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4 항쟁의기관차〉 1978총선, 박정희유신체제몰락의 서막

이승만은 제헌의회에서 선출됐으나 강력한 국회권한에 완력을 써가며 개헌을 강행해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했다면 박정희는 1~4차의 <국민투표>로 개헌을 추진해 권력을 연장했다. 이승만은 불안정한 국회권력보다 대중적인지도에 기반해 직선제로 3연임했다면 박정희는 3연임을 넘기자 <유신>을 선포하고 간선제로 권력을 유지했다. 2대총선을 제외하고 이승만시기든 박정희시기든 국회는 권력의 정당성을 포장하기 위한 기관으로 활용됐다. 박정희통치체제에서 3선개헌까지 강행됐을때 여야의원들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격렬해졌다. 박정희는 1972.10 계엄을 선포하고 <유신>을 획책하며 국회를 해산하고 권력을 더욱 강화했다. <유신>헌법에서는 대통령직선제를 폐지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며 국회의원의 1/3도 대통령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도록 했다. 이에 의거해 1972.12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가 선출됐으며 1973.2 9대총선이 진행됐다. 9대총선은 유신을 지지하는자들로 매우 형식적으로 진행됐다.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여론이 높아지자 1975.2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국민투표>는 매우 통제된 상황에서 진행됐다. 이해 5월에는 유신헌법에 대해 일체의 비방·부정·반대·왜곡, 개헌청원이나 폐기를 주장하거나 그에 찬동·선동하는 행위와 이런 내용을 방송·보도하거나 표현물을 제작·배포·판매·소지하는 일체의 행위 역시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금할수 있는 긴급조치9호가 발동됐다.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계속 됐으나 긴급조치9호에 의해 철저히 통제됐다. 1976 미의회<코리아게이트>사건으로 남코리아박정희정권의 위신이 크게 실추됐으며 카터정권은 주남미군철수등을 내세우며 박정희정권을 압박했다. 2차오일쇼크로 중공업중심의 경제는 위기에 처했다. 이런가운데 1978.12 10대총선에서 신민당이 득표율에서 민주공화당을 앞서는 결과가 나왔다. 총선은 <유신>헌법에 의거해 국회의 1/3은 이미 유신정우회77명이 차지하고있어서 국회권력자체는 가질수 없었다.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은 68석을 얻었는데 공화당이 치렀던 총선중 가장 적은 수였고 신민당은 61석을 얻었는데 득표한 유효표에서 민주공화당보다 1.1% 더 얻어 <야당의승리>라며 자부했다. 선거는 중선거구제로 한선거구에서 2명을 선출해 부산의 경우 5개선거구에서 공화당4명, 신민당5명, 무소속1명이 됐지만 공화당은 1곳에서도 1위를 하지못했고 1위와의 득표격차도 컸다. 공화당은 농촌에서도 고전을 면치못한곳이 많았고 대도시에서는 신민당47.7%, 공화당27.1%의 득표율을 보였다. 긴급조치9호로 인해 선거에서는 <유신>을 반대하는 어떤 구호도 없었지만 결과는 <유신>체제에 큰 타격을 준것으로 평가됐다. 신민당은 1979 반정부투쟁에서 주된 역할을 하게 됐다. 1979.8 YH무역노동자들은 신민당사에서 항의농성을 벌였다. 8.11 강제진압과정에 김경숙노동자가 사망하고 김영삼총재와 국회의원들, 기자들이 폭행당했다. 9월에는 대학가에서도 반정부투쟁분위기가 고조됐다. 10.4 김영삼이 국회에서 제명되고 10.16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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