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 항쟁의기관차〉 미국의 지원하에 벌어진 2차국공내전

1946~50 진행된 2차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국공산당은 중국본토에 1949.10.1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고, 패배한 중국국민당은 1950초 대만으로 도주했다. 2차국공내전과정에서 장개석의 아내인 송미령은 미국에 대한 로비를 맡았다. 송미령은 중국4대재벌인 송씨가문의 막내딸이자 송자문의 여동생으로 장개석과 결혼한뒤 미국과의 외교전면에 나섰다. 항일전쟁시기 미국으로부터 전투기와 공군지원을 약속받고 용병공군부대창설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2차대전후 전후처리를 논의하는 카이로회담에서 장개석을 대신해 협상과 통역을 담당한것도 송미령이었다. 2차국공내전은 1946.6 장개석군대가 중국공산당의 중원해방구를 공격하며 시작됐다. 코리아전이 그랬듯이 2차세계대전이 끝나던 1945.8부터 이미 양측의 공방전은 계속 있었다. 국공내전은 1927 장개석이 1차국공합작을 깨고 상하이에서 공산당원들과 노조원들을 학살하며 시작됐다. 당시 노동운동과 북벌을 통해 민중의 지지를 받던 공산당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일제의 침략과 2차국공합작으로 잠시 내전을 멈췄지만 양측의 긴장관계는 해소되지않았다. 1946.6 장개석군대는 초기에 병력과 장비, 보급의 우세로 1947.3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수도인 옌안을 점령했다. 그러나 장개석군대의 지나친 병력분산과 국민당정부의 총체적부패,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난으로 전세는 홍군(인민해방군)에게 유리해졌다. 총공세1년동안 연전연승하던 국민당군규모는 줄어든 반면 패퇴하던 홍군의 규모는 급격하게 늘어났다. 장개석군대는 전투로 손실된 병력을 충원하지못한 반면 공산당의 토지정책을 적극 지지한 수많은 농민들이 홍군을 지원·입대했다. 중국공산당은 1946.5 해방구에 경자유전원칙의 토지정책을 시행해 농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만주지역의 전투에서는 미국이 훈련시키고 미제무기로 무장한 장개석의 최정예부대가 투입됐으나 주력부대가 궤멸됐고 이는 곧 장개석군대의 패배로 직결됐다. 그이후 진행된 핑진전투·랴오선전투·화이하이전투등 국공내전3대전투에서 장개석군대가 패하면서 국민당정부는 무너졌다. 장개석은 1949.1 전투패배를 책임지고 총통직에서 물러났다. 전쟁이후 진행된 평화회담에서 국민당은 조선을 예로 들면서 분할안을 주장했으나 주은래총리는 <중국은조선이아니고장강은38선이아니다>라고 반박했다. 모택동주석은 담담타타(談談打打)전술로 한편으로는 평화회담, 다른 한편으로는 군대를 장강북쪽에 배치해 명령만 내리면 남하하도록 준비시켰다. 결국 회담은 결렬됐다. <국민당정부>는 10.1 모택동이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10.14 인민해방군이 광저우를 점령하자 12.8 중국본토에서 대만으로 철수했다. 트루먼미대통령은 1950.6 코리아전이 발발하자 대만해협에 7함대를 파견하며 중국을 견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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