서 갈라져나온 독립그리스인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며 우경화됐다. 2023.6 시리자의 총선실패는 우경노선이 곧 반민중적노선임을 보여준다.

KKE는 스스로 <혁명성>을 자부하지만 KKE가 아닌 다른 대중투쟁들을 부정하면서 사실상 항쟁노선을 저버렸고, 선거에 있어서도 전략전술이 부재한채 좌경일변도로 일관하고있다. 그리스민심이 KKE에게서 희망을 찾지못하는 근본원인은 KKE에게 있다.

국제공동주의조직을 앞세운 그리스공산당의 반혁명행위

1992.4.20 평양선언이 채택됐다. 국제공동주의정당들의 48명당수반들을 포함해 70개공산당·노동당·진보적정당대표들이 선언문인 <사회주의위업을옹호하고전진시키자>에 서명했다. 사회주의의 본질적우월성, 사회주의승리의 역사적필연성을 해명하고 일부나라들에서 사회주의가 좌절된 원인과 교훈을 과학적으로 밝히면서 국제적단결을 강화할데 대한 공동의 투쟁과업을 명시했다. 평양선언은 1991 소련붕괴이후 국제혁명역량이 나아갈 길을 제시한 투쟁강령으로 평가된다. 

뤼도마르텐스벨기에노동자당당수는 현대판수정주의에 맞서 맑스레닌주의원칙성을 견결하게 고수하며 사상투쟁을 전개했고 김일성주석이 서거전 마지막 만난 외국인으로 알려진만큼 조선노동당과도 각별했다. 마르텐스는 소련사회주의붕괴원인에 대해 규명하기 위해 노력한 한편 국제공동주의세력단결을 위해 당시 맑스레닌주의운동의 4가지주요경향인 친소련·친중국·친알바니아·친쿠바의 통합을 구체적으로 제안했다. 1990년대 저명한 공동주의이론가에는 마르텐스외 영국의 하팔브라, 우크라이나의 타밀라야브로바, 러시아의 니나안드레바가 있다. 마르텐스가 맑스주의기치를 계속 고수하는 구소련내 여러조직들과 접촉하면서 길을 모색했으나 공동노선을 수립할수 있는 통합된 지도력이 없는 현실은 여러한계를 낳았다. 

4명의 공동주의이론가는 결집해 KKE를 바로세우고 국제공동주의조직 솔리드넷(국제공산당·노동당대회 IMCWP)을 창설했다. KKE는 1980년대 미하일고르바쵸프의 반사회주의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에 동조하며 현대수정주의의 길을 걷다가 소련붕괴후에야 비로소 1995 테제를 통해 현대수정주의에 대한 <자기비판>을 하고 자카리아디스를 재평가했다. 문제는 KKE가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지않아 오류를 계속 반복하고있다는것이다. 현재 KKE가 주창하는 사이비<제국주의피라미드>론과 KKE와의 사상전을 진행하는 참된 국제공동주의자들에게 음해모략을 퍼붓는 종파기회주의행태로 증명된다.

솔리드넷이 유명무실해진 가장 큰 이유는 조직자인 KKE의 사상이론·전략전술상 오류때문이다.

2022.10 쿠바 아바나에서 개최한 22차국제공산당·노동당대회는 철저히 양분돼 진행됐다. 주요원인은 우크라이나전에 대한 관점·입장차이였다. KKE는 우크라이나전을 미제국주의와 러제국주의간 전쟁으로 바라보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특수군사작전을 1999 나토의 유고슬라비아공습에 비유하며 젤렌스키우크라이나정권이 러시아에 <대항>해 <해방전쟁>을 벌이고있다고 왜곡하고있다. 대회에서 페트로시모넨코우크라이나공산당(KPU)서기장은 <젤렌스키키예프정권은파시스트정권>이며 KKE가 주도한 공동성명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내부 공산당들의 입장과 의견을 사전에 충분히 고려하지않고 폐쇄적상태로 발표했다고 공개비판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돈바스공동주의자들은 우크라이나전은 미제국주의와 나토제국주의자들이 젤렌스키파쇼정권을 내세워 러시아를 포위하고 돈바스자결권을 부정하면서 벌어진 전쟁이며, 미·나토는 파시즘을 국제적으로 <수출>하고있다고 폭로하며 러시아는 이전쟁에서 방어적입장이라고 강조했다. 브라질공산당대표는 <파시즘을진압하려는러연방의행동은지지돼야>, 시리아통합공산당대표는 <부르주아러시아가패배할경우세계가암흑속에빠져들게될것>, 카탈로니아공산당대표는 <나토가우크라이나를대신해전쟁을벌이고있다>고 입장을 밝혔다. 2023 미국이 우크라이나와 함께 이스라엘의 편에서 침략무력을 투입하며 대리전·장기전을 전개하고있는 현실은 누구의 입장이 과학적인지를 보여준다. KKE가 주도하는 솔리드넷은 결국 수정주의적변질로 사멸한 2국제당의 전철을 밟아가고있다.

2013 창설된 유럽공산당·조직의 연대체인 이니셔티브(공동주의이니셔티브 ECI)가 2023.9.11 해산됐다. KKE가 조직자로 있던 이니셔티브는 온라인회의를 열고 조르고스마리노스KKE정치국위원의 폐막연설을 통해 일방적으로 이니셔티브의 해산을 선언하며 이니셔티브의 이름과 로고의 사용을 금지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이니셔티브사무국은 <유럽공산주의이니셔티브활동종료>성명을 발표했다.

친KKE세력은 이니셔티브해산이 그창립목표대로 운영되지않아서라고 변명한다. 이니셔티브는 창립선언에서 그목표를 유럽·유럽연합과 관련한 문제에서 유럽민중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노선에 대한 연구, 노동자들의 공동입장을 구체화하고 연대등 여러활동을 조정하는것을 내세우고있다. 실제 이니셔티브는 수년간 실질적인 활동을 하지못한채 유명무실했던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근본원인은 이니셔티브의 패권을 쥐고있던 KKE에게 찾는것이 상식이다. 현실에서는 10년간 명맥을 이어온 국제조직체가 폭력적으로 해산되는 결과가 발생했다.

KKE는 이니셔티브해산이유로 세계반제플랫포옴을 들면서 자신들이 종파주의집단임을 자인했다. KKE중앙위원회국제관계부의 논평에서 KKE는 프랑스공동주의조직인 PRCF가 제기하는 문제에 대해 <터무니없는비난>이라고 매도하며 이니셔티브사무국은 <활동종료에찬성했다>는 하나마나한 말을 되풀이했다. PRCF의 <토론·과반수·투표>없는 일방적해산에 대한 문제제기에 대해 KKE는 이니셔티브의 활동은 정치적만장일치원칙에 따라 결정된다고 강변하고있다. PRCF는 <이단순한청산에찬성하는만장일치나절대다수는없었다>고 단호하게 반박하고있다. PRCF가 이니셔티브해산을 공식적으로 규탄하는 이유는 이번 사건이 오랫동안 인터내셔널의 재탄생을 방해해온 종파주의의 결과 일어난것이며 KKE가 <합의가아니면아무것도아니다>는 식의 패권적입장을 고수하며 유럽공동주의·진보주의의 단결을 방해해왔기에 그렇다.

KKE가 주창하는 <만장일치>가 실제 이니셔티브내에서 작동하지못한 이유는 KKE가 우크라이나전을 러제국주의의 침략전쟁으로 규정하는 식의 정세분석·전략전술상의 심각한 오류를 낳고있고, 인식의 바탕에 <제국주의피라미드>론과 같은 반혁명론, 수정주의가 있어서다. 이니셔티브내 맑스레닌주의원칙을 고수하는 조직들이 KKE의 수정주의·기회주의노선을 배격하는것은 당연하다.

KKE의 이니셔티브해산의 저의는 <KKE가이니셔티브를일방적으로해산했다고비난하는PRCF와이니셔티브의다른일부당사자들은일부의심스러운집단과함께소위세계반제플랫포옴에참여해KKE의내용을저속하게모욕하고왜곡한다>는 공식입장을 통해 보다 명확히 확인된다. KKE는 세계반제플랫포옴의 노선에 대한 어떤 과학적비판도 하지못하고있다.

KKE는 이니셔티브가 해산된지 2달여만인 2023.11.18 친KKE조직만 모아서 <유럽공산당과노동자정당의새로운지역협력조직>건설을 발표했다. 30여개정당·조직으로 구성됐던 이니셔티브에서 10여개정당·조직으로 축소된 이조직은 KKE가 유 럽공동주의운동을 어떤 식으로 분열·약화시키는지 정확히 보여준다.

KKE의 수정주의, 기회주의, 종파주의

KKE의 수정주의, 기회주의, 종파주의 문제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KKE는 2017 20차당대회보고·테제에서 쿠바에 대해 <자본주의관계의지속적강화>, 북에 대해 <자유경제지대>·<시장>추구라며 사회주의국가들의 실상을 악의적으로 왜곡했다. 심지어 북의 정치적특성을 <족벌체제>로 규정하며 제국주의침략세력의 북에 대한 흑색선전에 사실상 동조했다.

코민테른에 대한 평가에서 KKE의 반스탈린주의·반역사성을 확인할수 있다. KKE는 코민테른 6차대회의 사회민주당에 대한 <사회파시즘론>규정을 근거로 코민테른을 <좌편향>으로 규정하더니 7차대회의 반파쇼인민전선을 <노자협조주의>라며 <우편향>이라고 강변했다. 사민주의에 대해 <자본에대한프롤레타리아투쟁의통일전선을분열시키고해체>시키지만 <다른정치상황에서사민주의가반정부정당의자격으로부르주아정부에반항의기세>를 보일수도 있다는 코민테른6차대회의 과학적분석을 완전히 부정하며 악의적으로 왜곡했다.

KKE는 세계반파쇼통일전선의 빛나는 모범인 7차대회를 중점적으로 비난하며 그리스내전의 패배요인을 7차대회노선에 충실했던 자카리아디스에게 들씌우고있다. 역사가 보여주듯이 7차대회는 세계적범위에서 전투적인 반파쇼투쟁을 추동하며 식민지·반식민지에서 광범한 민족해방전선을 형성하는데서 결정적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KKE는 7차대회에 대해 <환상과화해정신>이라고 매도하고있다. 무엇보다 파시즘을 <금융자본의가장반동적인,가장배외주의적인,가장제국주의적인요소들의노골적인테러적독재>로 규정하면서 반파쇼통일전선을 노선으로 채택한 7차대회를 전면부정함으로써 KKE의 사상과 노선이 트로츠키주의와 다르지않다는것을 자인했다.

KKE의 사상적문제는 <제국주의피라미드>론으로 집약된다. 영국 CPGB-ML은 <제국주의피라미드>론이 상품과 무역이 있는 모든 경제를 <자본주의경제>로 보는 오류에 기초를 두고있다고 설명한다. 상품은 노예제·봉건제에도 존재했으며 사회주의사회에서도 한동안 존재한다는 사실을 무시한 이런 사이비이론에 대해 <저급>하다고 비난한다. <제국주의피라미드>론은 자본주의적생산이 독점화됐다며 현대의 모든 자본주의국가는 곧 제국주의국가라고 억지를 부리며 레닌의 <제국주의최고단계>로서의 제국주의개념자체를 부정하고있다.

<제국주의피라미드>론에 따르면 미국·영국·프랑스만이 아니라 러시아·중국과 심지어 쿠바·북에 이르기까지 시장과 무역이 존재하는 모든 나라는 <제국주의>며 단지 거대한 세계적<피라미드>에서 서로 다른 지위를 차지하고있을뿐이다. KKE는 레닌의 저작에서 무작위로 몇가지진실, 예컨대 <자본주의는독점하는경향이있다>등을 골라 모든 맥락에 도용해 <제국주의피라미드>론의 근거로 삼고있다. 그러면서 레닌이 <제국주의하에서기본적이고중요하며불가피한것>이라고 묘사한 국가간 극심한 착취·불평등의 세계적체제에 대한 레닌주의적개념을 황당하게 뒤집고있다. KKE는 독점자본가가 되길 원하기때문에 독점자본가가 된다, 독점시대자본주의자이기때문에 독점자본가다, 국가경제의 한부문을 경쟁 없이 운영하기때문에 독점자본가다라는 식으로 관념적, 형이상학적으로 개념을 규정하고있다. CPGB-ML은 KKE가 맑스레닌주의의 유물변증법을 완전히 저버리고 <이상주의적정체성정치>로 변형시키고있다고 폭로했다.

KKE의 실천상의 우경기회주의는 <그리스나토탈퇴>구호를 들지않는것으로 드러난다. 칠레공산당(프롤레타리아행동)은 KKE의 나토에 대한 비판은 여러곳에서 찾아볼수 있지만 그리스의 나토탈퇴를 요구하는 단 하나의 성명·선언·요구도 없다는것을 지적했다. 실천에서 우경기회주의적인 KKE가 오히려 KKE의 견해를 비판하고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세력일반을 <기회주의대변인>으로 만들면서 공통분모를 찾는 대신 국제공동주의자들을 분열시키는것부터 시작한다고 칠레공산당은 맹렬히 비판하고있다. 

PSUV(베네수엘라통일사회당)를 음해모략하는 KKE의 친제국주의적입장은 KKE의 반역적본색을 보여준다. 칠레공산당은 PSUV정부가 미국과 협정을 맺고 베네수엘라노동계급·민중에게 반민중적공격을 가했다는 KKE의 주장을 반박했다. KKE는 현베네수엘라정부가 미제침략세력과 직접 대결하고있는 반제국주의정부며 남아메리카경제·정치적통합을 강화하고있는 정부이자 쿠바와의 연대를 강화하고있는 정부라는 사실을 무시하고있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 베네수엘라정부가 미제의 조종하에 발생한 우익세력의 폭력시위에 경찰력을 동원한것에 대해 KKE가 <노동계급·인민대중을향한반인민적공격>으로 왜곡하고있다고 거세게 비판했다. 베네수엘라가 미국과 맺은 협정도 정치적인것이 아니라 경제적인것이라며, 베네수엘라가 <정치적순수주의>명목으로 경제적<자기봉쇄>를 단행하고 자국경제를 목졸라야하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리스혁명조직은 KKE가 혁명전통을 부정하고 자당의 혁명가이자 지도자인 자카리아디스를 여전히 기회주의자로 낙인찍고있는것을 근본문제로 지적한다. 2011.7 자카리아디스의 당권은 복원했으나 KKE는 자카리아디스가 본질적으로 반파시즘·반제국주의투쟁을 위한 코민테른의 전략·전술을 전면적으로 수용했기때문에 <기회주의>라고 매도하고 <제국주의피라미드>론에 근거해 자카리아디스가 <정책적실수>를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부싯돌은 세게 부딪힐수록 밝은 빛을 낸다. 1915 레닌은 짐머발트회의에서 1차세계대전의 전쟁성격을 과학적으로 규정하고 국내전쟁으로의 전환을 주장하며 2국제당의 수정주의, 기회주의, 종파주의를 분쇄하고 1917 러시아혁명을 성공시켰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진행중인 3차세계대전의 첨예한 정세속에서 현대수정주의, 기회주의, 종파주의와의 사상전을 전개하며 반제공동투쟁을 강화하고있는 국제공동주의자들의 최후승리는 확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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