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분쟁은 소련이 수정주의의 길을 가면서 시작됐다. 소련은 1956 소련공산당20차대회에서 흐루시쵸프의 스탈린격하연설을 시작으로 제국주의에 대한 <평화공존전략>을 주창하며 수정주의노선을 걸었다. 이런 소련의 경향은 쿠바미사일위기때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소련은 자국의 군사적실리와 사회주의쿠바의 국가방위를 위해 1962 쿠바에 미사일기지를 건설했다. 미정찰기가 쿠바에 있는 소련산미사일을 포착, 쿠바침략을 예고했다. 결국 흐루시쵸프는 미국에 쿠바침략금지, 유럽에 배치한 미국산미사일의 제거를 약속받고 쿠바에 배치한 미사일철수에 합의했다. 쿠바미사일철수는 쿠바와의 신의를 저버린 행위였고 카스트로쿠바수상은 <소련과우리의관계는악화됐다.이일은오랫동안쿠바와소련의관계에영향을끼쳤다.>며 소련의 투항주의적모습을 비판했다. 소련은 수정주의적오류를 범하면서 수세에 몰리다가 결국은 <냉전>에서 패배했다. 제국주의진영의 압박은 다방면적으로 이뤄졌고 수정주의소련은 제국주의미국과의 협상에서 계속 밀리다가 결국은 <페레스트로이카(개혁)>·<글라스노스트(개방)>를 받아들이며 사회주의원칙까지 저버렸다. 이어 1989 동유럽사회주의도 무너졌다. 중국은 수정주의노선을 걷는 소련에 비판적이었고 중소분쟁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1962 중국·인도국경분쟁시 소련은 중립적태도를 취하며 사실상 인도를 지지했고 1964 모택동주석은 소련을 자본주의국가라고 비난하면서 중국공산당과 소련공산당의 관계를 단절했다. 1967 <문화대혁명>시기에는 중국의 홍위병이 베이징주재 소련대사관을 습격하기도 했다. 1968 중국은 사회주의나라들에 대한 소련의 개입과 종주권을 정당화하는 브레즈네프독트린을 비판하며 소련을 사회제국주의라고 규정했다. 한편 중국은 국내적으로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문화대혁명>의 후과를 극복해야할 과제가 있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에 의한 미국내 반전시위, 세계적인 반미정서로 인해 조성된 정치적위기를 모면해야하는 상황이었고 중미는 이런 각자의 이해관계로 중미관계정상화를 추진했다.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사회주의대국들인 중국·소련의 분열과 사회주의의 약화를 촉진할수 있었다. 1967.10 닉슨미대통령은 <작은지구상에잠재적으로가장유능한10억의(중국)사람들이<적대적고립>속에살아야하는공간은없다>고 발언했고 1969 아시아지역에 대한 외교정책인 닉슨독트린을 발표했다. 닉슨독트린의 요체는 <아시아의방위는아시아에게맡긴다>는것으로, 사실상 아시아에서 대중국봉쇄해제를 의미했다. 주남미군이 감축되고 미군의 베트남전철수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1971 키신저미안보담당보좌관은 은밀하게 파키스탄을 거쳐 중국에 들어가 주은래총리와 만나 양국관계개선에 합의했고 1972.2 닉슨은 중국을 방문해 모택동과 만나 첫중미정상회담을 진행하며 상하이공동성명을 채택했다. 성명에서 양국은 20여년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관계정상화를 촉구하기로 했다. 주요내용은 평화공존원칙·패권추구반대·관계정상화·<하나의중국>원칙과대만의중국일부인정·대만주둔미군철수였다. 1971.1 중미는 대사급외교관계를 수립했고 동년10월 중은 유엔안보리상임이사국으로 지위와 권리를 갖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