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제국주의가 대소련·대사회주의봉쇄정책으로 <냉전>을 선포한지 50여년만에 소련이 붕괴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소련붕괴후 채 10일이 안된 1992.1.3 <사회주의건설의역사적교훈과우리당의총노선>에서 소련붕괴의 원인에 대해 사회주의건설에서 주체를 강화하고 주체의 역할을 높이는 문제를 기본으로 틀어쥐고나가지못한데 있다면서 인민정권에 3대혁명을 더하면 공산주의가 된다는 김일성주석의 사상을 사회주의공산주의건설의 총노선으로 철저히 관철함으로써 <인민대중중심의우리식사회주의>를 훌륭히 건설했다고 평가했다. 1994.11.1 <사회주의는과학이다>에서는 여러나라에서 사회주의가 무너진것은 과학으로서의 사회주의의 실패가 아니라 사회주의를 변질시킨 기회주의의 파산을 의미한다고 단언했다. 1992.4.20 김일성주석탄생80돌경축행사에 참가한 세계여러나라의 공동주의당·노동당등의 당수들과 대표들은 평양에서 공동으로 <사회주의위업을옹호하고전진시키자>를 발표하며 사회주의기치를 들고 나아가도록 추동했다. 1991.12 소련붕괴가 선언되던 시기 조선은 김정일국방위원장을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으로 추대했다. 조선은 1950.7 코리아전의 전시체제에서 조선인민군최고사령부를 창설하고 최고사령관에 김일성주석을 추대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선군혁명영도는 1960.8.25 근위서울유경수105탱크사단현지지도로부터 시작된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대학시절부터 조선의 핵무장화를 준비했다. 1968.1 <푸에블로>호나포사건당시 미국과의 대결전에서 결정적역할을 담당했고 조선의 자체미사일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다. 1982.6 당중앙군사위원회삼지연회의에서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영군체계가 확립됐다. 1990.5 국방위원회1부위원장으로 임명됐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된뒤 처음 맞이하게 된 1992.4.25 조선인민혁명군창건60돌기념일에 열병식을 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열병식에서 <영웅적조선인민군장병들에게영광있으라>고 외치며 군장병들을 격려했다. 소련이 들었던 사회주의기치를 이제 조선이 들고 미제국주의를 상대하게 됐다. 그최전선에 김정일국방위원장을 최고사령관으로 하는 조선인민군, 조선의 혁명무력이 있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1993.3 <팀스피리트>핵전쟁연습에 맞서 준전시상태를 선포하고 제국주의세력의 핵사찰압력에 NPT(핵확산금지조약)탈퇴로 대응했다. 1993.5 탄도미사일시험발사를 단행했다. 조미회담이 진행중이고 북남수뇌회담을 앞두고있던 1994.7 김일성주석이 급작스럽게 서거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이해 11월 <사회주의는과학이다>에서 사회주의의 과학성과 진리성을 논증하며 김일성주석이 개척한 주체사회주의위업을 대를 이어 계승·완성해나갈 의지를 밝혔다. 1995.1.1 다박솔현지지도로 선군정치, 선군혁명영도를 이어갔다. 그길에서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사회주의강성국가건설노선을 밝혔고 핵미사일강국건설의 바탕을 마련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생의 마지막길, 현지지도의 길에 항상 입었던 야전잠바는 선군정치, 조선의 전시체제를 보여준다. 최고사령관으로서, 국방위원장으로서 한생을 전선에서 보냈다. 2001 아프가니스탄전쟁이 시작되고 2003 이라크전쟁으로 후세인이 체포됐고, 이해 핵포기를 선언한 리비아의 카다피는 2011 <아랍의봄>시기 학살당했다. 알아사드시리아정권은 2011 미제국주의와 서방의 지원을 받은 반군세력에 의해 내전상태에 놓이게 됐다. 시리아내전으로 시리아인수백만명이 난민으로 전락해 세계를 떠돌게 됐다. 미국은 1990년대중반 조선붕괴설을 떠들며 <대조선고립압살>을 획책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선군정치로 전쟁을 막고 사회주의를 지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