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6 항쟁의기관차〉 광주, 반파쇼항전에서 반제반파쇼항전의 시작

박정희는 죽었지만 군사파쇼정권이 끝난것은 아니었다. 전두환은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김재규의 협력자라는 혐의로 체포하고 군부를 장악하면서 실질적으로 박정희의 빈자리를 차지했다. 전두환은 고조되는 반파쇼민주화투쟁을 진압하기 위해 5.17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를 발동하고 광주학생시위가 광주민중의 반파쇼항전으로 전화되자 이를 압살했다. 그뒤 전두환은 5.27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조작하고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1980.5.17 비상계엄이 확대됐고 7공수여단이 전라남북도주요대학을 점거했다. 5.18 아침 전남대정문앞에서는 비상계엄과 휴교령에 반발하는 학생시위들을 강제해산시켰는데 경찰이 최루탄등을 사용하며 이들을 진압하다가 오후부터는 7공수여단이 직접 시위대진압에 나섰다. 5.19 11공수여단이 광주에 추가배치됐다. 군은 장갑차·헬기까지 시위진압에 투입했다. 이날 오후 시민들이 계엄군장갑차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11공수여단장교의 발포로 총상자가 발생했다. 5.20 군대의 강경진압에 반발하는 시위대가 늘어가면서 언론왜곡보도의 상징인 광주MBC와 행정기관중 하나인 광주세무서가 불태워졌다. 이날 군은 4~5만명의 시위대가 기물을 파손하고 계엄군과 대치했다고 보고했다. 일선부대에 M16실탄이 배부되고 무장을 명령했다. 3공수여단이 광주시청에서 시민을 향해 발포했다. 5.21 새벽 시민들은 시위참가자들시신을 발견하고 시신을 수습한뒤 공수부대의 만행을 알리면서 금남로로 행진해 전남도청앞에서 계엄군과 대치했다. 오전에만 10만여명이 거리로 나왔다. 시민대표단은 전남도지사를 만나 사과·연행자석방·공수부대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공수부대는 정오를 기해 전남도청앞·전남대정문부근에서 집단발포를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시민들은 광주부근 무기고를 털어 무장으로 계엄군에 맞섰다. 5.21 오후부터 공수부대는 시내를 벗어나 광주외곽을 봉쇄하고 광주를 벗어나는 민간인에게 무차별 발포했다. 봉쇄된 시내에서 시민군은 방위대를 조직하고 자치질서를 수립했다.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계엄군과의 협상과 무기회수를 시도했지만 계엄군은 협상안에 불응했다. 5.23~26 도청광장에서는 매일 시민궐기대회가 진행됐다. 5.26 청년들을 중심으로 민주시민학생투쟁위원회가 결성됐고 결사항전을 결의했다. 군은 5.27 새벽3시30분을 기점으로 최종진압작전인 <상무충정>작전을 실행했다. 공수여단특공조가 광주시내로 침투했고 미<한>연합사의 승인을 받지않으면 안되는 20사단과 31사단이 작전에 동원됐다. 04시05분 전남도청에서 시민군과 교전이 시작돼 04시55분 전남도청진압이 완료됐다. 이작전으로 윤상원·박용준을 비롯한 17명의 시민군이 사망했고 227명이 연행됐다. 수배됐던 박관현전남대총학생회장은 체포·구속된뒤 5.18광주항쟁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단식투쟁중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글라이스틴주<한>미대사나 위컴주<한>미군사령관겸미<한>연합사령관의 발언에서 남민중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반파쇼투쟁은 미국의 지배권력을 흔드는 위험한 일이었다는것이 확인된다. 미국은 전두환의 군사쿠데타가 아닌 민중의 항전을 <비상상황>으로 인식했다. 분단의 원흉이자 군사파쇼정권의 배후가 미국이었던만큼 반파쇼항전은 반제반파쇼항전으로 전화되지않을수 없었다. 남민중은 광주민중이 무장해 나섰던것처럼 희생을 두려워하지않고 파쇼폭압에 맞선 영웅적인 투쟁에 일떠섰고 1987 민중항쟁의 승리를 이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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