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8 항쟁의기관차〉 제2의코리아전의 획책과 조선의 전쟁억제력

1960전후 미국의 금보유량이 현격히 줄어들고 달러패권이 흔들렸다. 1960 가을 달러위기가 표면화됐다. 경제위기와 함께 1960년대 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책동도 심화됐다. 1959 미국의 코앞 쿠바에서 반미친사회주의혁명이 성공했다. 쿠바정권을 무너뜨리려고 미국은 각별히 노력했다. 1961.4 <피그만>침공은 실패했다. 1963.11 케네디미대통령이 암살되고 1964.8 기어코 <통킹만>사건을 조작하며 베트남전쟁을 개시했다. 1962 카리브해위기를 조성했는데 이는 튀르키예미사일배치와 쿠바미사일배치를 두고 일어난 소미대결전이었다. 이때 소련의 조치를 보면서 조선은 경제국방건설병진노선을 채택했다. 이를 위해 인민경제발전7개년계획을 3개년 더 연장해야했다. 코리아에서는 전쟁직후 미국과 이승만정부가 미군을 남코리아에 영구주둔시키는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정전협정에서는 정전협정효력발생후 3개월내에 외국군철수와 코리아반도문제의 평화적해결을 위한 정치회담을 소집하기로 했으나 이합의는 철저히 무시됐다. 이듬해 제네바회담에서 코리아문제의 평화적해결을 위한 통일방안과 외국군철수문제가 의제에 올랐으나 19개국이 둘러앉아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못한채 폐막했다. 1954부터는 미<한>합동군사연습 <포커스렌즈>지휘소연습이 최초 실시됐고 1961 <독수리>연습이 시작돼 합동야외기동연습으로 확대됐다. 야외기동연습은 바로 전쟁으로 이어질수 있어 지역의 군사적긴장이 높아지게 된다. 1958.1 미국은 코리아반도에 전술핵무기를 배치했다. 5.1 포천·연천접경지역의 주<한>미군세인트바바라사격장에서 <어니스트존>미사일과 280㎜M65원자포의 시험발사가 진행됐다. 1968.1 미해군정찰함(간첩선)<푸에블로>호가 동해 원산항인근에서 활동하다가 조선인민군해군에 의해 나포됐다. 조선의 기준에서 <푸에블로>호는 조선의 영해를 1㎞침범했다. 조선은 미국에 조선영해침범을 시인하고, 조선에게 공식사죄하며, 재범하지않는다는것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미국은 1968.2.8 세계최초핵추진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항모타격단을 원산항에서 24㎞ 떨어진 인접수역에 들이밀었다. 김일성주석은 <<보복>에는보복으로,전면전쟁에는전면전쟁으로대답할것>을 경고하고 대함미사일P15<테르미트>와 2단형지대공미사일S75<드비나>의 배치를 명령하며 대응했다. 조선은 1968.10 지대공미사일<번개>와 후에 대함미사일<금성>을 개발해 방어체계를 확립했다. 1960년대말 미국은 8종의 전술핵무기 약950발을 주<한>미군기지에 집중배치하고있었으나 이를 사용하지못했다. 1976.8 판문점미루나무사건당시에도 코리아반도의 전쟁위기가 고조됐다. 미항공모함<미드웨이>가 코리아반도해역으로, 오키나와미군기지에서는 전투기40대가 모인 2개전투단이 <한국>공군기지로 이동했다. F111전투기20대와 B52폭격기들도 미본토, 괌공군기지에서 코리아반도로 향했다. 군사위기가 고조되고 조선은 준전시상태를 선포했다. 조선은 경제국방건설병진노선으로 혁명무력을 준비하고 그전쟁억제력으로 코리아반도에서의 전면전을 막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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