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세계대전이후 전세계적범위에서 사회주의혁명과 식민지민족해방운동이 승리하자 미국은 대소봉쇄정책인 <트루먼주의>를 발표했다. 미국은 <냉전>구도를 만들고 제국주의진영의 지배영역을 확장시켰다. <냉전>시기 봉쇄정책인 격퇴전략으로 아시아에서는 1950년대 코리아전, 1960년대 베트남전이 일어났다. 1950 발표한 <애치슨라인>은 미국의 동북아정책으로 아시아대륙주변을 둘러싸고있는 섬들의 방위를 일본의 미군거점과 결합시키는 <거대한초승달>전략의 일환이었으며 중국의 확장을 막기 위한 의도였다. 미방위선을 일본과 필리핀동쪽으로 한정하며 코리아반도를 제외했다. 북은 1946~49 2차국공내전시 중국을 최대한 지원했고 중국공산당은 내전에서 승리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했다. 1949 소련은 핵개발에 성공하면서 미제국주의를 견제할 핵억제력을 보유하게 됐다. 반면 미국은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지역에서 발을 빼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이는 제국주의침략세력의 교활한 기만책일뿐 오히려 전쟁을 노골적으로 추진했다. 미제는 1950.6.25 북코리아를 비롯한 코리아반도에 대한 무력침공을 감행했고 6.27 대만해협에 대중국군사력을 과시하며 세계패권야망을 노골화했다. 1950.6 덜레스미국무부고문은 서울을 방문해서 38선시찰후 도쿄로 이동, 맥아더미원동군사령관과의 회담에서 코리아전쟁계획을 확정했다. 소련은 확전을 막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지않았고 중국은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했다. 반면 미국은 16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군을 조작해 코리아전에 개입했다. 1950.5.1 인민해방군은 중국최남단 하이난섬을 해방했고 국민당군패잔병들은 대만으로 도주했다. 인민해방군주력부대는 대만 정면에 위치한 푸젠성에 집결해서 소련공군의 지원하에 대만상륙작전을 준비중이었다. 인민해방군은 1950.8 대만해방전쟁을 개시할 계획이었다. 1950.6.27 트루먼미대통령은 코리아반도무력개입을 결정하고 미해군7함대를 배치했다. 7함대에서 파견한 군함들로 인민해방군의 대만상륙을 원천봉쇄하고 중국의 국토완정계획을 무력화시켰다. 이에 1950.6.28 모택동주석은 <미국이중국내정에간섭하지않겠다는국제협의를깨버렸다>고 규탄했고 미국은 1953.2.2 대만해협봉쇄를 해제했다. 미국을 위시한 유엔군이 코리아전쟁에 참전한 상황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이 코리아전에 참전하기직전 중국인민해방군은 티베트를 병합했다. 중국공산당은 1950.10.13 정치국회의에서 출병하지않을경우 동북지방이 매우 불리해질수 있다는 판단하에 항미원조를 결정했고 같은달 <항미원조보가위국>기치를 들고 코리아전에 참전했다. 모택동의 아들 모안영은 코리아전에 참전했다가 미군의 대대적공습으로 전사했다. 맥아더는 국경8km내에서 폭격하지말라는 명령을 무시하며 중국동북지역을 침략했다. 첫중미간 전투는 1950.10.25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벌어졌다. 중국인민지원군은 이전투에서 미1기병사단8연대를 궤멸시키고 적들2000여명을 생포하며 승리했다. 1950.11 맥아더는 <중국공산주의자들의공격때문에북의한지역이라도포기한다면자유세계최대의패배가될것>이라면서 11.24 대공세를 개시했으나 수십만 중국인민지원군의 공격으로 대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