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 항쟁의기관차〉 근대화시기 진영의 노리개, 식민지 조선

1840~50년대 서구열강은 동아시아시장을 확대하려는 야욕으로 저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통상조건을 강요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1840~42 중국 청나라는 아편전쟁에 패배해 영국에 홍콩을 할양하고 광저우와 상하이등5개항을 개항하며 전쟁배상금과 몰수한 아편에 대한 보상금을 지불하고 관세를 제한하는등 일방적인 불평등조약을 체결해야했다. 일본도 1854 미국페리제독의 무력시위에 미일화친조약·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며 문호를 개방했다. 이후 일본에서는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에게 권력을 집중시킨 <대정봉환>이 일어나고 때를 같이해 메이지<천황>이 대를 이으면서 <메이지유신>의 근대화개혁이 진행됐다. 조선과 중국, 일본의 동아시아지역은 중세봉건세력의 무능·부패로 몰락해가는 시대를 같이하며 서구열강의 침략책동에 불평등한 조약을 받아들이지않을수 없었다. 봉건이씨조선에서는 1866 병인박해에 이어 병인양요와 미국의 제너럴셔먼호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러시아의 압박과 남하를 막으려면 영국·프랑스와 동맹을 맺어야한다고 제안했으나 러시아의 압박이 점차 수그러들고 프랑스선교사들도 관심을 보이지않아 이러한 정책은 실질화되지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2차아편전쟁으로 영국·프랑스가 청나라수도 베이징까지 점령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봉건조선에서도 서양의 침략적팽창에 대한 반발정서가 팽배해졌고 프랑스선교사들을 처형하는 병인박해로 이어졌다. 이를 빌미로 프랑스가 조선에 쳐들어와 병인양요가 벌어졌다. 1871 미국의 군대가 쳐들어와 신미양요가 발발했다. 그러나 서구열강은 조선에 통상조약을 강요하지못했다. 근대화를 추진하던 일본이 대륙팽창야욕으로 조선진출을 노려오다가 운요호사건을 일으키고 이를 구실로 1876.1 군함과 함께 전권대사들을 보내 통상조약을 강요했다. 당시 고종이 개항에 적극적입장을 보였고 청나라에서도 이를 지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열강들의 침략적본성에 의한 압박과 강요는 통상조약에서 끝나지않았다. 자본주의가 성장해가면서 열강들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원공급·시장확대에 대한 이해관계가 충돌할수밖에 없었다. 187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본주의가 독점자본주의단계에 들어서면서 제국주의로 심화됐고 열강들은 저들끼리 모여앉아 세계시장과 식민지를 분할했다. 회담을 통한 견제와 균형은 오래가지못했고 대립은 더욱 격화됐다. 1900년대에 들어서 <협상국>과 <동맹국>이라는 대립구도가 뚜렷이 형성됐다. 조선봉건왕조는 몰락의 길로 가고있었지만 개화파는 그를 대체할정도로 강력하지못했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민중의 힘을 믿을대신 외세 일제에 의존했다. 갑오농민전쟁의 농민군은 봉건에 반대하는것과 함께 척양척왜의 기치로 외세에 맞서 항거했지만 일제와 조선왕조의 관군이 결탁해 이들을 짓밟았다. 세력확장을 노린 제국주의자들은 영일동맹과 가쓰라·태프라밀약등 저들끼리 세력권을 분할하고 다른 세력들에 대항하는 진영을 짜고 자기잇속을 차리기 바빴다. 봉건조선왕조는 공개·비공개적으로 진행되는 이런 사정에 암둔했고 이런 배경속에서 일본은 청나라와 러시아는 전쟁을 통해 조선에서 패권을 쥐었다. 봉건왕조는 국권을 일본에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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