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군사정권의 통치체제에서도 <한>일협정반대투쟁이 거세게 벌어졌고 <유신>치하에서도 반<유신>투쟁이 적극적으로 벌어졌다. 1973.10 서울대문리대학생들의 유신반대투쟁을 계기로 전국대학들과 고등학교들은 <박정권을타도하자!>·<중앙정보부를해체하라!>는 구호를 들고 투쟁을 벌였다. 1974.4.3 남전역에서 조직적이며 대중적인 반정부투쟁이 전개됐으며 1974.9 고려대학생들의 투쟁을 발단으로 반정부투쟁이 다시 남전역으로 확대됐다. 1973.11 민주수호국민협의회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며 반파쇼민주화투쟁의 기치를 들었다. 1974.10 군사정권반대투쟁이 벌어졌다. 언론인들의 투쟁이 확대발전했으며 양심적인 문화인·지식인들과 종교인들이 투쟁대열에 나섰다. 신민당과 통일민주당이 <유신헌법>철폐를 요구하며 투쟁을 벌였다. 1975.2 유신체제를 연장하기 위한 <국민투표>를 반대해 투쟁했다. 노동자·농민들도 파쇼독재를 반대하고 생존권과 민주주의적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강화했다. 1976 3.1절57주년을 맞이해 정계·종교계·학계·법조계등의 민주인사들의 연서명으로 <민주구국선언>이 발표됐다. 박정희정권은 3.10 관련인사20명의 명단을 발표하고 김대중등 11명을 대통령긴급조치9호위반혐의로 구속하고 윤보선·함석헌등 9명을 불구속입건했다. 이해 8월 전남지역 민주인사들이 <2의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며 박정희정권퇴진을 주장했다. 1977 박정희정권을 반대하는 반파쇼민주화투쟁은 더욱 활발해졌다. 1978.7 반파쇼연합조직인 <민주주의국민연합>이 결성됐으며 1979.3 이조직을 모체로 <민주주의민족통일을위한국민연합>이 확대, 조직됐다. 1978.5~6 <유신>의 영구집권체제인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선거>를 반대하는 투쟁이 벌어졌으며 1978.12 총선에서 박정희정권에 중대한 타격을 줬다. 1979.8 YH노동자들은 생존권을 요구한 투쟁이 탄압을 받게 되면서 신민당사농성에 돌입했고 경찰의 무리한 진압작전으로 여성노동자가 목숨을 잃는 사건이 벌어졌다. 하반기 대학개강과 함께 대학가로 투쟁이 번져가면서 10.16 부산대5000여명의 학생들이 반정부집회를 열고 <유신헌법>철폐·박정희정권퇴진등의 <민주선언문>을 발표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10.16~17 시위는 항쟁의 양상을 띠었다. 폭압기관인 경찰공권력에 맞섰으며 도청을 비롯한 행정기관들과 어용언론들을 습격하고 파출소와 경찰차등파쇼폭압기물들을 타격했다. 10.18 항쟁은 주변지역으로 확대됐다. 마산의 청년학생들과 시민들은 <독재철폐>를 외치며 경찰·군병력들과 정면으로 맞섰다. 여당인 민주공화당사무실과 마산시청·파출소들·어용언론기관들을 습격했다. 항쟁은 서울·대구를 비롯해 전주·청주등 남전역으로 확산됐다. 이를 막아야했던 박정희정권은 10.18 0시를 기해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투입해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10.20 마산에 위수령을 선포했다. 10.26 12시 부산에서 계엄군을 철수했으나 이날 박정희는 이를 자축하며 술자리를 가졌는데 이자리에서 자신의 부하 김재규에게 살해당했다. 박정희의 수하로 살아온 김재규는 반파쇼민주화를 위한 민중항쟁에 박정희정권이 무너지고 민중이 사회의 주인으로 진출할것을 두려워했던것으로 보인다.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의 배후에는 미CIA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