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피살되고 전두환이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쥐면서 1978.12 선거로 구성된 국회는 임기를 다 채우지못하고 해산됐다. <5공화국>헌법에 따라 1981.3.25 11대총선이 치러졌다. 전두환군사정권은 총선을 4개월 앞두고 <정치풍토쇄신을위한특별조치법>으로 기성정치인567명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선거결과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은 전체의석의 54.7%인 151석을 차지했다. 민주한국당81석, 한국국민당25석으로 이뤄졌다. 1983.2~1984.11 1~3차에 걸쳐 정치활동규제자들에 대한 해금조치가 이뤄졌다. 1986.3 남은 14명까지 모두 해금됐다. 총선을 2개월여 앞두고 해금인사들을 중심으로 신한민주당을 창당하고 총선을 준비했다. 1985.2 총선투표일을 나흘 앞두고 미국망명중이었던 김대중도 귀국했다. 최대쟁점은 대통령직선제개헌문제였다. 선거결과 민주정의당은 35.2%의 득표율로 전체의석의 53.6%인 148석을 차지했고 신한민주당은 29.3%의 득표율로 67석을 얻어 1야당이 됐다. 민주정의당이 낮은 득표율로 과반수의석을 차지할수 있었던것은 중선거구제와 전국구의석배분방식에 의한것이었다. 선거후 민주한국당의 당선자들이 대거 탈당해 신한민주당에 입당했고 신한민주당은 국회개원전까지 의석수103석의 사상초유의 거대야당이 됐다. 1987 전두환이 4.13<호헌>조치를 발표하자 신한민주당은 내각제개헌주장으로 내분에 빠졌다. 당밖에 있던 김영삼·김대중은 새로운 야당 건설을 합의하고 신한민주당내에 지지세력들을 탈당시켜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통일민주당은 기본목표를 남북통일의우선적추진·대통령직선제개헌관철·의회민주주의의수호·폭압과착취로부터의국민해방·부의공정한분배실시등을 내세웠다. 총재에 김영삼이 선출됐으며 김대중은 정치활동금지가 해제되지않아 입당하지못했다. 통일민주당은 69명의 국회의원을 확보해 1야당이 됐다. 통일민주당은 전두환의 <호헌>조치를 거부하고 5.27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과 함께 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결성해 대통령직선제개헌을 위한 집회·시위등 장외투쟁을 강력히 전개했다. 노태우가 직선제개헌을 수용하는 6.29선언을 발표하자 통일민주당은 이후 대선후보선출문제를 놓고 분열했다. 10월 김대중지지자들이 집단탈당해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대선에서 김영삼28.03%, 김대중27.04%로 분열돼 36.64%를 획득한 노태우에 패배했다. 군사쿠데타정권의 교체에 실패해 1987 6월항쟁의 민주화는 절반의 승리로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