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반아파르트헤이트투쟁
1948 남아공(남아프리카공화국)의 극우적인 국민당정권은 아파르트헤이트(인종주의)를 법률로 공식화했다. 국민당정권은 <아프리카너>를 핵심구성으로 했는데, <아프리카너>가 될수 있는 3가지조건은 네덜란드계, 모국어로 아프리칸스어사용, 네덜란드개혁교회신도였다. 아파르트헤이트는 <차별이아니라분리에의한발전>이라는 궤변을 내세우고 모든 사람을 인종등급으로 나눠 백인·흑인·유색인·인도인등으로 분류하고 인종별로 거주지·출입구역분리, 통혼금지등을 하면서 전례없는 <백인지상주의>국가를 지향했다. 국민당정권은 1951부터 인종별분리투표를 도입했고 1956 남아공국회양원에서 인종별분리투표법안이 통과되며 케이프에서의 유색인종은 일반적투표권을 박탈당했다. 그외 여러건의 아파르트헤이트입법들이 단행됐는데 그중 1950 반공법은 남아공공산당(SACP)과 정부가 <공산주의정당>이라고 지목한 모든 정당의 활동을 금지했다. 특히 공산당원에 대한 최대 징역10년형을 법적으로 규정했다. 공산당·진보세력을 불법화하고 흑인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살해하는식으로 흑인들을 탄압하는데 이법이 악용됐다. 아파르트헤이트가 있던 기간 남아공당국은 <인종분류방식>에 아이들을 끼워맞추기 위해 머리카락의 곱슬정도와 손톱모양까지 검사했고 <잘못된인종지역>에 살고있는 민간인최대600만명을 흑인거주구나 낙후지역으로 쫓아냈다.
1960 경찰발포로 인해 69명이 사망한 샤프빌학살과 1976 어린학생100명이 학살당한 소웨토학살이 발생했다. 소웨토학살은 항쟁으로 발전했다. 요하네스인근 흑인거주구 소웨토는 아파르트헤이트결과 생긴 남아공최대흑인거주지였다. 인간이하의 삶에서 소웨토아이들의 유일한 희망은 학교였다. 사건의 발단은 당국이 영어·아프리카부족어로 교육하던 학교에 아프리칸스어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한것이다. 아프리칸스어는 남아공백인말곤 아무도 쓰지않았다. 1976.4 올랜도웨스트학교학생들이 아프리칸스어수업거부를 전면에 내세우며 등교거부운동을 시작했고 6월 올랜도웨스트를 선두로 한 1만여명학생들이 교육처에 항의하며 평화행진을 시작했다. 경찰들은 학생들을 향해 최루탄투척·실탄사격을 벌였다. 그중 13살소년 헥터피터슨이 경찰의 무차별사격에 사망하자 소웨토흑인전체가 봉기하며 투쟁은 항쟁으로 발전했다. 이기간 600~700명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4000명이상이 부상당했는데 다수가 어린 학생들이었다.
소웨토항쟁을 겪은 학생들은 넬슨만델라가 주도하는 ANC(아프리카민족회의)의 군사조직에 대거 들어갔다. 그결과 ANC의 무장투쟁은 1985들어 309% 증가했다. 이들은 국경밖기지에서 훈련을 받은뒤 게릴라투쟁을 전개했다. 쿠바등 세계진보세력들은 이군사조직을 지원했다. 일례로 1987~88 남아공군대는 남부 앙골라 쿠이투쿠아나발르에서 쿠바지원을 받은 흑인전사들과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만델라는 이패배에 대해 <우리대륙과우리민중의해방을향한전환점>이라고 규정했다. 한편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한 흑인노동계급은 <결근투쟁>등을 전개했다. 1985.12 노동조합들은 50만조합원을 포괄하는 코사투(COSATU 남아공노동조합회의)를 결성했다.
남아공당국은 1948~93 2000명을 교수형하고 수십만명을 투옥, 수백만명을 체포하며 자유와 평등을 향한 흑인들의 항거를 악랄하게 탄압했지만 반아파르트헤이트의 대세는 꺾지못했다. <국가전복혐의>로 체포돼 27년간 수감생활을 했던 만델라가 1990.2 석방됐고, 1992 아파르트헤이트폐지가 결정됐다. 1994.4.26~29 총선에서 2000만흑인들이 투표권을 처음으로 행사했으며 그결과 ANC가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5.10 만델라는 취임식에서 <새시작을할시간이우리에게왔다>고 선언했다.
프랑스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알제리전쟁
알제리는 1830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뒤 130년이 지나도록 해방되지못했다. 알제리는 2차세계대전당시 프랑스편에서 독일에 맞서 싸우며 2차세계대전후 일정한 자유를 보장받을수 있을것이라고 기대했다. 1946 프랑스4공화국은 헌법을 통해 <프랑스의옛식민지와부속령들이본국과더불어프랑스대통령을수반으로하는<프랑스연합>의일원이될것>이라고 규정하며 알제리민중을 배반했다. 프랑스의 식민지정책은 1947.9 알제리법령을 통해 한번더 확인됐다. 법령에 의해 120명으로 구성된 알제리의회가 새로 출범했는데 알제리전체인구의 10%에 해당하는 유럽인유권자에게 의회의 절반이, 90%에 해당하는 알제리인유권자에게 나머지절반이 할당됐다. 1948 선거는 이 부당한 법조차 어겨가며 부정하게 치러졌다. 일련의 사태를 겪으며 알제리인들은 무장투쟁을 전면에 내세우게 된다.
한편 2차세계대전당시 알제리공산당은 <자유통일전선>결성을 주장했고 1943 민족주의조직지도자56명은 <알제리인민선언>을 발표하며 <자치국가>창설을 요구했다. 1945.5 알제리도시 세티프·겔마에서 일어난 반식민지봉기결과 4만여명이 죽고 5000명이 체포됐다. 이봉기는 1947 <민주자유승리운동(MTLD)>의 무장봉기와 혁명정부수립을 위한 투쟁으로 이어졌다. 1954 통합행동혁명위원회(CRUA)가 결성됐고 이위원회는 FLN(민족해방전선)의 이름으로 프랑스식민통치에 항거하는 무장투쟁을 계획·실행했다. FLN은 11.1 만성절을 맞아 콩스탄틴지역 아우레스산을 비롯해 전국30여개소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면서 해방투쟁은 무장투쟁단계에 들어섰다. 프랑스는 무력진압을 위해 군대를 1955초 7만6000명에서 이해말 17만명으로 증강했다. 한편 1955.9 개량적인 <수스텔제안>을 제시했지만 알제리의회가 거부했다.
1956.8 FLN은 알제리혁명전국평의회(CNRA)를 설치하고 군관구를 확정하며 조직정비를 단행했다. FLN은 산하군사조직으로 3만여명의 ALN(민족해방군)을 두고 50만명으로 확대된 프랑스군에 대항하는 무장투쟁을 계속하는 동시에 알제리노동자총연맹·알제리상인총연맹·알제리무슬림학생총연맹등과 밀접히 연계하며 대중적기반을 확대했다.
프랑스의 탄압은 ALN을 방조한 알제리인에게도 집중됐다. ALN과 알제리민중의 연계를 끊기 위해 마을전체를 공격하는것을 원칙으로 삼았으며 산악지역은 항공기를 동원해 폭격했다. ALN과의 협력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 농촌주민들은 대규모수용소로 강제이주됐다. 1957부터 3년간 산악지역에 거주하던 200만알제리인은 평지로 강제이주당했다.
한편 FLN과 밀접히 연계됐던 UGSA(알제리노동조합총연맹)는 1954.12 실업문제해결을 위한 대중투쟁을 조직했고 1955 파업투쟁은 여러산업부문에 확대됐다. 특히 1950.2 베트남전에 투입되는 무기선적을 거부하며 파업투쟁을 전개했던 오란부두노동자들은 1954.12에도 하역거부투쟁을 전개하는등, 항만노동자들은 빈번하게 파업을 진행했다. UGSA는 1956.11 강제로 활동정지됐다.
1956.8.20~9.5 FLN은 카빌리지방 숨맘에서 <숨맘강령>을 채택했다. 알제리독립을 위한 정치·군사관련 중요사항을 결정한 이회의에서 FLN은 정치노선으로 <군사에대한정치의우선권>·<국외에대한국내의우선권>을 결정했고 전국의 민족해방군체계를 통일했다.
1957초 프랑스공정부대의 게릴라조직괴멸작전에 대항한 도시게릴라 알제전쟁이 계속됐다. 1958 FLN은 주력부대를 모로코·튀니지영내로 빼내면서 국내정치활동·국외외교활동에 주력했다. 1958.5 알제리주둔프랑스군이 프랑스본국정부에 반란을 일으키며 프랑스본국은 내전직전상태로 치달았다. FLN은 1958.9 변화된 조건하에 <알제리공화국임시정부>를 수립했다. 1959.9 드골은 알제리자결권승인원칙을 발표했으나 프랑스의 교섭전정전·임시정부불인정·사하라사막의알제리북부에서분리책동으로 인해 교섭은 진척되지못했다. 드골정책에 반대해 1960.1·1961.4 2차례 프랑스인의 폭동이 발생했지만 알제리해방의 대세는 꺾지못했다. 1961.5 전쟁은 최종국면에 들어섰고 1962.3.18 정전협정(에비앙협정)이 체결됐으며 7.1 알제리독립에 관한 국민투표가 실시돼 97%의 찬성으로 독립이 정식으로 결정됐다.
친미대리정권은 반드시 망한다
1951.4 이란민족주의자 모하마드모사데크가 이란하원에서 압도적표결로 총리에 당선됐다. 모사데크는 2차세계대전종전후 민족주의자·사회주의자·자유주의자·이슬람주의자들과 연합해 국민전선을 결성하고 외국세력축출·석유국유화투쟁을 전개한 인물이다. 영제국주의의 하수인이었던 팔레비왕조는 마지못해 모사데크를 총리로 승인했다. 모사데크는 취임후 곧 석유국유화정책법안을 승인하며 영국최대정유회사AIOC(현BP)의 유전·정유시설국유화조치를 단행했다. 이어 군통수권을 장악하며 팔레비국왕을 무력화시켰으며 이란공산주의정당인 투데당과 연합해 미제국주의에 대항하며 미제국주의의 중동패권을 위협했다.
미CIA(중앙정보부국)는 영MI6(비밀정보부)등과 쿠데타음모인 <아약스작전>을 세웠다. 작전에 1942~46 군사고문으로 이란에서 근무한 노먼슈워츠코프를 참여시켰으며 슈워츠코프가 교육시켰던 군·경찰요원들을 동원했다. 1953.8.15 팔레비가 로마로 망명을 간지 3일만에 작전은 개시됐다. 팔레비는 로마에서 모사데크를 해임하고 미국이 고른 파즐롤라자헤디를 새총리로 임명했다. 이당시 4일간 이란곳곳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져 300여명이 사망했다. 혼란을 빌미로 쿠데타세력은 모사데크를 체포하며 정권을 전복했다. 이후 팔레비왕조는 친미파쇼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주요정당해산·언론통제·정보기관조작으로 파쇼탄압을 심화했다. 특히 1957 미CIA의 방조하에 악명높은 정보기관 사바크를 세우며 투데당·진보계열조직파괴와 소련견제에 나섰다. 이에 시아파최고종교지도자 아야톨라세예드후세인보루제르디는 정치무개입원칙을 스스로 깨며 팔레비의 반이슬람정책·공포정치를 비난했다.
한편 1956 2차중동전쟁후 소련영향력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미국은 아이젠하워독트린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중동에 대소방공망구축에 나섰다. 1959.3 미·이란방위조약이 체결되고 이란에 미군이 주둔하며 이란지배체제를 더욱 강화했다.
1961.3.30 보루제르디가 사망한뒤 젊은 루홀라호메이니가 시아파를 이끄는 중요인물로 등극했다. 호메이니는 1942 정치서<비밀의폭로>를 출판하며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호메이니는 저서에서 이란의 정치·사회·문화에서의 폐해와 이란민중에게 불이익을 가져오는 국제적음모를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이슬람문제는 정치적문제고 정치는 다른 문제들보다 우선한다고 강조했다. 또 <압제자에대한저항은무슬림의1번째의무>며 사회문제해결을 위해 전통적기반위에 새이란을 건설해야하며 그러려면 무슬림이 봉기해야한다고 강조했다. 호메이니는 종교도시 콤에서부터 명성을 얻으며 정치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1963 페이지예신학교에서의 학살이 있은뒤 10만시위대가 결집한 <독재자에게죽음을!>·<피에굶주린적에게죽음을>대중시위가 팔레비왕궁인근에서 전개됐다. 팔레비는 호메이니의 체포와 무력진압을 지시했다. 호메이니의 체포는 저항의 불씨가 됐다. 호메이니는 1964 미군에 대한 외교면책특권법안과 군비강화를 위한 2억달러차관신청법안을 통과시킨 팔레비왕권을 친미예속정권으로 규정했다.
이란민중의 반미반팔레비투쟁은 1953 군사쿠데타이후, 1971~77 저항조직결성·전국적반팔레비투쟁, 1978~79 혁명의결정적시기로 구분할수 있다. 1971.2.8 무장한 13명청년들이 시아칼마을의 경찰서를 습격하며 게릴라투쟁을 시작했다. 게릴라조직인 페다야네힐크·무자헤디네힐크는 각각 맑스주의투쟁조직, 이슬람주의·맑스주의를 결합한 조직이었다. 갈수록 게릴라전이 확산되면서 팔레비왕권의 정치적위기가 심화됐다. 1978 반미반팔레비투쟁이 항쟁수준으로 비약했다. 1.7 콤신학생들의 격렬한 시위를 시작으로 3.29 55개이란도시에서 동시다발시위가 전개됐다. 9.8 팔레비왕권이 테헤란 잘레광장의 모든 출구를 봉쇄하고 탱크·헬리콥터를 동원해 이란민중2000여명을 대량학살한 <검은금요일>사건이 발생했다. 분노한 민중들은 1978.10~11 전국적총파업을 전개했고 12.11·18 2일간 수백만이란민중이 반미반팔레비항쟁에 떨쳐나섰다. 1979.1.16 팔레비는 해외로 도주했고 망명중이던 호메이니는 600만명의 환호속에 귀국하면서 이란혁명은 승리로 종결됐다.
이란민중의 반미투쟁은 1979.11.4 테헤란대학생들의 미대사관기습점거로 상징된다. 미대사관직원52명이 인질로 잡힌 이투쟁은 팔레비독재자의 미국망명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다. 미대사관을 점령한 청년학생들은 대사관내에서 50권분량의 비밀공문서를 발견하며 미대사관이 <스파이소굴>이라는 사실을 폭로했다. 이사건은 호메이니가 팔레비의 미국내자산의 이란반환을 조건으로 제시하며 1981.1.20 정리됐다.
75년간의 압제를 끝장낼 팔레스타인민중항전
1948.5.14 시오니스트들이 이스라엘건국을 선포하고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이래 팔레스타인민중에 대한 압제는 계속 심화됐다. 1910년대 영국제국주의, 1948년이후 미제국주의를 배후에 두고 팔레스타인땅을 점령한 시오니스트들은 1948에만 팔레스타인민중1만5000명을 학살하고 수십만명을 추방·이주시켰다. 이스라엘은 아랍양대도시 야파·하이파, 서예루살렘아랍인구역등을 정복하고 주민들을 내쫓았다. 1947 분할안에서 야파는 아랍국가지역으로 지정됐음에도 시오니즘군대의 침략으로 주민6만명대부분이 쫓겨났다. 1947~48봄 <나크바(재앙)>1단계에서 30만명이, 이후 2단계에서 40만명이 요르단·시리아·레바논·요르단강서안·가자등으로 이산됐다.
팔레스타인민중의 반시오니즘투쟁의 성과로 1964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구성됐다. 이스라엘은 PLO를 제거하기 위해 1982 레바논을 침공하며 팔레스타인인·레바논인1만9000여명을 학살했고 10주간의 전쟁이 끝난후에도 민간인학살을 계속했다. 이같은 잔학상은 그동안 쌓인 팔레스타인인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1987.12 1차인티파다가 시작됐다.
1차인티파다당시 팔레스타인민중들은 점령지전역에서 자생적으로 궐기했다. 특히 가자지구 자발랴난민촌에서 이스라엘군용차량이 트럭과 충돌해 팔레스타인인4명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가자지구는 가장 격렬하게 반시오니즘투쟁을 전개했다. 인티파다를 거치며 마을·소읍·도시·난민촌에 광범위한 지역조직이 생겼고 비공개조직인 <통일민족지도부(UNL)>가 이조직들을 이끌었다. 비밀지역조직들을 이스라엘당국이 진압하기에는 불가능했다.
1988.1 이스라엘국방장관 이츠하크라빈은 군경에 <무력·완력·구타>를 써서라도 진압할것을 지시했다. 중무장한 군인들이 어린이·청소년시위자들까지 잔인하게 폭행하는 장면이 텔레비전을 통해 세계로 확산되면서 세계민중의 공분을 샀다. 인티파다에 대한 이스라엘측의 잔인한 폭력사태는 1987.12~1993 계속됐고 1996까지 이스라엘군대·무장정착민들에 의해 팔레스타인인1422명이 학살됐다. 이중 294명은 16세이하 미성년자였다. 인티파다는 시위만이 아니라 파업·불매운동·세금납부거부등 다양한 형태의 불복종운동이 전술로 활용됐고 부정의한 폭력에 폭력으로 맞섰다.
그전 저항과 인티파다의 질적차이는 전략적전망과 통일된 지도부를 중심으로 팔레스타인내부가 단결했다는점이다. 인티파다는 1960~70년대 저항운동과 대조적으로 팔레스타인인을 단합시켰다. 국제사회는 민중항쟁방식의 인티파다에 더욱 주목했다.
한편 인티파다를 거치며 PLO의 한계는 더욱 부각됐다. 튀니스에 있던 PLO지도자들은 미국·이스라엘의 <교섭상대>가 되면서 1988.11.15 알제 팔레스타인민족평의회회의에서 팔레스타인땅전체에 대한 소유권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분할원칙·2국가해법·평화로운분쟁해결을 채택했으며 12월 PLO의장 야세르아라파트는 사실상 무장을 포기했다. 1993 체결된 오슬로협정에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지않지만 PLO는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는 오류를 범했으며 팔레스타인은 영토·경계선등 많은 부분에서 권리를 전혀 되찾지못했다.
2000.9 2차인티파다가 발생했다. 오슬로협정에 명시된 <5년과도기>기한이 지나가고 1999 예정된 최종지위협상이 시작조차 되지않으면서 PLO에 대한 팔레스타인민중의 실망은 더욱 커졌다. 아라파트와 이스라엘총리 에후드바라크의 2000 캠프데이비드회담이 실패로 돌아갔고 팔레스타인땅에서의 이스라엘압박은 더욱 심화됐다. 서안지구·가자지구사이 통행이 제한됐고 검문소가 여기저기 들어서면서 팔레스타인민중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 우익리쿠드정당의장이자 2001이스라엘총리가 되는 아리엘샤론이 2000.9.28 알아크사사원이 있는 하람알샤리프(이스라엘명 성전산)에 방문해 <성전산은우리것이고앞으로도우리것>이라고 선언한것이 2차인티파다의 직접적계기가 됐다. 샤론의 도발로 1967이래 최악의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2차인티파다8년간 이스라엘군경·정착민들에게 학살된 팔레스타인인은 4916명에 달했다. 이스라엘군경은 봉기초반며칠동안 130만발의 총탄을 발포하며 학살기계로서의 자기본색을 드러냈다. 팔레스타인인이 스스로 무장을 하자 이스라엘은 중화기까지 동원해 팔레스타인인들을 살육했다. 이시기 하마스는 자살폭탄공격을 여러차례 단행했는데, 2차인티파다가 끝난뒤 이전술은 좌경적인것으로 평가됐다.
1987 1차인티파다의 결과 하마스(이슬람저항운동)가 등장했다. 하마스는 무장투쟁노선을 원칙적으로 고수했고 팔레스타인민중을 대상으로 이슬람식사회복지사업을 펼치며 대중적지지를 확보했다. 하마스는 2000년대 들어 선거에 참여하며 2006 총선에서 승리했고 2007.6 가자에서 독점적권력을 확보했다. 하마스는 2006이후 크게 4차례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렀으며 이스라엘은 17년동안 공식적으로 가자지구에서만 5000여명을 학살했고 1만5000명에 상해를 입혔다. 2023.10.9 하마스가 시작한 <알아크사홍수>작전은 팔레스타인민중이 75년간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항전의 시작이다. 팔레스타인민중이 반시오니즘반제투쟁에 떨쳐나서는한 <강에서바다까지팔레스타인자유>구호는 반드시 실현된다.
무장항전으로 해방과 통일을 이룩한 베트남
1858.8 프랑스·스페인연합함대가 베트남중부항구도시 다낭을 점령한뒤 프랑스는 1862까지 베트남을 침략했다. 프랑스는 1885 청·프전쟁에서 승리하고 천진조약을 체결하면서 청의 간섭을 배제했고 남부지역을 코친차이나로 개명하며 식민지화했다. 1885 베트남전역·캄보디아·라오스를 장악해 프랑스령인도차이나를 조작했다. 20세기 들어 프랑스는 응우엔왕조로부터 실질적통치권력을 빼앗아 민중들을 약탈하고 토지를 강탈했다.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운동이 전개되다 1925.6 호치민(응우옌아이꾸옥)을 중심으로 베트남청년혁명동지회가 결성되며 베트남해방투쟁의 성격이 변화됐다. 베트남청년혁명동지회는 민족주의단체의 외피를 쓴 베트남최초의 혁명조직이었다.
1930.2.3~7 인도차이나공산당·안남공산당·인도차이나공산주의연맹이 통합대회를 열어 베트남공산당이 창립됐고 이해 10월 인도차이나공산당으로 개명, <10월혁명테제>를 발표했다. 테제는 프랑스제국주의타도·봉건적잔재일소·토지농민분배·인도차이나완전독립을 목표로 한 인도차이나혁명의 성격을 규명했다. 1940.9 일본군이 인도차이나지역에 진출하면서 베트남은 프랑스·일본의 2중식민지가 됐다. 프랑스군이 박썬지방을 지나 태국으로 퇴각하자 9.27 박썬지역민중들은 <프랑스·일본제국주의반대>구호를 들고 무장봉기를 전개했다. 호치민을 영도자로 한 인도차이나공산당은 1941.5.10~19 8회중앙위를 개최해 베트민(베트남독립동맹)의 결성을 결의했고 1944.12 베트남해방군선전대를 창설해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1945.3.16 베트민은 전국적무장항전을 호소했다. 4.15~20 정치국회의에서 베트남구국군·베트남해방군선전대등 각종무장조직을 베트남북부해방군으로 통일했고 베트민중앙회의는 사실상 임시행정기관인 해방위원회조직을 지시했다. <8월혁명>은 8.19 하노이에서 시작돼 8.25 사이공에서 80만명이 넘는 대중집회를 벌이며 사이공권력을 장악했고 호치민을 수반으로 한 임시정부는 9.2 베트남민주공화국수립을 선언했다.
1946 1차인도차이나전쟁이 시작됐고 1950.9 베트남민중이 <총반격>에 돌입하면서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은 1600명이 사망하고 4800명이 부상당했으며 1600명이 실종됐고 포로로 8000명이 사로잡혔다. 베트남의 디엔비엔푸전투승리결과 시작된 제네바협의에서 정치적통일문제는 1956.7이전 총선거를 통해 결정하기로 합의했다.
북에는 베트남민주공화국이 건국됐고 1955.9.10 베트남조국전선이 결성됐다. 남에는 1955.10.26 베트남공화국이 수립됐다. 남베트남의 친미대리정권은 통일선거실시를 끝내 거부하고 제네바협정을 폐기했으며 남베트남내 통일애국세력을 파쇼적으로 탄압하고 민중들을 억압하며 공포정치를 자행했다. 베트남노동당은 베트민지도자였던 레득토를 중심으로 <남부를위한특별위원회>를 조직하고 1960.12.20 NLF(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를 결성했다.
1960.1 벤체무장봉기를 시작으로 2차인도차이나전쟁이 시작됐다. 1960~64 전쟁1기기간 미군·친미파쇼권력의 강제집단이주정책인 <전략촌>건설에 대항해 NLF는 1962말까지 남부1만7000개촌락중 4400개를 해방하며 9000개촌락의 행정기구를 무력화했고 1963말 전략촌의 80%를 파괴했으며 정부군8만명을 살상했다. 이에 미국은 1964 <통킹만사건>을 빌미로 북베트남·라오스에 폭격을 감행했다. 한편 1963.11 친미파쇼정권의 지엠이 미국에 의해 암살된 뒤 20개월동안 남베트남정부에서는 13번의 정변이 일어났고 미국은 친미종속·민족해방전선소탕을 내세운 젊은 장교들에게 정권을 맡겼다.
전쟁2기인 1965~68 혼란한 정국속에서 남베트남의 해방구를 중심으로 NLF위원회·인민자치위원회가 설립됐으며 토지개혁이 실시됐다. <호치민루트>를 통해 의약품·무기등 물자들이 유입됐고 총반격을 준비했다. NLF는 1968.1~2 남부주요도시를 일제히 공격한 구정(테트)공세를 실시했다. 50만미군·친미주구군대의 대대적반격으로 4만여명이 사망하고 30만명이 포로로 잡혔음에도 NLF의 전력은 약화되지않았다.
1969~72 전쟁3기 미군은 캄보디아·라오스까지 침공했고 폭격을 재개했다. 1972.7.19 레득토와 미국무장관 헨리키신저의 교섭이 시작된 이후 12월까지 미국은 폭격으로 4만t의 폭탄을 쏟아부으며 1318명을 학살했다. 베트남민중의 무장항전과 세계인류의 베트남전반대시위의 결과 1973.1.24 워싱턴·하노이동시성명으로 <베트남전쟁종결과평화회복에관한협정>·4개의정서·3가지각서전문이 공표됐다.
파리평화협정이 조인되자 남베트남정부는 오히려 병력을 증강했고 미군2만4000명이 군사고문으로 잔류하며 베트남의 해방과 통일을 각방으로 훼방했다. 1973.10 베트남노동당21회중앙위총회는 혁명전쟁을 계속할 방침을 채택했고 12월 베트남노동당정치국은 남부에서의 총공격을 결정했으며 1975.3 북베트남정규군의 총공격도 시작됐다. 4.30 0시 NLF군대는 사이공시내에 들어섰고 10시 즈엉반민대통령이 무조건항복을 하면서 2차인도차이나전쟁이 종식됐다. 1975.4.30 종전후 베트남통일이 빠르게 진행돼 7월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 결성됐다.
반파쇼의 기치를 든 돈바스무장항쟁
우크라이나파쇼세력의 뿌리는 2차세계대전당시 독일나치즘을 추종한 스테판반데라의 OUN(우크라이나국수주의자단)이다. OUN은 우크라이나서부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나치독일에 협력해 대대적인 <인종청소>를 감행했다. 1943~44 우크라이나·폴란드경계에 위치한 볼린에서의 학살이 대표적이다. 2차세계대전종전후 미CIA에 부역하며 소련·우크라이나에 스파이로 침투했으며 미국은 마샬플랜의 자금일부를 우크라이나극우무장조직<나이팅게일>에 투입했다. 미OSS(전략첩보국)는 우크라이나나치세력을 뮌헨으로 빼돌려 반소작전에 동참시켰는데, 반데라도 뮌헨에서 활동하며 미CIA에 협력했다. 일부는 미국내에서 반소·반우크라이나프로파간다를 전개했다. 1999 소련붕괴후 OUN에 뿌리를 둔 신나치세력은 대대적으로 우크라이나에 침투했고 2004 <오렌지혁명>후 세를 확대했다.
2013.11 시작된 <유로마이단>시위는 2014.2 쿠데타로 전변되며 빅토르야누코비치대통령을 불법적으로 축출했다. 당시 대통령탄핵선거에서 전체국회의원3/4선보다 10표 적은 328표가 <찬성>해 탄핵이 부결됐음에도 야누코비치는 대통령직에서 쫓겨났다. 이후 등장한 페트로포로셴코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올리가르히(신흥재벌)이자 친미꼭두각시였다. 포로셴코는 신나치민병대를 정규군화하고 러시아계주민에 대한 차별과 학대를 심화했으며 우크라이나민중의 정치·경제적권리를 미국에 넘기며 친미파쇼본색을 노골화했다. 민중학살은 빈번해지고 경제·민생은 파탄났다. 일련의 상황은 러시아계주민이 다수를 이루는 지역의 분리독립을 촉진했다.
2014.5.11 루간스크·도네츠크독립을 위한 주민투표가 실시됐다. 루간스크주는 75%투표율중 96.2%, 도네츠크주는 74.87%투표율중 89.07%가 독립에 찬성하면서 루간스크인민공화국, 도네츠크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우크라이나신나치군대의 루간스크·도네츠크학살은 2014중반부터 더욱 본격화됐다. 신나치세력은 2014.5 우크라이나국가방위군내 아조프대대를 조작했고 미국방부는 특수전사령부소속장교들을 비밀리에 파견해 아조프대대의 군사훈련을 지도했다. 5.26 우크라이나당국은 두공화국을 <친러반군>이라 매도하며 전쟁을 선포했다. 아조프대대는 루간스크·도네츠크인민공화국을 침략해 민간시설을 대대적으로 파괴하고 주민집단학살을 저질렀다.
돈바스전쟁8년간 공식적으로는 1만4000명이 학살됐지만 증언에 따르면 2014에만 5만~5만5000명이 학살된것으로 보인다. 2014 돈바스민중들이 우크라이나파쇼군에 맞서 살기 위해 민병대를 조직해 무장투쟁을 전개한것은 당연한 결과다.
한편 우크라이나당국은 돈바스주민의 저항에 못이겨 아조프대대원들일부를 수감했지만 블로디미르젤렌스키가 권력을 잡은뒤 2022.2.27 이들을 석방해 군대에 재투입하며 민중학살흉심을 더욱 노골화했다. 심각한 학살만행과 주거지파괴행위에 국제사회분노가 우크라이나당국에 집중되자 돈바스전쟁종전을 위해 2014.9.4 민스크협정1, 2015.2.12 민스크협정2를 체결했으나 우크라이나당국은 이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전혀 하지않았다. 오히려 러시아어사용주민을 차별하는 법률들을 제정하며 파쇼탄압을 강화했다.
2021가을 돈바스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서방국가들이 우크라이나당국에 침략무기를 투입하면서 돈바스에 대한 우크라이나신나치당국의 공격이 더욱 격화됐다. 2022.1.1 젤렌스키는 신년사에서 <돈바스지역전쟁종식>을 <주요목표>로 제시하며 돈바스지역에 대한 대대적침공을 예고했다. 2022.2.17 우크라이나군은 루간스크·도네츠크에 포격을 집중했다. 2.21 블라지미르푸틴러대통령은 도네츠크·루간스크인민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했으며 2.22 연방의회연설에서 <돈바스해방,이사람들의보호,그리고러시아연방의안보가우크라이나특별군사작전의궁극적목표>라고 선언했고 2.24 특수군사작전을 개시했다. 푸틴은 2022.3 연설에서 <사람들을제노사이드로부터해방하는것이돈바스와우크라이나에서시작한군사작전의주요동기이자목표>라고 다시한번 강조하며 신나치청산과 돈바스주민보호가 결코 둘이 아니라는것을 확인시켰다.
무장투쟁과 지하활동, 민중항쟁이 결합해 승리한 쿠바혁명
1899.1~1902.5 미국은 쿠바를 점령했다. 쿠바민중들은 1902~24 미국의 식민지통치와 친미대리정권에 맞서 잇따라 봉기를 조직했다. 이에 쿠바정부는 미국의 군사적개입을 요구했다. 1906 미국은 해병대를 파견했고 미국주도의 임시정부수반으로 미네소타주판사출신 찰스마군을 임명했다. 마군의 기만적유화정책에도 불구하고 쿠바인들은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아프리카계쿠바인들은 1908 유색인종독립당을 조직하며 저항운동을 계속했다. 1912 미해병대가 수천명의 아프리카계쿠바인대량학살을 저질렀고 이에 계급투쟁·반제투쟁은 더욱 촉진됐다.
한편 1차세계대전이후 설탕가격이 날뛰면서 1921 쿠바최대은행 방코나시오날이 폐쇄되는등 경제위기가 심화됐고 이는 정치불안으로 이어졌다. 미국은 1923 미대사가 된 에노크크라우더를 통해 쿠바를 통치했다. 이로인해 쿠바내 민족주의운동이 되살아났다. 경찰은 1925 일어난 파업들에 총격을 가했고 쿠바공산주의지도자 후안안토니오메야는 헤라르도마차도이모랄레스대통령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됐다. 마차도의 비밀경찰은 일상적으로 정적들을 살해했다. 쿠바민중들은 광범한 반정부세력을 형성해 마차도의 폭압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했다. 1933 여름 아바나버스기사들의 파업은 총파업으로 확산됐다. 민중항쟁의 힘에 의해 마차도는 결국 8.12 사임했다. 곧이어 친미임시정부가 수립됐으나 8월 아프리카계쿠바인공동주의 레온알바레스가 이끄는 20만명의 사탕수수노동자들이 학생시위에 결합했다. 1달사이 설탕생산30%가 노동자들이 조직한 지방소비에트의 통제하에 놓였다. 9.4 풀헨시오바티스타이살디바르가 속한 하사관들은 임시정부를 무너뜨렸고 대학생지도부는 이들과 동맹을 맺고 혁명평의회를 구성했다. 신생혁명위원회는 하사관들과 대학생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분열됐다.
2차세계대전이후 국제설탕가격폭락으로 경제위기가 더욱 심화됐다. 1952대선에서 에디치바스는 부패·외세간섭에 대항한 민중봉기촉발을 위해 라디오방송연설도중 자결했다. 6개월후 바티스타는 미지원하에 쿠바정권을 붕괴시키고 쿠바공산당불법화·노동자파업폭력진압·기업활동제약폐기등을 감행했다. 이시기 경제위기는 더욱 심화됐다. 쿠바설탕산업은 정체됐고 미국과 무역협정으로 인해 미국산저가농산물이 쏟아져 들어와 농업이 황폐화됐다. 구조적실업·저고용문제도 심각했다.
새로운 혁명의 지도부로 등장한 피델카스트로조직은 지난 혁명전통을 계승하고있었지만 과거의 쿠바혁명실패경험을 딛고 나아가야하는 중대한 과제를 안고있었다. 1953.7.26 카스트로는 중·하류층, 노동계급출신으로 구성한 소규모부대를 이끌고 산티아고시근교 몬카다병영을 습격했다. 부대는 1940헌법으로의복귀·토지개혁·교육개혁·정부부패와예산낭비종식등을 목표로 했다. 카스트로는 비록 체포됐지만 역사적인 변론<역사는나에게무죄를언도하리라>를 통해 민중적영웅으로 등극했다.
쿠바혁명은 무장투쟁과 지하활동, 민중항쟁이 결합돼 승리했다. 카스트로가 피네스섬에서 19개월간 구금돼있는 동안 그조직성원들은 7월26일운동을 결성했다. 1956.11 카스트로와 82명동지들은 멕시코로 떠났고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1957봄내내 공격을 계속하는 한편 도시지하조직들은 테러·파업투쟁을 강력하게 전개했고 대중투쟁도 강화됐다. 1958.3 미국은 쿠바정부에 대한 무기선적을 중단했고 중산층도 바티스타에게 등을 돌렸다. 5월 시작한 대공세는 완전히 실패하면서 정권은 더욱 위태로워졌다. 미대사관은 혁명승리를 막기 위해 부정선거를 준비했으나 이정치공작은 카스트로세력에 의해 무산됐다. 1959.1.1 미국에 버림받은 바티스타세력이 미마이애미로 도주하면서 카스트로혁명세력이 집권했다.
니카라과무장투쟁세력의 승리
니카라과는 20세기내내 미국의 군사개입으로 주권을 침탈당했다. 1910 미군은 친미반란군을 지원하며 민족주의정부를 붕괴시키고 친미대리정권을 조작했다. 친미대리정권에 대항한 진보세력의 반란과 봉기는 1912부터 본격화됐다. 미해병대는 1912항쟁승리를 저지하기 위해 니카라과에 상륙, 혁명세력을 말살하고 1925까지 허수아비정권들과 각종협약들을 체결하며 니카라과산업·자원을 대대적으로 약탈했다.
1927 조직된 아우구스토세사르산디노의 게릴라군대는 1933까지 미해병대와 니카라과국가경비대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미정부는 1927 미해병대에 의해 조직·훈련된 니카라과국가경비대를 조작한뒤 1932.2 미국은 니카라과에 주둔하던 1000명의 미해병대철수를 발표했고 11월 미감독하에 대통령선거가 끝나면 나머지도 철수할것을 공언했다. 대선에 승리한 후안B.사카사는 미국의 추천대로 아나스타시오소모사가르시아를 국가경비대수장으로 세웠다. 산디노는 1934.1.2 미해병대가 철수되면 무장투쟁을 중지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소모사를 매우 불신하며 국가경비대해산을 촉구했다. 소모사는 독단적으로 산디노를 체포·처형했다.
소모사는 1934~79 파쇼폭압통치를 감행했다. <청색셔츠단>파시스트준군사조직을 앞세워 1936 선거에 승리한 소모사는 철저히 친미파시스트로서 행세했다. 미정가에서는 소모사를 두고 <개새끼다.그러나우리의개새끼다.>라고 말할정도였다. 1956 소모사가 암살되자 그아들들인 루이스·아나스타시오가 권력을 이어받아 계속 파쇼통치를 이어갔다. 친미파쇼통치기 미독점자본은 광업·식품가공업분야에서 니카라과자원·노동력을 심각하게 약탈·착취했다.
1950년대 언론인출신 호아킨차모로가 일으킨 여러차례의 봉기는 모두 실패했으나 니카라과민중의 불굴의 투쟁의지를 보여줬다. 소모사파쇼독재에 대한 심각한 위협은 1961 조직된 FSLN(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이었다. 주로 학생들로 구성된 FSLN은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했으며 비밀정치조직전략과 농촌봉기전략을 결합하며 장기적인 민중항전으로 소모사독재에 강력히 대항했다. 1978 니카라과민중혈액의 미국판매가 폭로되자 소모사정권은 차모로를 암살했는데 이를 계기로 총파업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곧이어 국가경비대는 원주민공동체를 학살했다.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FSLN의 조직역량은 더욱 강화됐고 저항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1978.8 산디니스타게릴라군은 의사당을 습격해 하원의원·2000명공무원들을 인질로 잡았고 이사건과 맞물려 마타갈파시에서 장기총파업·봉기가 일어났다. FSLN은 9월 주요도시봉기를 기획하기도 했다. 이후 최후결전을 위한 총동원작업에 착수했다. FSLN은 9월봉기이후 지역방어위원회를 발동해 최후결전을 적극 대비했다. 1979.6 FSLN은 총파업을 선언하고 최후공격을 단행했다. 소모사의 대규모공습·포격에도 마나구아시전체를 포위했다. 승리가 임박하자 FSLN지도부는 5인혁명평의회로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미국은 미주기구를 소집해 마나구아시에 대한 <평화유지군>파견을 제안하며 마지막까지 개입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1979.7.17 소모사는 플로리다로 망명했고 2일뒤 FSLN과 혁명정부는 마나구아에 입성하며 항쟁은 승리했다.
항쟁 없이 민중정권 없다
1970이전까지 칠레의 정치·사회는 대외종속·자유주의로 특징지을수 있다. 20세기 들어 노동계급의 생존권투쟁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1901 북부광산지대 이키케에서 최초의 대규모파업이 2달동안 일어났고 1907 파업에 돌입한 초석노동자들은 정부에 의해 2000명이나 학살당했다. 1차세계대전이후 미독점자본들은 칠레구리생산의 80%이상을 장악하며 노동자약탈을 심화했다. 1909 FOCH(칠레노동자연합)가 조직됐고 3년뒤 창설된 사회주의노동당은 1922 공산당으로 개명한뒤 코민테른에 가입했다.
1929 대공황과 1932 미국의 구리수입에 대한 높은 관세부과에 따른 실업사태로 인해 칠레개량주의정권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1931.7 노동자·전문직·사무직·학생들이 참여한 총파업이 일어나고 이후 17개월간 군부쿠데타가 연속적으로 발생했다. 이런상황에서 민주수호와 사회진보적발전을 위한 칠레인민전선이 조직됐다.
1938 인민전선대통령후보 급진당의 페드로아기레세르다가 선거에서 승리했다. 인민전선정부하에 1940~45 국내제조업은 안정적으로 성장했다. 1946 사회당이 인민전선에서 이탈했지만 급진당의 가브리엘곤살레스비델라가 공산당지지를 얻어 승리했다. 하지만 <냉전>시기 곤잘레스비델라는 우파로 반변해 공산당출신각료들을 축출하고 공산당주도 탄광노동자파업을 진압했으며 공산당을 불법화하고 의회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했다.
1953~58 사회당·공산당을 포함한 FRAP(인민행동전선)가 결성됐고 1958선거에는 4명의 주요대통령후보가 경합했는데 이때 FRAP후보로 살바도르아옌데가 등장했다. 한편 1954~70 외국자본이 대대적으로 유입됐으며 미독점자본은 지하자원·전신·전화·전기·금융등을 잠식했다.
1970 아옌데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사회주의를 지향한 아옌데는 외국계대기업·독점기업의 점진적인수, 80ha이상모든토지몰수등을 내세웠다. 반인민연합세력에 포진돼있던 경제단체·외국회사·군경장교·가톨릭교회등은 사회자원을 장악한채 반아옌데책동을 강화했다. 당시 닉슨미정부는 아옌데제거를 위한 쿠데타조직을 명령했고 이것이 실패하자 경제혼란을 조장했다. 아옌데는 집권첫해 인플레이션을 34.9%에서 22.1%로 감소시키고 실질소득을 30% 증가시키며 높은 성장을 이룩했다. 하지만 미국의 칠레차관·수입·수출봉쇄등으로 경제침체는 되풀이됐고 1972가을전후 아옌데정권은 전면적인 정치·경제적위기에 직면했다. 미CIA는 아옌데정부를 흔들기 위해 1970~73 800만달러나 사용했다. 반아옌데세력은 사보타주·시위·파업등을 조작했고 1973부터 군부내 반아옌데세력을 강화했다. 결국 미CIA를 배후에 둔 아우구스토피노체트가 1973.9.11 쿠데타를 일으켜 아옌데정부를 전복했다.
1900년대초부터 베네수엘라에는 민간·군부독재하에서 외국자본이 대대적으로 유입됐다. 1908 정권을 잡은 후안비센테고메스는 민족주의노선을 포기하고 외국석유자본을 비롯한 외국자본의 국내사업양도권을 부활했다. 1928당시 더치셀·스텐더드·걸프등3개정유회사가 베네수엘라석유시장89%를 장악하면서 외국석유회사들과 이들과 연결된 지배계급·고메스에게 경제적이익이 집중됐다. 이에 분노한 학생·노동조합운동가·카라카스민중들은 1928 반독재시위를 격렬하게 전개했다. 이시위를 배경으로 1928.4 청년장교·군사학교생도들이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이내 진압됐다. 1935 고메스가 사망하자 민중들은 독재체제의 종말로 간주했다. 중산층·노동계급의 정치적진출을 가로막기 위한 개량적조치로 대의민주제가 실시된 대신 공산당·민주국민당등 주요야당을 불법화했다.
로물로베탕쿠르의 민주행동당을 중심으로 부르주아민주주의가 실현됐고 1945 포퓰리즘선거운동을 통해 승리하면서 1947 보통선거권이 확립됐다. 민주행동당은 노동조합·농민조합을 모두 포함하는 베네수엘라노동자연맹과 연대관계를 형성했고 새로운 헌법을 통해 노동자자결권·파업권·토지경자유전원칙등의 권리를 명시했다. 원유회사를 상대로 중과세를 부과하며 정부수입을 증대시켰다. 1947.11.24 군부쿠데타가 발생한 이후 1947헌법이 폐지됐고 기타진보적조치들이 무효화됐으며 1949.1 노조탄압이 본격화됐다. 이같은 파쇼통치는 1958까지 지속됐다. 1957중반 주요정당들을 통합하기 위해 지하조직 애국평의회가 조직됐다. 1958.1.12 애국평의회가 총파업을 선언했고 대부분의 군인들도 반정부투쟁에 참여했다. 1958 푼토피호협정이 체결되며 파쇼통치가 막을 내렸다. 이협정으로 인해 사회기독당인 독립선거정치조직위와 사민주의적인 민주행동당이 정국의 실질적주도권을 장악했다. 경제적으로 외국자본에 의한 종속이 심화됐다. 1971 베네수엘라에 투자한 외국자본의 총누적액은 55억7000만달러로 개발도상국중 최대규모였는데 이윤유출은 연평균6억7200만달러에 달했다. 베네수엘라는 <외국독점자본의조세특례국>으로 불렸다. 1980년대까지 외국자본에 대한 종속과 빈부격차는 갈수록 심각해졌고 1974~78까지 외채는 거의 100억달러나 증가했으며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국가·집권당의 전례없는 부정부패로 경제는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1988 결국 3년간 45억달러차관제공을 조건으로 IMF가 요구한 경제긴축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민중의 들끓던 분노는 1989.2 정부의 버스요금대폭인상발표로 폭발해 민중항쟁인 <카라카소>가 시작됐다. 정부의 강경진압으로 비공식통계에 따르면 사망자수가 400~1000명에 달했다.
1992.2 우고차베스프리아스중령이 무장봉기를 단행했다. 차베스는 페레스정권전복·부패정치범재판회부·신자유주의경제정책파기·빈곤타파·제헌의회선거실시를 목표로 했다. 무장봉기는 비록 실패했지만 차베스는 민중의 영웅으로 부각됐다. 1993 차베스석방을 내걸고 라파엘칼데라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98 대선에서 차베스는 빈곤과 절망을 퇴치하겠다는 공약과 함께 승리를 거뒀다. 차베스는 6개월동안 모든 경제·재정관련입법조치들을 대통령령으로 시행하기 위해 모든 권력을 의회로부터 신속하게 승인받았고 1999 <볼리바르적민주주의>건설노선을 명확히했다. 미국은 차베스가 등장한 이래 친미세력에게 막대한 자본을 투입하고 차베스를 악마화하며 베네수엘라에 각종 제재·압박을 가하며 베네수엘라 민중정권붕괴를 획책했다. 이는 차베스를 계승한 니콜라스마두로에게도 똑같이 가해지고있다. 칠레의 인민전선정부실패와 베네수엘라의 민중정권수립과정은 항쟁에 총궐기한 민중의 힘으로만 민중정권을 건설할수 있다는것을 보여준다.
미국내에서의 반전투쟁
베트남전반대시위는 처음에 민권운동에서 시작됐다. 1965중반 미시시피주 메콤에서 흑인젊은이들의 베트남전반대선전전이 진행됐고 학생들은 <베트남에서불타죽은어린이들을기억하라>가로막을 들고 시위행진을 전개했다.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는 1966초 <미국은국제법을위반하면서침략전쟁을추구하고있다>고 선언하며 애틀랜타의 병무청에 진입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위원회출신 조지아주하원의원 줄리언본드는 전쟁·징병반대발언으로 인해 의원직을 박탈당했고 흑인권투선수 무하마드알리는 베트남전이 <백인의전쟁>이라며 군복무를 거부하다 챔피언타이틀을 박탈당했다.
1964.5 <우리는가지않겠다>구호가 널리 확산됐으며 젊은남성들은 징병명부등록·소집명령거부운동을 진행했다. 1967.10 전국방방곡곡에서 조직적인 징병카드반납운동이 진행돼 샌프란시스코에서만 300장의 징병카드가 반려됐다. 1969말 전국적으로 징병거부자가 3만3960명에 이르렀다. 1965 32세남성 노먼모리슨과 82세여성 앨리스허즈가 전쟁에 저항해 스스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자결했다.
1968 베트남전에서 미군 4만명이 사망하고 25만명이 부상당했음에도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않았다. 1968가을 리더츠닉슨미공화당후보가 베트남전종전을 내세우며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전쟁은 끝나지않았다. 미군을 일부 철수하며 교전상황만 종식했을뿐 캄보디아에 대한 폭격에 이어 침공을 시작하며 오히려 전선을 확대했다. 1971 라오스·캄보디아·베트남에 80만t의 폭탄을 떨어뜨렸다. 이에 1965초 보스턴공원에서 100여명이 모여 진행되던 반전시위는 1969.10.15 10만명에 이르렀으며 이날 전국적으로 200만명이 집회를 진행했다. 시위에는 중간계층·전문직종사자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1970.5 미언론 뉴욕타임스는 <제도권변호사1000명반전시위동참>기사를 게재했다. 이어 정부내부인사·친정부인사들도 반전시위에 나섰다. 카톨릭종교인들은 1969.10.15를 전쟁중지일로 선포했다. 카톨릭재단 보스턴대에서는 이날 2000명이 체육관에 모여 반전시위를 벌였다.
무엇보다 학생시위가 가장 격렬했다. 토지문제연구소조사에 따르면 1969상반기에만 전국2000여고등교육기관중 232곳에서 21만5000명대학생이 학내시위에 참여했고 3652명이 체포됐으며 956명이 정학·퇴학을 당했다. 1960년대후반 중·고등학교에서 500여종의 지하신문이 발간됐고 1969 브라운대졸업식에서 키신저가 연설하려고 일어서자 학생2/3가 등을 돌렸다. 반전운동은 캄보디아침공을 명령한 1970봄 정점에 달했다. 5.4 켄트주립대학에서 반전시위를 전개하자 주방위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학생4명이 살해됐다. 400개대학학생들이 이에 항의해 미역사상 최초의 동맹휴학을 벌였다. 연방수사국은 1969~80 313건의 건물점거를 비롯해 1785건의 학생시위가 있다고 기록했다.
2024봄 친팔레스타인시위가 미국내 학생들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전개되고있다. 4.17 미전역대학가를 중심으로 진행된 이시위는 캠퍼스를 점거한 컬럼비아대학생들이 뉴욕경찰국에 대거 체포되면서 촉발됐다. 4.22 뉴욕대·예일대·에머슨칼리지·메사추세츠공과대·터프츠대를 비롯한 미동해안에 있는 대학교에서 점거투쟁이 시작됐고 뉴욕대·예일대에서는 학생들이 대거 검거됐다. 4.23 시위는 전역으로 확산돼 40개대학에 점거캠프가 들어섰다. 4.27까지 대학생900명이 체포됐다. 2024.5부터 학생시위는 미국내 각계각층의 시위로 확산됐고 미국외 세계각국대학가도 시위에 동참하면서 반전시위규모가 더욱 확대됐다. 5.3부터 미국내 고등학생들도 시위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흐름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1968반전운동의유령이돌아왔다>고 언급했다.
제국주의침략책동은 자국내민중을 비롯한 세계인류의 반제반전투쟁에 의해 반드시 분쇄된다. 자주와 해방을 향한 민중의 항전은 그 무엇으로도 결코 막을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