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의해 심화되는 <대만위기설>은 <남코리아위기설>과 직결된다. 코리아전당시 미해군7함대가 대만해협에 전개되며 대만전위기가 고조됐던 사실은 남코리아와 대만의 운명이 연결돼있음을 보여준다. 코리아전이 발발하기전 미국은 국내적으로는 2차세계대전후 군수산업침체에 따른 경제불황을 겪고있었고 국외적으로는 중국을 견제하고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세력들과의 대결에서 우세를 점해야만 했다. 이러한때 중국이 대만을 수복하려한다는 <대만위기설>이 등장했다. 중국의 움직임을 민감하게 주시하고있던 미국은 <중국공산당이대만공격을의연히생각하고있는데그것은여름의어느날에개시될것>이라는 첩보로 중국인민해방군의 대만해방작전준비가 완료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위기감을 느낀 미국은 국면전환을 위한 다른 전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2022 중미관계가 얼어붙은 가운데 8월 펠로시미하원의장이 대만을 방문하면서 대만해협의 긴장이 전례없이 높아졌다. 펠로시가 대만에 도착하자 중국은 전투기를 급파해 대만해협을 횡단하며 무력시위를 벌였다. 미국은 합동군사연습을 전개하고 핵항모 로널드레이건호등 전함4척을 대만인근에 배치하며 4차대만해협위기를 심화시켰다. 코리아전정전협정체결이후 중국은 미완으로 남은 대만지역수복을 겨냥해 1954, 1958 본토에서 3㎞ 떨어진 진먼섬을 포격했다. 이때마다 대만은 항상 미국의 도움으로 그상황을 모면했다. 미국은 대만해협에 해군력을 배치했고, 군함·전투기등을 동원해 중국을 압박했다. 당시 중미갈등은 핵전쟁이 상정되는 수준까지 치달았지만 레드라인은 넘지않았다. 중국은 미군에 대한 공격을 전면금지했고 미국도 1954 대만과 체결한 상호방위조약에서 진먼섬은 배제했다. 2차대만위기이후 중국군과 대만군의 진먼섬포격은 격일로 이뤄지다시피했고 1979 중미수교후 중국은 포격을 중단했다. 1995 3차대만해협위기는 리덩후이대만총통의 방미로 촉발됐다. 중국은 그해 7월 대만해협에서 미사일발사, 11월 대규모상륙훈련을 진행했다. 미국도 항모전단을 파견하며 대대적인 압박을 가했다. 당시 인민해방군은 미항모타격단의 접근을 차단하는 강력한 전투력을 갖추지못했기에 대만상륙작전은 불가능했다. 중미 양측의 군사행동은 일정한 선에서 이뤄졌다. 중국이 대만근해에서 발사한 미사일탄두는 모조품이었고 실탄사격도 상징적인 조치에 그쳤다. 미국은 항모전단을 파견하면서도 외교장관회담을 통해 <하나의중국>원칙을 지지했다. 3차대만해협위기당시 중국의 외교노선은 등소평의 <도광양회>였지만 현재 시진핑주석은 강력한 경제·군사력을 바탕으로 <대국굴기>를 선언한 상태다. 3차대만해협위기당시 중국공산당푸젠성부성장은 인민해방군예비군고사포사단장으로 긴급 임명됐는데 그고사포사단장이 바로 시진핑이었다. 시진핑의 26년전 체험은 중국을 분기탱천하게 했고 시진핑이 영도하는 지금의 중국은 미항모타격단을 압도할 우세한 전투력을 갖춘 군사강국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