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조선에서 우리민족·민중은 일본군국주의와 그와 결탁한 봉건세력의 민족적차별·계급적착취의 2중의 착취와 억압을 당했다. 우리민족은 일제와 친일부역자들에 맞서 싸웠다. 갑오농민전쟁의 농민군에서부터, 관군이 해산되며 무장투쟁에 들어선 이들도 결합해 무장으로 일제를 몰아내기 위한 투쟁이 전개됐다. 그러나 1910 <한일합병>을 막지못했다. 1917 사회주의10월혁명이 세계적조류를 타면서 민중의 민족해방의식이 고양됐고 1919 3.1봉기가 일어났다. 당시 전국적으로 벌어진 봉기에서 무장하지않은 민중이 일제의 총칼에 희생됐다. 이후 우리민족은 일제에 항거한 준비된 무장항전을 모색했다. 1929 세계경제공항이 발생했고 자본주의모순은 더욱 격화됐다. 정치경제적위기속에서 자본주의개량화정책을 쓸수 없었던 나라들에 제국주의변종인 파시즘이 대두됐다. 독일에서는 1933 파쇼정권이 수립됐다. 이탈리아는 1차세계대전이후 정치경제적위기로 이미 무솔리니파쇼정권이 수립된 상태였다. 파쇼화에 맞서 프랑스와 스페인등에서는 반파쇼인민전선이 형성돼 파쇼세력의 집권을 저지했다. 1935 3국제당 코민테른은 반파쇼인민전선노선을 공식화했지만 스페인에서는 파쇼세력과의 내전이 발발했고 프랑스의 반파쇼인민전선도 오래 지속되지못했다. 코민테른의 반파쇼인민전선노선은 조선과 중국, 베트남등 아시아에서의 반제민족해방통일전선노선에 영향을 미쳤다. 일찌기 길림지역에서 학생운동을 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해오던 김일성주석은 1930 카륜에서의 공청·반제청년동맹지도간부회의를 통해 항일무장투쟁노선과 반제민족해방통일전선노선을 제시하고 추진했다. 일제의 만주점령이 본격화된 1931, 김일성주석은 12월 명월구에서 당·공청간부회의를 갖고 반일인민유격대의 조직과 유격근거지창설을 결정했다. 이어 1932.4.25 안도현에서 반일인민유격대(조선인민혁명군)를 창건했다. 김일성주석은 항일무장투쟁의 새로운 단계의 전략전술적방침을 확정하기 위해서 1936.2 남호두에서 조선인민혁명군군정간부회의를 갖고 주력부대를 국경지대에로 진출하고 투쟁을 국내로 확대하며,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발전시킬것등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1936.5 반일민족통일전선으로 조국광복회를 건설했고 1937.6 보천보전투를 전개했다. 1939.9 나치독일의 폴란드침공으로 2차세계대전이 본격화됐다. 김일성주석은 1940.8 소할바령에서 조선인민혁명군군정간부회의를 하고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준비있게 맞이하기 위한 전략전술적방침을 확정했다. 김일성주석은 10년간의 경험과 교훈을 평가하고 일제를 종국적으로 멸망시키기 위한 최후의 결전을 맞을 준비를 잘해야한다고 하면서 역량보존과 조선인민혁명군의 역량을 유능한 정치군사간부로 육성하는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광범한 반일대중을 조직하기 위한 대중정치사업과 소부대군사활동을 전개하고 간부들이 정치군사적준비를 다그칠것과 세계혁명역량과의 연대성을 강화하기 위해 투쟁해야한다고 밝혔다. 1937.11 김일성주석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의임무>에서 소련을 무장으로 옹호하자고 호소했으며 1940.8 소할바령회의에서 국제당의 요구를 받아들여 소부대전술로 이행하고 1941 하바롭스크의 국제회의에 참가해 1942.7 조중소국제연합군을 결성하면서 반파쇼국제연합군의 공식적인 성원이 됐다. 이는 일제에 항거하는 조선민족의 투쟁목표와 일치하는것이었다. 김일성주석은 국제정세를 주시하며 반파쇼진영이 형성됨에 따라 동아시아전선에서 소련·중국과 연합군을 구성하고 일제에 맞선 최후공격작전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