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8 항쟁의기관차〉 전쟁원흉 제국주의를 타격하며 평화를 수호하는 반제세력

1차세계대전을 불러온 제국주의의 식민지쟁탈

19세기말~20세기초부터 제국주의국가들의 식민지쟁탈전이 더욱 격화됐다. 19세기중엽 제국주의단계로 이행한 영국은 식민지팽창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했다. 1875 이집트 수에즈운하통제권을 장악했고, 이듬해 빅토리아왕이 인도왕으로 선포됐다. 1880년대 케이프식민지총리 세실존로즈는 케이프(남아공)에서 카이로(이집트)까지 철도를 건설해 식민지배를 공고히 하려고했다. 여기에 캘커타(인도)까지 잇는 지역을 점령·식민지배하려는 패권전략이 영국의 <3C>정책이다.

1870 프로이센·프랑스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이 그대가로 프랑크푸르트조약에 따라 알자스·로렌지역과 50억프랑배상금을 받았다. 오토폰비스마르크는 대프랑스고립정책의 일환으로 오헝(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러시아와 3제동맹을 결성했으나 오헝·러시아간 관계악화로 1879 독·오헝, 1881 독·이탈리아, 1887 독·러가 각각 동맹을 맺었다. 1888 독 빌헬름2세는 동맹중시의 비스마르크와 달리 식민지쟁탈에 치중하다가 동맹과 갈등·충돌이 격화되며 결국 러와의 동맹이 깨졌다. 빌헬름2세는 베를린(독일)·비잔티움(튀르키예)·바그다드(오스만제국)를 연결하는 <3B>정책을 내세웠다.

프랑스는 1830 알제리점령, 1831 튀니지보호국화, 이집트·수단진출을 하고 아프리카횡단철도건설을 시도했다. 알제리(튀니지)·마다가스카르를 잇는 횡단정책을 실현하기 위한것이었다. 그과정에서 1898 영국·프랑스간 식민지쟁탈분쟁인 파쇼다사건이 발생했다.

1898 미국은 에스파냐와의 전쟁으로 에스파냐식민지 필리핀·푸에르토리코·괌을 탈취했고 쿠바를 <보호국>으로 전락시켰다. 1901~08 집권한 미공화당출신대통령 시어도어루즈벨트는 침략적팽창주의인 <큰몽둥이정책>을 내세웠다. 1903 파나마지역을 탈취했고 중·남미국가들을 간섭·통제·지배하며 패권장악에 열을 올렸다.

조선을 둘러싼 1894 청일전쟁, 1904 러일전쟁이 있었다. 한편 1839.9~1842.8, 1856.10~1860.10 발발한 1·2차아편전쟁은 영국의 중국식민지화를 위한 대표적침략전쟁이다.

오헝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1908 합병했으나 <슬라브주의>를 주창하던 러의 전면적반대와 영·프의 우회적반대에 직면했다. 1911 모로코를 둘러싼 프·독갈등이 격화됐으며 1912이후 오스만제국이 약화되자 1·2차발칸전쟁이 발발했다. 민족적분노와 갈등이 격화되면서 1914.6.28 오헝황태자암살사건인 사라예보사건이 발생했다. 사라예보사건은 1차세계대전의 신호탄이었다.

제국주의세력간 군사블록형성은 1차세계대전의 또다른 배경이다. 독일식민정책과 상충됐던 영·프·러는 1892 러·프동맹, 1904 영·프협상, 1907 러·영협상을 기반으로 3국협상을 맺는다.

한편 1879 독·오헝간 동맹, 1882 프랑스와 갈등중이던 이탈리아와 독·오헝간 동맹이 체결되면서 3국동맹이 결성됐다. 이탈리아는 오헝과 영토분쟁중이었기에 3국동맹은 매우 불안정했고, 1915.3 이탈리아가 3국협상과 런던조약을 체결하며 3국동맹은 결렬됐다. 사라예보사건은 1차세계대전을 격발시킨 직접적계기일뿐 전쟁근원은 식민지쟁탈에 열을 올린 제국주의세력의 무한대한 탐욕에 있다.

1차세계대전의 전개

1914.7.28 오헝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세르비아와 동맹관계인 러시아가 곧바로 참전했다. 독은 8.1 러·프에 차례로 선전포고를 했고 8.4 중립국 벨기에·룩셈부르크를 공격했다. 이에 영이 참전하며 오헝에 선전포고를 했다. 독은 전격적으로 서부전선을 점령한뒤 동부전선에 집중해 러와 전쟁하려했으나 서부전선에서의 강력한 저항으로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8.20이 돼서야 가까스로 벨기에 브뤼셀을 점령했고, 9월 프와의 전투인 마흔전투에서 패배했다. 한편 8.17 동부전선에서 러·독전투가 시작됐다. 독은 전쟁주도권을 잡았으나 러군의 집요한 반격으로 인해 치열하게 대치했다. 전쟁형태는 참호전으로 바뀌면서 장기전·소모전으로 전환됐다. 8.2 오스만제국이 독과 비밀동맹조약을 맺고 러를 공격했으나 캅카스전투에서 전멸했고, 11.5 영은 오스만제국에 선전포고, 키프로스섬병합을 선언했다. 1915 독은 동부전선에 집중하면서 취약해진 러를 집중공략했다. 이해말 독·동맹국이 세르비아전역을 점령하며 발칸지역의 지배력을 행사하던 러가 큰 타격을 입었다.

1916 베흐됭전투는 서부전선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중 하나로 기록돼있다. 프랑스 파리방어를 위한 마지막요새였던 베흐됭에서 프·독양쪽은 사활적으로 전투했다. 9월 독은 패배를 인정하고 베흐됭공격중단을 결정, 12월 프가 독일점령지역을 모두 되찾으며 종전했다. 이전투로 프54만3000명·독43만3000명이 사망했다. 수세에 몰린 독이 1916.8 <무제한잠수함>작전을 개시하자 <중립>을 지키던 미가 1917.4 독에 선전포고를 했다.

1차세계대전종식을 앞당긴 러시아혁명

전쟁이 본격화되자 혁명세력과 기회주의세력은 각각 평화세력과 전쟁세력으로 빠르게 분화됐다. 프리드리히엥겔스는 2국제당내 기회주의조류, 예컨대 1890년대초 <계급조화>를 주창하며 의회주의를 내세우던 우경기회주의를 배격하고 맑스주의원칙을 철저히 견지하기 위한 사상전을 벌였다. 1891 칼맑스의 <고타강령비판>을 공개적으로 발표했고 2국제당초기 무정부주의반대투쟁에 정확한 노선을 제시했으며 독일의 좌경기회주의자그룹을 독사회민주당내에서 청산했다. 1895.8.5 엥겔스서거후 2국제당내 수정주의가 발호했다. 그중심에 독사회민주당 에두아르트베른슈타인이 있었다. 베른슈타인은 맑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혁명·독재에 관한 이론을 헐뜯고 교묘하게 부정하면서 사민주의정당들이 각국에서 얻는 선거표수를 부르주아민주주의와 의회제도찬양의 근거로 삼으며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평화적이행>을 선전했다.

1907.8 2국제당의 슈투트가르트대표대회가 개최됐다. 5대륙·20여개국에서 800여명대표가 회의에 참석했다. 블라지미르레닌은 러시아 볼셰비키대표단과 함께 대회에 처음으로 참석했다. 이대회에서 채택된 결의의 핵심내용은 군국주의는 계급적압박의 주요수단이며 청년들속에 선동사업을 강화하고 반전과 이미 시작된 전쟁을 신속히 종식시키기 위해 투쟁하며 전쟁에 의해 조성된 위기를 자산계급의 몰락을 촉진하는데 이용한다는것이었다. 국제노동계급의 제국주의전쟁반대의 중요문헌인 슈투트가르트결의는 1914 1차세계대전이 폭발하자 2국제당의 수정주의지도부에 의해 사문화됐다. 이수정주의자들은 <애국>·<방어>를 내세우며 자국노동계급을 전쟁에로 떠밀었다. 의회에 편입된 독사회민주당은 전시공채를 의회에서 통과시키는데 찬성하고 전시내각에 참여하며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를 훼손했다. 레닌은 2국제당지도부를 차지하고있는 우익사민주의자들을 <사회배외주의>로 규정했다.

레닌은 1915.9.5 짐머발트회의에서 2국제당과의결별·새국제당창설·모든전쟁대부금거부·<제국주의전쟁을내전으로전환>을 담은 결의안을 제출했다. 1916.4 키엔탈회의에서 사회주의깃발을 들고 부르주아정책을 추구하는 자들과 단호하게 갈라서야한다는 사실을 대중들에게 일깨워주는것이 사회주의자들의 과제라는 내용의 강령을 제출했다.

1917 러시아2월혁명이후 레닌은 <4월테제>를 발표하며 평화에 대한 관점을 명확히 했다. 2월혁명으로 등장한 알렉산드르케렌스키정부는 <혁명적방위주의>를 내세우며 전쟁을 지속하려고했다. 이에 <4월테제>에서 레닌은 <혁명적패전주의>를 내세우며 <2월혁명은제국주의전쟁이내전으로전환되는첫걸음이었다>·<전쟁을확실히끝장내려면두번째걸음,즉국가권력이노동계급에게이양돼야한다>며 <자본주의이해관계라는전선을파멸시키는돌파구의시작이될것이다.오직이전선을돌파해야만프롤레타리아는인류를전쟁의공포에서구하고인류에게평화의축복을선사할수있다.>고 선언했다. <모든권력을소비에트로>는 두마(의회)와 소비에트(노동자·빈농·병사평의회)의 불안정한 2중권력구조를 타파하기 위한 전략적구호면서 <빵>·<땅>과 함께 <평화>를 촉구한 러시아민중들의 요구를 전적으로 반영한 혁명적방침이었다.

1917.10 러시아사회주의혁명으로 1차세계대전의 판도가 크게 바뀌었다. 혁명승리후 러는 1차세계대전에서 벗어났다. 1918.3 러·독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조약을 체결하며 러는 전쟁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독은 수세적상황을 약간 모면했다. 독은 1918.2 서부전선에 군력을 집중시켰으나 공격에 실패했고, 8.8 서부전선이 완전히 붕괴됐다. 9.15 독의 편이었던 불가리아가 마케도니아전선에서 완전히 궤멸됐다. 이시기 각국노동계급은 반전투쟁과 전시경제마비를 위한 파업투쟁을 활발히 전개했다. 특히 1918.10말~11초 독일내에 군사반란·노동자총파업이 있었다. 10.24 킬군항에서 군사봉기가 일어났다. 독공산주의세력은 11.9 베를린전역에서 총파업을 일으켰다. 빌헬름2세는 퇴위·망명하고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장악해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소련의 탄생과 각국노동계급·혁명세력의 반전평화투쟁은 전쟁종식을 앞당겼다. 11.11 1차세계대전은 종전했다.

2차세계대전을 막기 위한 노력

파시즘이 발호하자 세계반파시즘세력·평화애호세력은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1933.11 코민테른(3국제당)집행위원회총회에서 파시즘을 금융자본의 가장 반동·배외주의·제국주의적인 분자의 공공연한 테러독재로 규정했다. 총회는 파시즘이 소부르주아·일부노동자속에서 대중적기반을 형성해가는것에 주목했다. 이탈리아 베니토무솔리니, 독일 아돌프히틀러는 자국내에서 파쇼통치와 함께 중간층개량화를 위한 포퓰리즘정치를 동시에 벌였다. 코민테른은 파시즘과 소부르주아·일부노동자사이를 분리하지않으면 반파쇼범위가 축소된다는데 문제의식이 있었다. 이에 1935.8 7차대회에서 게오르기미하일로비치디미트로프총비서는 <파시즘의공세와파시즘을반대하는노동계급의통일을위한투쟁에서의코민테른의과업>을 발표하고 <근로대중을파시즘과의투쟁에동원함에있어특히중요한임무는노동계급통일전선을기초로광범한반파시즘인민전선을결성하는일>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근로농민·소부르주아·피억압민족투쟁을 노동계급지도아래 통합할것과 공산당·사회당통합에 있어서 반동적부분을 치면서도 통일전선을 확대, 식민지·종속국가들내에서의 반제통일전선형성을 강조했다.

이대회에서 채택한 <제국주의자들의새로운세계전쟁준비와관련한공산주의인터내셔널의임무에관하여>결의에서는 파시즘의 침략전쟁책동을 고발하면서 코민테른의 임무로 평화수호·소련옹호투쟁, 전쟁방화자반대투쟁에서의 통일전선, 제국주의전쟁반대투쟁과 반파시즘투쟁의 결합, 군국주의·군비반대투쟁, 배외주의반대투쟁, 민족해방투쟁·민족해방전쟁지지등을 구체적으로 내세웠다.

각국내에서 인민전선이 형성·강화되고 전쟁을 예방하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31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1935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략했으며 1936 스페인파쇼세력에 의해 스페인내전이 발발했다. 1936 독·일이 방공협정을 체결하고 1937 이탈리아가 이협정에 참여하며 <파쇼블록>이 형성됐다. 독·이·일이 미·영·프등 같은 제국주의국가들을 위협하면서 제국주의내부모순이 발생했다.

이같은 국제정세하에서 소련은 반파쇼전선확대·강화를 위해 여러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1933 소·미간 수호·불침략·중립조약체결로 국교가 수립됐다. 1934 독·일이 탈퇴해 약화된 국제연맹에 소련이 가입했다. 같은해 소·프는 독까지 포함해 <침략에대한집단적반격에관한조약>체결을 추진했으나 나치독일의 거부로 성사되지않았다. 1년뒤 소련은 프·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조약을 체결했다. 1938.3 소련은 독의 오스트리아병합에 대해 <강대국이세계를집단적인힘으로구원하는문제에대해확고하고도명확한입장을취한다면오늘이라도아직늦지않다>며 즉각 적절하고 실제적인 조치마련을 논의할것을 강대국들에 제안했으나 실현되지못했다. 1938.5 나치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위협하자 조약에 따라 소·프·체군사대표자회의를 소집해 방어·보호조치를 제안했으나 채택되지않았다. 오히려 영·프는 1938.9 독·이와 뮌헨협정을 체결, 체코슬로바키아 주데텐란드의 독일할양을 인정했다. 이는 독일의 침략방향을 서부가 아닌 동부로 돌리기 위한 배신적행위로서 전쟁을 결정적으로 촉진했다.

소련공산당은 1939.3 18차대회에서 모든나라와평화·실무적관계강화, 평화와각민중간의우호에관심을갖고있는세계노동자와의국제연대강화등 평화를 위한 조치들을 채택했다. 같은달 나치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전역을 점령, 폴란드침략준비를 본격화했다. 그럼에도 영·프는 1939.8.11~21 소·영·프3국군사대표교섭에서 소련과 연합할 의사가 없음을 드러냈다. 1939.8.23 소련은 18차대회결정중 하나인 <전쟁도발자가소비에트국가를 분쟁에끌어들이는것을허용하지말것>에 따라 나치독일이 제안한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며 방위를 위한 시간을 벌었다. 파쇼세력은 전쟁을 일으켰고 소련·세계반파쇼전선은 전쟁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이과정에서 미·영·프제국주의는 철저히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했다.

세계반파쇼전선의 전쟁종식을 위한 노력

1939.9.1 독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영·프는 9.3 독에 선전포고했지만 독의 주공방향이 동쪽이자 소련을 침공할것으로 오판한채 적극적군사행동을 하지않았다. 오히려 소련을 붕괴시키기 위해 소련국경인근나라들을 끌어들이려고했으나 소련은 라트비아·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와 1939.9~10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며 이같은 술책을 분쇄했다. 서부전선에 주둔한 영·프연합군병력은 독일군보다 훨씬 많았음에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않았고, 그결과 1939.9~1940.5 서부전선은 <가상전쟁>상태였다. 1940.5.10~6.22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프랑스까지 독일이 침략·점령하면서 <가상전쟁>은 끝났다. 이탈리아는 영국령식민지들을 장악하기 위해 소말리아·케냐·수단일부를 점령해 1940.7 식민지를 확대했으나 이해 12월 영국군에 패배했다. 1940.9.27 독·이·일은 3국조약을 체결, 서로 모든 가능한 원조를 하기로 결정했다.

서부유럽을 장악한 나치독일은 1941.4 유고슬라비아·그리스를 점령한뒤 침략의 예봉을 소련으로 돌렸다. 6월 선전포고 없이 소련을 기습했다. 독일군은 전격전으로 12월까지 소련을 점령하려고했다. 소련최고사령관 이오시프스탈린은 6.30 <모든것을전선을위해!모든것을승리를위해!>구호를 들고 조국방위를 호소했다. 나치독일은 1941.7 레닌그라드공격을 시작했고 9월초 핀란드파쇼군과 연합해 레닌그라드를 봉쇄했으나 레닌그라드민중들은 가열·치열한 싸움을 전개하며 2년5개월간의 대봉쇄에도 굴복하지않았다. 9월 독일14개기갑사단은 <타이푼>작전명으로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했다. 소련공산당원·콤소몰(전연방레닌주의청년공산주의자동맹)을 중심으로 이뤄진 12개사단의용군이 핵심이 돼 모스크바방어를 훌륭하게 전개했다. 소련국가방위위원회는 10.19 <모스크바를적들의손에넘겨주지말자>구호를 들었다. 12월초 독일은 수도포위에 실패했고 -40℃의 겨울날씨에 히틀러는 동계작전을 중지했다. 1942여름 스탈린그라드전투가 예고됐다. 모스크바전투에서 패배한 파쇼군은 볼가쪽을 침공해 스탈린그라드로 침투했다. 파쇼군은 50개사단·100만이상군인을 스탈린그라드방면에 집결시켰다. 1942.7.23 시작한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붉은군대는 2달가까이 도시를 방어했고 그주변지역전선을 굳건히 수호하고 공세적으로 대항하면서 파쇼군대를 수세로 몰았다. 1942.11.19새벽 시작한 스탈린그라드반격작전으로 11.23 독일군병력30여만명이 붉은군대에 포위됐다. 1943.2.2까지 포위된 독일군전원이 항복했다. 이 독일의 패배로 일본·튀르키예는 독일편에서 소련과 전쟁하려던 시도를 중단했다. 소련은 전략적주도권을 장악하며 2차세계대전승리를 위한 대전환을 이룩했다. 1943여름 쿠르스크전투에서 소·독은 최대기갑전을 벌였고 소련이 대승했다.

스탈린은 나치독일을 격퇴하면서 반파쇼진영에 속한 영·미를 견인하기 위해 계속 노력했다. 1941.7 소련은 영국과 <독일과의전쟁에서공동행동을취하는문제에대하여>협정을 체결했다. 1942.1.1 소련은 미·영등26개국과 파쇼블록분쇄를 위해 군사·경제자원동원할것에 대한 내용의 선언문을 체결했다. 영·미와는 1943 유럽에서 2전선(서부전선)을 구축한다는 협정을 맺었다. 세계공동주의세력은 영·미를 견인하기 위해 1943.5 코민테른을 과감히 해산했다.

1943말 테헤란에서 소·미·영정상회의가 개최됐다. 선언문에는 2전선구축이 재차 강조됐다. 독일군전력분산과 반파쇼세력승리를 위해 2전선구축은 매우 중요했고, 그래서 1942 합의했던것인데, 미·영은 이를 계속 지연시켰다. 이회의에서 영총리 윈스턴처칠의 반대를 극복하고 1944.5.1이전까지 2전선형성을 결정했다. 붉은군대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군하면서 주변지역 파르티잔·레지스탕스와 함께 유럽을 해방했고, 1944여름 파쇼세력점령지중 약3/4을 수복했다. 상황이 이쯤되자 영·미는 전후패권을 염두해 1944.6 2전선형성약속을 이행했다.

소련·세계반파쇼세력은 2차세계대전을 제국주의간전쟁에서 세계반파쇼전쟁으로 전화시키면서 승리를 이룩하고 평화를 쟁취했다. 세계반파쇼전선의 승리로 사회주의권이 확대되고 식민지·반식민지내에서 민족해방세력이 집권했으며 제국주의국가내에서 공산당·노동운동이 강화됐다. 한편 미국은 1945.8 일 히로시마·나가사키에 각각 1발씩 2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하며 전후패권장악의 야심을 드러냈다.

제국주의신질서와 <냉전>

2차세계대전종식후 제국주의진영은 미국중심의 <신질서>를 형성하고 <냉전>체제를 조작했다. 제국주의국가들의 병렬적관계가 미제국주의를 우두머리로 한 수직적관계로 변모했다. 국내적으로 국가독점자본주의인 제국주의세력은 식민지정치·경제지배방식을 직접통치·상품수출위주에서 간접통치·자본수출위주로 탈바꿈했다. 전후 미국은 소련·동유럽사회주의붉은물결의 서유럽확산을 가로막고, 유럽제국주의를 자국아래 복속시키며, 자국내 전후잉여생산물을 처분하기 위해 1947.6 <마샬>계획을 수립했다. 이른바<유럽부흥계획>인 <마샬>계획하에 1948~51 약120억달러가 유럽국가들에 투입됐는데 영국·프랑스 다음으로 분단국인 서독에 가장 많은 원조가 이뤄졌다. 이자금의 일부는 미CIA(중앙정보국)를 통해 비밀첩보활동에 쓰였다. 일례로 우크라이나파쇼무장대에 투입돼 대소련정찰, 동유럽내부분열·파괴공작에 사용됐다. 더해 서유럽내 군기지설치에도 자금이 투입됐다.

1949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가 창설됐다. 1944 영국주도로 서유럽<안보>체제수립이 논의됐는데, 전후 1948.3 미중심의 <집단방위>체제인 브뤼셀조약이 체결, 이후 진행된 펜타곤회담에서 나토설립이 구체화됐다.

<마샬>계획과 나토는 제국주의진영의 <냉전>정책의 구체적산물이다. 1944 브레튼우즈협정으로 전후세계경제패권장악을 계획한 제국주의진영은 2차세계대전에서 같은 반파쇼세력이던 소련과 사회주의·민족해방세력을 타방으로 하는 <냉전>을 조작했다. 1946.3 전영총리 처칠은 헤리트루먼미대통령이 배석한 한행사에서 <철의장막>연설을 하면서 대소련적대의식을 노골화했다. 1947.3 트루먼은 <트루먼독트린>으로 <냉전>교리를 공식화했다. 특히 그리스·튀르키예<군사원조>를 주장하며 <철의장막>을 구체화했다. 유럽에서 그리스, 동아시아에서 코리아반도가 제국주의세력이 설정한 <철의장막>이라는것은 1946 시작한 그리스내전과 1950.6 코리아전을 통해 확인된다. 그리스내전의 2국면이 시작된 1947.5 미국이 그리스내정에 직접개입하며 그리스는 미식민지로 완전히 전락됐다. 이때부터 직접 내전에 개입한 미는 1949.8까지 그리스민주군을 소탕하기 위해 그리스중·북부거점들에 네이팜탄을 퍼붓고 국경을 봉쇄했으며 진보인사 238명을 총살하고 839명에 사형선고를 내렸다. 소련은 민족자결주의를 견지하면서도 알바니아를 통해 그리스민주군을 지원했다. 반면 수정주의로 변질된 유고슬라비아 요시프브로즈티토는 그리스민주군의 핵심세력인 그리스공산당이 사회주의원칙을 견지하고 내부의 친티토종파세력을 정리하자 미국과 유착해 국경을 봉쇄하며 반사회주의적만행을 저질렀다.

한편 코리아전을 계기로 제국주의진영은 나토를 전력화했다. 미중심의 총16개국이 코리아전에 참전했다. 특히 12개나토가입국중 7개국이 <유엔군>의 미명하에 참전했다. 그리스·튀르키예는 코리아전참전대가로 나토에 가입했다. 1950.6.26 트루먼은 코리아를 <극동의그리스>라며 <3년전그리스에서그랬던것처럼저들과당당히맞서면,더는어쩌지못할것>이라고 언급했다. 1948 미는 제주무장봉기진압에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이후 국지전을 거쳐 전면전을 전개하면서 코리아반도전체를 점령하기 위해 원자탄투하까지 고려했다. 이는 나토초기전략개념과도 일치한다. 일련의 사실은 그리스와 함께 코리아가 사회주의진영대 제국주의진영간 전선에서 핵심적인 지역이었다는것을 보여준다.

제국주의진영은 사회주의대국 소련·중국과는 <냉전>을, 민족해방신생국과는 <열전>을 벌였다. 대표적으로 1950년대 코리아전과 함께 1960년대 베트남전을 들수 있다.

1964 <통킹만>사건을 조작해 베트남전을 개시한 미국은 북베트남·라오스를 폭격하고 1965~68 50만미군·남베트남친미군대로 테트(구정)공세를 감행하며 베트남민중 4만여명을 학살하고 30만명을 잡아들이며 NLF(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를 타격했으나 NLF전력은 약화되지않았다. 1969~72 미군은 캄보디아·라오스까지 침공해 전선을 넓히고 폭격을 재개했다. 1972.7 레득토·헨리키신저간 교섭이 시작된 이래 12월까지 약5개월간 미는 무려 폭탄4만t을 퍼부어 1318명을 학살했다. 베트남전에서의 미제국주의의 야수성이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전세계적인 반전시위·반미투쟁이 전개됐다. 1973.1.24 워싱턴·하노이동시성명이 발표되고 파리평화협정이 조인됐다. 1974.12 베트남노동당정치국은 남부에서의 총공격을 결정하고 1975.3 북베트남정규군의 총공격이 시작됐다. 1975.4.30 NLF군이 사이공시내에 진입하며 전쟁은 종식됐다.

한편 미는 1950년대 사회주의진영이 확대·강화하는 시기에 1951.9 호주·뉴질랜드와 군사동맹 안쥬스(ANZUS 태평양안전보장조약), 1954 세아토(SEATO 동남아시아조약기구), 1955~79 센토(SENTO 중앙조약기구)등 군사블록들을 연이어 조작했다. 동북아에서는 <네아토>를 추진했으나 현실화되지못한 대신, 일본·<한국>·필리핀등과 쌍무동맹관계를 구축하며 세계적범위에서 침략전쟁의 보루를 형성했다.

민족해방세력의 자주와 평화를 위한 노력

식민지·반식민지에서 해방된 신생민족해방국가들은 제국주의가 조작하는 군사블록에의 편입을 거부하고 침략·예속·간섭에 반대하는 블록불가담노선을 내세웠다. 1954.4 중국·인도양국간공동성명의 평화5원칙에 이어 1955.4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아시아·아프리카회의가 진행됐다. 회의에는 자와할랄네루인도총리·수카르노인도네시아대통령·주은래중국총리·가말압델나세르이집트대통령등이 참석했다. 이회의에서 채택된 <반둥10원칙>은 기본적인 인권과 유엔헌장의 목적·원칙존중, 모든 국가의 주권·영토완정존중, 집단적방위를 강국의 특정이익을 위해 이용하지않으며 다른나라에 압력을 가하지않는다, 침략·침략위협·무력행사로 타국의 영토나 정치적독립을 침범하지않는다, 국제분쟁은 평화적수단에 의해 해결, 상호이익·협력촉진, 정의·국제의무존중등을 담고있다. 반둥회의에 이어 1961 블록불가담운동이 개최됐다. 1961.6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서 티토·네루·수카르노·나세르가 참석해 정상회의를 위한 준비회의를 진행했고 9월 25개국 참석하에 1차정상회의가 개최됐다. 블록불가담운동은 자주적정책실시, 민족해방운동 무조건지지, 어떤 군사블록에도 불참가, 자국영토에 외국군기지를 두지않는것을 원칙으로 했다. 1973.9 4차블록불가담운동정상회의에서 사실상 조선의 자주적평화통일방침을 지지하는 <조선문제에관한결의>가 채택됐고, 이와 함께 신흥세력나라들·발전도상국가들의 새국제경제질서수립에의 지향을 반영해 이를 유엔에서 심의채택할것을 요구했다. 1974 유엔총회29차회의에서 미·영·서독·프·일등 제국주의세력의 반대에도 찬성120·반대6·기권10으로 <국가들간의경제적권리와의무에관한헌장>이 채택됐다. 헌장에는 국제관계에서 나라들간 자주권·평등·영토완정·내정불간섭원칙, 공정한 호혜와 평화공존 및 민중평등권·자결원칙, 분쟁을 평화적방법으로 해결하며 국제적의무에 충실할데 대한 원칙, 패권·영향력행사시도를 배격하며 국제적으로 협조하는 원칙, 내륙국가들의 바다에로의 자유로운 출입과 자연부원·경제활동에 대한 자주권, 사회제도의 자주적선택권, 외국회사에 대한 지배권, 국제경제협조에 참가할 권리등 정치·경제분야에서 자주적이며 평화적인 관계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담겼다.

1974.5 조선은 블록불가담운동에 정식가입을 결정하고 1975.8 정식성원국이 됐다. 조선은 블록불가담운동에 대해 <온갖지배와예속을반대하고자주성을지향하는진보적운동이며제국주의와대치하고있는우리시대의위력한혁명역량>·<확대발전시켜야제국주의자들의침략과간섭책동을성과적으로물리칠수있으며국제무대에서나서는모든문제를신흥세력나라인민의요구와이익에맞게해결할수있>다며 블록불가담운동의 근본원칙을 철저히 지킬것을 강조하면서 구체적으로 <쁠럭밖에있는독자적인정치세력이며,어떤쁠럭에도가담하지않고자주적으로나가는것은쁠럭불가담운동의근본원칙>·<절대로그어떤쁠럭에추종하거나끌려가지말아야하며쁠럭불가담운동안에분열을조성하거나새로운쁠럭을형성하지말아야>·<완전한평화와내정불간섭의원칙을지켜야하며단결과협조를강화하여야>한다고 정리했다.

4차블록불가담정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1975.2.4~8 진행된 세네갈 다카르회의에서 채택한 다카르선언은 자립적민족경제건설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제국주의의 침략적인 신구식민주의·인종격리정책·인종차별·온갖형태의침략과강점·지배와 이로인한 경제·사회적후과를 청산할것을 내세우며 반제자주의지를 공식화했다.

현대수정주의의 대두와 굴욕적인 <평화주의>

니키타흐루시쵸프는 사실상 권력을 찬탈해 집권했다. 1953.12 소련내무인민위원 라브렌티베리야를 제거하고 게오르기말렌코프를 1955.2 수상자리에서 제거했다.

1956.2 소련공산당20차대회에서 흐루시쵸프는 스탈린격하연설을 했다. 이는 소련의 사회주의건설과 조국방위에 헌신한 선대혁명가에 대한 배신이자 현대수정주의로 변질됐다는 자기고백이었다. 20차대회에서는 제국주의와의 전쟁불가피론이 부정되고 <평화공존>론이 채택됐으며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다양성>, 사회주의로의 혁명의 <평화적발전>가능성이 주장됐다.

<평화공존>론은 제국주의자와의 타협을 제안한것이었다. <평화공존>자체는 레닌때부터 나온 말이지만, 흐루시쵸프 <평화공존>론의 결정적오류는 이를 <세계공산주의운동의총노선>으로 제기하며 식민지국가들과 제국주의자들간 <평화공존>, 자본주의국가내부 자본가와 노동자의 <평화공존>을 주창하게 한것이다. 사회주의로의 혁명의 평화적발전가능성은 수정주의자 베른슈타인이 주창하던것으로 맑스·엥겔스·레닌·스탈린이 모두 배격한 사민주의적내용이다. 이는 자본주의내에서 투쟁하는 맑스레닌주의자들을 공격하고 사민주의자들과의 연대를 선언하며 맑스레닌주의사상자체를 훼손하는것이자 사회주의혁명을 부정하는것으로, 제국주의국가들과의 <타협>을 의미한다. 이같은 흐루시쵸프의 <반스탈린>·<평화주의>는 1960년대이후 유럽제국주의내에 범람한 유로코뮤니즘과 닮았다. 유로코뮤니즘은 <평화>를 내세우고 계급투쟁을 사실상 부정하며 사민주의와의 연정, 의회주의를 선택했으며 무엇보다 <반스탈린>을 주창했다. <평화공존>전략의 심각한 오류는 1961.6 흐루시쵸프와 존F케네디미대통령간 정상회담실패와 2년뒤 쿠바미사일위기를 통해 드러났다.

<평화주의>의 오류는 레오니드브레즈네프때 더욱 심화됐다. 소비에트역사학자 드미트리볼코고노브는 브레즈네프에 대해 <평화롭고조용하고평온하며갈등이없는>것을 원했고 <개혁에겁을먹었다>라고 평가했다. 반면 1979.12 나토는 <힘의균형>이라는 미명하에 600기의 새로운 미국산중거리핵미사일을 서유럽곳곳에 배치할것을 결정했다.

브레즈네프후임으로 1982.11.12 서기장이 된 유리안드로포프는 브레즈네프의 오류를 바로잡을수 있는 인물로 평가됐다. KGB(국가보안위원회)수장이었던 안드로포프는 <평화공존>·전쟁방지정책을 지지했으나 국제관계에서 여전히 계급투쟁원리가 지배한다고 주장했고, 1970년대에는 제국주의자들이 <반체제>·<인권>을 내세우며 사실상 소련에 대한 심리전·이데올로기투쟁이 강화됐다고 경계했다. 안드로포프는 <평화는제국주의자들에게구걸한다고해서얻어지는것이아니다>라고 확신했고, 훗날 고르바쵸프가 받아들인 로널드레이건미대통령의 일방적인 <제로옵션>제도를 거절했다. <제로옵션>은 소련이 유럽에 배치한 모든 중거리미사일은 철수하지만 미국은 서유럽중거리미사일을 제외하고 유럽중거리미사일배치를 포기한다는것이었다. 안드로포프는 취임한지 약14개월만인 1984.2.9 세상을 떠났고 그의 계획은 중단됐다.

한편 1980년대 들어 미국은 미공군우주사령부를 신설하고 위성에 장착한 중거리핵미사일등을 우주에 전가할 준비를 다그쳤으며 1983.3 레이건은 우주전쟁에 관한 <전략방위구상>, 일명<스타워즈>계획을 발표했다. 1983.11 나토회원국들에 미국산중거리핵미사일들이 배치됐고, 1984.4 미본토·태평양내지역에서 <글로벌실드84>핵전쟁연습이 전개됐다.

1985.3 서기장이 된 미하일고르바쵸프는 <새로운사고>·외교의탈이념화를 주창하면서 <계급중심>에서 <평화>·<협력>으로의 이념대체를 내세웠다. <평화>·군비축소를 앞세워 일방적으로 핵실험을 중단하고 중거리미사일수를 줄였으며 레이건에게 <소미관계회복>·전략무기50%감축안을 제안했다. 안드로포프가 거절했던 <제로옵션>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반면 1987 나토회원국16개국중 스페인·아이슬란드를 제외한 14개국무력총수는 578만2000명에 달했다. 이는 1975대비 51만9000명이 증가한것이었다. 기간 군비증강에는 3조달러를 투입했다.

소련의 수정주의적변질은 제국주의와의 협상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1954 소련의 제안으로 시작된 CSCE(유럽안보협력회의)협상에서 1972 나토는 사람·정보·사상의 교류와 <인권문제>를 주의제로 내세우며 소련·동유럽분열책동을 심화했다. 1975 헬싱키의정서, 1986 스톡홀름협약등 유의미한 군사적합의가 있었으나 미국은 소련·동유럽을 겨냥한 미사일배치등 군비경쟁을 더욱 심화시켰다. 1980년대 소·미간 <신뢰안보구축조치>를 합의했는데 그적용지역을 대서양에서 우랄산맥까지 포괄했고 군사·정치적검증을 요구하면서 소련주권을 위협했다. 1990 파리회의에서의 대결시대종식·인권·민주주의·경제적자유·평화적수단통한분쟁해결·모든국가의동등한안보등의 목표는 미·나토가 전통적으로 강조해온 반사회주의적의제였으며 소련·동유럽반혁명화를 부추기는것이었다. 소련의 수정주의화와 소련·동유럽반혁명화는 <평화주의>로는 결코 주권과 평화를 수호할수 없다는것을 보여준다.

소련·동유럽반혁명화와 나토의 침공

1989 베를린장벽이 무너졌고 폴란드에 우익정권이 집권하면서 나토동진은 본격화된다. 1991.7 바르샤바조약기구가 공식적으로 해체됐고 1991.12.26 소련이 붕괴됐다. 나토는 1989 독일전체로 세력을 확장했고 1990 중·동유럽국가들과의 정치군사적<협력>관계증진을 표명, 1991.11 북대서양협력이사회를 통해 나토회원국과 25개중·동유럽국가들간 공식적협의과정을 제도적으로 구축하며 나토동진을 준비한다. 1990 나토가 소련에 확약한 <나토동진금지>는 추진된적이 없다. 2002.11 불가리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루마니아·슬로바키아·슬로베니아가 나토프라하정상회의에 초청, 2004 정식회원으로 가입했다. 알바니아·크로아티아는 2009에 나토에 가입했다. 한편 2000.5 블라지미르푸틴러대통령당선인은 빌클린턴미대통령에게 러시아의 나토가입을 제안했으나 이는 거부됐다. 소련·동유럽반혁명화이후 나토는 철저히 동유럽을 사실상 식민지화하고 러시아를 분열·약화시키면서 미중심의 1극체제를 형성하는데 주력했다.

1990.8 미·나토는 <다국적군>을 조직해 쿠웨이트전에 개입, <사막의방패>·<사막의폭풍>군사작전으로 이라크전을 전개했다. 이를 빌미로 조지HW부시미대통령은 유엔총회에서 <신세계질서>를 떠들었다.

미·나토는 동유럽패권장악·군사적지배를 목적으로 1990년대 들어 보스니아내전과 코소보분쟁에 개입했다. 1992.7부터 보스니아내전에 사실상 군사적개입을 하고있던 나토는 1994.2 세르비아전투기를 격추시키며 나토창설후 공식적인 첫군사행동을 개시했다. 이어 1995.7 제국주의에 의해 조작된 <스레브레니차학살>을 계기삼아 침략적개입을 본격화하며 8.30부터 3주간 대규모공습을 감행했다. 나토는 1995.12.14 데이턴협정에서 <합의>한 <평화유지임무>를 내세워 지역내 나토군을 배치, 2004말까지 점령했다.

1999 코소보분쟁에서의 나토의 대량폭격·살육은 나토의 침략·학살적성격을 전세계에 드러내보였다. 1999.3 미·나토-유고슬라비아간 랑부예협상이 결렬됐다. 랑부예협상안의 핵심은 코소보자치권인정과 평화유지군파견이었다. 유고슬라비아는 평화유지군이 유엔산하일경우 합의하겠다고 했으나 미·나토는 나토군을 고집했고 코소보만이 아니라 유고슬라비아전영토 어디든 군사작전이 가능해야한다는 굴욕적단서를 달았다. 협상이 결렬되자 미·나토는 유엔절차도 없이 코소보를 공습했다. 1999.3~6초까지 약80일동안 유고슬라비아에 2300여차례 무차별공습을 가해 1800여명의 민간인을 학살하고 100만명의 피난민을 낳았으며 2000여억달러의 경제적손실을 입혔다. 나토는 유고슬라비아에 히로시마원폭위력을 넘어서는 1만개이상의 폭탄을 퍼부었다. 이과정에서 베오그라드주재중대사관도 폭격하며 중국을 자극했다. 1999 코소보전쟁종식후 나토는 <평화유지군>주둔명목하에 코소보내 대규모 본드스틸미군기지를 건설하며 코소보를 군사적으로 점령했다. 이미군기지는 러시아·동유럽포위의 중요군사기지로 평가된다. 이같은 사실은 미·나토의 코소보폭격의 진짜목적이 무엇인지 확인시켜준다. <냉전>·양극체제가 무너지자 바로 벌어진 미·나토의 침략·폭격은 전쟁원흉이 제국주의세력임을 재차 입증한다. 한편 1945~2001 세계153개지역에서 벌어진 248차전쟁·무장분쟁중 미국이 일으킨것은 201차로 약81%를 차지한다. 미국은 군사적점령·전쟁을 위해 이기간 최소80여개나라·지역에 수백개의 군사기지를 건설했다.

<반테러>미명하에 벌어진 미국의 테러와 침략

미·나토는 1극체제속에서 새로운 침략전쟁명분으로 <반테러>를 내세웠다. 2001 9.11테러를 계기삼아 조지W부시는 2001.9 <테러와의전쟁>을 주창했고, 2002.1.29 연두교서에서 처음으로 <악의축>발언을 하며 이라크·이란·조선을 <악의축>으로 모략했다.

2001 미는 9.11테러의 <배후>로 오사마빈라덴과 알카에다조직을 지목하고 10월 아프간(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탈레반과 알카에다간 <9.11테러>협력증거가 없고 탈레반정권이 미와의 협상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탈레반정권붕괴와 서아시아(중동)패권장악을 의도로 침략한뒤, 약20년동안 아프간을 지배하며 분쟁을 일으키고 학살을 벌였다. 그결과 아프간전쟁20년기간 아프간정부군은 6만6000명, 탈레반은 최소5만명이상 사망했다. 민간인·군인포함 전쟁에서 최소20만~25만명의 아프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미군은 2500명 사망, 2만명이 부상을 당했고 미<동맹>국병력은 1100명 사망했다. 탈레반대변인 수하힐샤힌은 <아프간국민수십만명이미점령군에살해당했고미폭격기·드론공습에맞아죽었다>고 규탄했다. 나토회원국들은 2001.10 북대서양이사회를 통해 나토조약5조<가입국들중1개국가이상외부로부터무력공격을받을경우동맹전체에대한공격으로간주하여피습동맹국을군사적으로지원한다>를 발동해 아프간전쟁에 개입했다. 미국은 탈레반정권축출후 미CIA에 부역해온 하미드카르자이를 대통령에 앉힌뒤 아프간마약경제를 장악했다. 연간 아편생산량은 2001 180t에서 전쟁후 1년만에 3000t으로 크게 늘었고, 2018에는 9000t까지 폭증했다. 2004기준 아프간은 세계아편수요의 87%를 공급했다. 아프간민중을 경제적·성적으로 착취해온 범죄집단 <북부동맹>에 공직을 대거배분한뒤 역내 에너지사업을 장악했고 아프간인접 구소련국가에 13개미군기지를 건설했다. 대규모군사작전들과 나토공습으로 탈레반·민간인이 끊임없이 학살됐다. 2019 유엔보고서는 미·정부군이 교전에서 탈레반보다 민간인을 더 많이 살해했다고 발표했다. 한편 조바이든미대통령은 2001부터 20년간 아프간전쟁에 최소1조달러를 썼다고 언급했다. 미브라운대 전쟁비용프로젝트통계에 따르면 총2조2610억달러를 사용했다.

버락오바마미대통령은 2008 대선에서 아프간전해결을 공약하며 당선됐지만 오히려 전투병력3만명을 아프간에 증파했고 나토군도 병력을 증강해 작전을 전개하며 침략책동을 심화했다. 2014에도 미군철수를 약속했지만 그뒤에도 계속 전투를 전개했다. 평화협정은 2020 도널드트럼프미정부하에서 진행됐다. 트럼프는 탈레반을 협상대상으로 인정하고 2021.5.1까지 미군완전철수를 담은 평화협정을 체결, 2021.8 아프간은 탈레반이 집권하며 최종적으로 탈레반이 승리했다. 탈레반은 집권과 동시에 아편·헤로인을 강력히 단속했다. 그결과 2023.11 아편생산은 무려 95%나 급감했다.

미국은 2003 이라크를 침공했다. <대량살상무기>해제가 명분이었다. 2002.9 사담후세인이라크대통령은 유엔총회대독서한에서 <핵·생화학무기없다>를 공식발표했음에도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해 후세인정권을 무너뜨렸다. 2003.9 대량살상무기수색임무를 수행한 이라크서베이그룹은 공식적으로 <대량살상무기없음>결론을 내렸다. 한편 전쟁43일만인 2003.5.2 부시는 종전을 선언했지만 이후 오히려 싸움이 더 격화되고 인명피해가 많아졌다. 2005.11.22기준 미군사망자수는 2100명이었는데, 2003.3.20~5.1 미군사망자수는 138명이었다. 종전선언후 증가한 미군사망자의 3/4은 교전중에 목숨을 잃었다. 2004.11 부시의 <테러리스트들은격퇴되고,이라크는자유로워질것이며,세계는더안전해질것>발언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2005.8 미브루킹스연구소 발표에 따르면 미군의 이라크점령이래 5만명의 저항세력이 사살됐고 1만5000명이 수감됐다. 미민주당의 한의원은 2005.1.25 미군이 1년간 매달1000~3000명의 이라크저항세력을 체포·사살했으나 동기간 저항세력규모는 5000~2만명선으로 증가했다고 밝혔다. 부시가 <이라크내테러격퇴는수백만명에게희망을줄것,이라크국민들은이를알고있다>고 주장한것과 정반대로 2003~05 매년여론조사에서 이라크인의 80~82%가 미점령군을 반대했다.

2010년대 들어 서아시아에서 일련의 <색깔혁명>을 일으킨 미·제국주의세력은 2011.2 리비아 카다피정권이 <아랍의봄>을 탄압한다며 유엔안보리를 통해 경제제재를 가하고 무아마르알카다피를 국제형사재판소에 회부했다. 2011.3 유엔안보리결의통과 2일만에 나토가 리비아를 대대적으로 공습했다. 카다피정권으로부터 민간인을 보호하겠다는 명분과 반대로 무차별폭격으로 리비아민중을 대량학살하고 영토를 초토화했다. 나토는 5개월간 7500번공습·2만여번출격했고 공습2달만에 민간인4718명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2011.8 카다피정권붕괴후에도 나토군은 주둔기간을 늘리며 계속 공습한뒤 2011.11 작전을 종료했다. 미국의 카다피정권붕괴·군사적침략에 따른 후과로 리비아는 10여년간 내전에 시달렸고 현재도 정치적불안이 심각하다.

서아시아의 진짜테러세력의 배후는 다름아닌 미국이다. 리비아정권붕괴후 다음 타깃인 시리아를 붕괴시키기 위해 <팀버시커모어>작전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2012 카다피정권에서 몰수한 수천t무기를 시리아반군에 전달하고 2013~17 시리아반군에 무기지원·자금제공·신병모집·훈련프로그램운용을 했다. 미국방부기밀문서에는 2012.5~9 리비아무기가 시리아로 이송된 구체적경로가 명시됐다. 2013.4 미CIA주도하에 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가 참여해 10억달러이상의 재원을 시리아반군에 투입했다. 무기는 50개가 넘는 알카에다계열반군조직에 전달됐다. 1980 소련·아프간전쟁당시 친미이슬람세력 무자헤딘을 지원한 이래 최대규모의 비용이 투입됐으나 이작전은 트럼프집권첫해인 2017.7 종료됐다.

미국은 <반테러>미명하에 2001부터 최근까지 전쟁·군사행동을 80여개나라에서 전개하면서 38만7000명민간인포함 약92만9000명의 사망자를 직접적으로 초래했고 약3800만명을 유랑자·피난민으로 전락시켰다.

3차세계대전의 시작과 심화

2022.2 러시아가 특수군사작전을 개시하며 우크라이나전이 본격화됐다. <냉전>시기 미제국주의의 지원을 받고 반사회주의선전을 해온 우크라이나파쇼세력은 소련·동유럽붕괴후 우크라이나로 옮겨가 우크라이나신나치세력형성의 바탕이 됐다. 미NED(전미민주주의기금)와 조지소로스재단등이 제공하는 자금·교육·훈련을 받으며 비대해진 우크라이나신나치세력은 2004 <오렌지혁명>, 2013 <유로마이단>시위등의 <색깔혁명>을 일으켰고 2014.2 <마이단>쿠데타로 빅토르야누코비치를 축출하며 정권을 탈취했다. 2014.5 오데사학살, 여름 돈바스침공을 감행하면서 8년간의 돈바스내전으로 공식적으로 1만4000명, 실질적으로 5만명이 넘는 돈바스민중들을 학살하고 주민시설을 대량파괴했다. 우크라이나당국은 나토가입을 추진하는 한편 2022.1 블로디미르젤렌스키우크라이나대통령이 <돈바스지역정리>를 공언하며 대대적인 침략을 예고하자 푸틴은 나토동진금지·신나치청산·주민보호의 3대목표를 걸고 특수군사작전을 개시했다. 일련의 상황은 우크라이나전이 반제반파쇼전·해방전·예방전의 성격을 지니고있다는것을 보여준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전에서 2022.5 마리우폴전투, 2023봄 아르툐몹스크(바흐무트)전투, 2024.2 아브데옙카전투에서의 승리로 주도권을 확고히 잡았다. 가장 악질적인 신나치부대 아조프연대의 근거지인 마리우폴은 돈바스지역과 크림반도사이에 위치했고, 우크라이나바다와 통하는 전략적요충지다. 마리우폴을 장악하는것은 신나치부대를 소탕하는데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우크라이나동부에 위치한 아르툐몹스크는 우크라이나가 나토의 도움을 받아 요새화한 군사적요충지다. 전투목적은 최대한 우크라이나군인을 제거하는것이었고, 이는 러군용병 바그너그룹에 의해 완수됐다. 아브데옙카는 도네츠크주의 도네츠크시를 눈앞에 둔 군사적요충지다. 9년에 걸쳐 요새화되면서 신나치군대가 로케트·미사일등으로 돈바스민간지역을 공격하던 거점이다. 2023가을 시작된 아브데옙카해방작전에서 우크라이나당국은 우크라이나군이 2만4000병력을 잃었다고 밝혔다.

2023.10 팔레스타인이 <알아크사홍수>작전을 개시했다. 팔레스타인무장조직 하마스는 시오니즘이스라엘의 75년에 걸친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알아크사홍수>작전을 결행했다. 2022.12 극우연정으로 집권한 베냐민네타냐후는 요르단강서안점령지등에서 유대인정착촌의 광범위한 확대를 공언했다. 2023.1 이스라엘극우치안장관 이타마르벤그비르는 알아크사사원을 기습방문해 팔레스타인인을 극도로 자극했다. 유엔은 2023초부터 9.18까지 이스라엘군대·정착민에 의해 살해된 팔레스타인인숫자가 무려 227명이라고 발표했다. 한편 조바이든미정부는 아이멕(IMEC 유럽중동경제회랑)을 준비하면서 아랍의 종주국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간 관계정상화를 추진함으로써 하마스·팔레스타인을 도발했다. 팔레스타인전은 하루만에 레바논무장조직 헤즈볼라가 참전하면서 바로 서아시아전으로 확대됐고 2024.1부터 미·영연합군은 홍해인근에 주둔한채 반제반시온무장조직<저항의축>을 겨냥한 일련의 군사작전을 계속 벌이고있다. 팔레스타인전이 반시온반제전·해방전, 서아시아전이 반제반시온전·해방전의 성격을 가지고있는 배경이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대한 폭격과 팔레스타인인대량학살을 벌이는 와중에 이란을 전쟁에 끌어들여 서아시아전을 폭발시키기 위해 2024.1 가셈솔레이마니IRGC(이란혁명수비대)쿠드스군사령관4주기추모식에서 폭탄테러를 일으키고 2024.4 주시리아이란영사관건물을 폭격했다. 이에 대응해 이란은 <진정한약속1>작전을 단행했다.

제국주의가 일으킨 3차세계대전은 2022.2 우크라이나전으로 개시, 2023.10 팔레스타인전·서아시아전으로 심화됐으며 현재 그본격화가 임박한 상황이다.

3차세계대전을 본격화하기 위한 도발들

제국주의호전세력은 <한국>전·대만전을 통한 동아시아전·서태평양전으로 3차세계대전을 본격화하려고했다. 이지역내 군사블록으로 2021.2 미·일·호·인도의 쿼드(Quad)가 정상회담체로 격상됐고 2021.9 미·영·호주의 오커스(AUKUS), 2023.8 미일<한>의 <동북아판나토>가 결성됐다. 전통적인 블록불가담국가인 인도가 우크라이나전이후에도 친러행보를 계속하자, 미국은 2024.4 일·호·필리핀과 <해양협력활동>군사연습을 실시한뒤 5월 스쿼드(S-Quad)를 결성해 사실상 쿼드를 대체하고있다. 미국은 일군국주의세력을 동아시아전돌격대로 삼기 위해 오커스<필러2>협력파트너로 포섭하고 중국·<한국>·필리핀인근에서 일군국주의세력과 필리핀·<한국>친미호전세력을 동원한 다국적합동군사연습을 여러차례 전개했다. 2023 일자위대가 참가한 다국적합동군사연습은 56회로 2006에 비해 무려 18배가 증가했는데, 유사시를 가정해 고도의 군사협력이 필요한 <전술·전투훈련>비중이 64%에 달했다. 군사연습은 조선을 염두한 동해, 중국을 겨냥한 조어도, 대만인근 동중국해에서 18차례, 동남아시아에서 10차례, 남중국해에서 4차례 전개됐다.

<동북아판나토>는 2023.8 캠프데이비드선언으로 형성, 2023.12 대조선미사일경보정보실시간공유체계가동으로 심화, 2024.6 <프리덤에지>다영역전연습으로 실전화됐다. 한편 제국주의침략세력은 <나토의태평양화>를 2024.7 나토워싱턴정상회의에서 정치적으로 완료하고 2024.6~8 <프리덤에지>·<림팩>·<을지프리덤실드>합동군사연습들을 통해 군사적으로 완료했다. 미제침략세력은 <한국>전을 일으키기 위해 미<한>대조선침략연습을 2023 123회, 2024 134회 전개했다. 대만전도발을 위해 대만분리독립을 사실상 지지하고, 2024.3 일지상자위대가 대만인근 오키나와에 미사일부대를 창설했으며, 미국은 2024.4 중국인근 필리핀 루손섬에 <타이푼>최신중거리미사일체계를 설치했다.

2024하반기 제국주의침략세력은 명실상부한 3차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위해 전쟁도발을 더 자주, 더 세게, 더 무리하게 감행했다. 2024.7 <우크라이나전종식>을 공약한 트럼프에 대한 암살시도를 시작으로 8월 미·나토배후의 우크라이나군 러쿠르스크침략, 9월 이스라엘 헤즈볼라무선호출기테러·레바논폭격, 10월 이스라엘의 이란본토타격과 이에 대응한 이란의 <진정한약속2>작전, 11월 미국산장거리미사일러본토타격허용에 대응한 러시아 최신극초음속미사일<오레쉬니크>발사, 12월 아사드시리아반미정권전복등이 연달아 벌어졌다.

국제적격변에 발맞춰 제국주의호전세력은 2024하반기를 <한국>전개시시점으로 삼고 대조선국지전·<한국>내전을 맹렬하게 획책했다. 2024.8 <을지프리덤실드>를 다영역에서, 유엔사령부회원국인 호주·프랑스·필리핀등까지 끌어들여 대규모다국적합동군사연습으로 전개한직후 반윤석열세력에 대한 압수수색·공안탄압을 본격화하며 <파쇼광풍>을 일으켰다. 한편 2024.9~11 대조선국지전도발로 백령도K9자주포발사연습·중화기사격·동해상다연장로케트포발사연습·오물풍선원점타격지시등을 벌였다. 특히 10월에만 3차례 무인기평양공격이 감행됐고, 6·7·8·11월 <아파치>헬기를 동원해 조선의 선제타격을 유도했다. 조선은 <전략적인내>로 제국주의침략세력과 그전쟁꼭두각시 윤석열파쇼호전세력의 대조선국지전도발을 파탄냈다. 12.3 <비전시계엄>, 친미친위쿠데타와 윤석열내란·반란세력의 대남자작모략극은 <한국>민중의 12월항쟁으로 저지됐다. <한국>전·동아시아전도발은 코리아민족·<한국>민중의 힘에 의해 결정적으로 분쇄됐지만 여기에는 제국주의비호전세력의 힘도 일정하게 작용된것으로 추정된다. 비상계엄이후 브래드셔먼미하원의원의 <조선도발위장공격시미국은진실알릴것>발언과 HID(북파공작부대)·<블랙요원>등을 동원한 테러준비의 폭로, 윤석열체포에 따른 <1.19법원폭동>과는 달리 윤석열파면당시 폭동·소요가 일어나지않은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한국>전이 터지면 1961 체결된 조중조약에 의거, 대만전은 동시에 터지고 이는 동아시아로 확전돼 3차세계대전이 본격화된다. 동아시아는 반제진영의 3대주력국가이자 핵미사일최강국 조선·중국·러시아가 모두 있는 최대전장이다. 제국주의호전세력·친미파쇼무리의 내전·국지전·<한국>전도발을 저지파탄시킨 조선의 <전략적인내>와 <한국>민중의 12월항쟁은 누가 진짜 평화세력인지를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동유럽정세격화와 대러침략책동

유럽에서도 침략도발과 3차세계대전본격화책동이 계속되고있다. 2025.6 나토헤이그정상회의에서 GDP5%까지 군사비인상을 결정했다. 앞서 2025.3 유럽동맹은 군사비지출대폭증가를 위한 8000억유로규모의 유럽재무장계획을 공개하기도 했다. 유럽이 군국주의화되고있으며 현국제정세가 3차세계대전본격화에 더욱 가까워졌다는것을 의미한다.

7.17 크리스토퍼도나휴유럽아프리카주둔미지상군사령관은 독일 비스바덴에서 열린 미육군<란드유로>행사에서 <나토군은필요할경우전례없는기간내칼리닌그라드를지도에서지울수있는역량을갖추고있다>며 러시아를 극도로 자극했다. 이날 미·나토는 <러위협>에 대응해 지상기반미사일전력을 강화하고 각국가간 방산협력을 촉진하는 <동부전선억제선>구상을 발표하기도 했다. 칼리닌그라드는 발트해연안 러역외영토로써, 러해군의 전략적요충지다. 나토회원국인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인접하며 나토가 발트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있어 군사적긴장도가 매우 높다. 이에 레오니드슬루츠키국가두마외교위원장은 <칼리닌그라드에대한공격은러시아에대한공격>·<핵무기사용을포함해모든상응한보복조치를할것>이라고 강조했다. 7.23~27 해군의날을 맞아 러시아는 <7월폭풍>작전훈련을 전개했다. 7.24 <크냐즈포자르스키>신형핵잠수함이 러해군에 편입했고, 푸틴은 신형잠수함의 국기게양식에 참석했다. 푸틴은 7.27 회의에서 <훈련의주요목표는해군부대가해상공격을격퇴하는데필요한행동을철저히훈련할수있도록하는것>이라고 언급했다.

2025.8.9 미중재하에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두나라는 나고르노·카라바흐분리지역을 둘러싸고 35년간 갈등과 분쟁을 겪고있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분리지역은 아르메니아인이 다수 거주하던곳인데 2023.9 아제르바이잔이 이지역을 장악하면서 거주민들이 아르메니아로 피난을 갔다. 2023.11 양국은 평화협정의 기본원칙에 합의했으나, 2024.4 국경지역에서 군사적충돌이 다시 발생했다.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와 국경이 맞닿아있는 국가들은 러시아·이란·튀르키예다. 이남캅카스지역은 형세가 복잡한만큼 정세가 매우 불안정한데, 여기에 미국이 개입하면서 더욱 첨예해졌다. 미국은 아르메니아남부국경을 통과해 아제르바이잔과 튀르키예까지 연결되는 잔게주르회랑을 장악해 이란·러시아를 봉쇄하고 바쿠원전등의 에너지패권을 장악하며 친미무장조직들에 무기투입을 원할하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지역에 접근했다. 아르메니아총리 니콜파시냔은 친미주의자로서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역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미국에게 잔게주르회랑에 대한 통제권을 내주고있다. 한편 러시아·아제르바이잔은 전략적동맹관계지만, 2025.6.28 러수사위원회가 2001~11 예카테린부르크에서의 살인사건에 연루된 아제르바이잔국수주의범죄집단을 해제시켰고, 이에 아제르바이잔이 반발하며 러시아관광객·언론인 9명을 구금하면서 관계가 복잡해졌다. 7.2 러시아측은 아제르바이잔이 자국학교에서 러시아어수업폐지계획이 있다는 언론보도는 가짜뉴스라며 동맹관계가 <특정세력사이에분노와협력을방해하려는욕구를불러일으킨다>며 반러세력개입을 경계했다. 8.9 평화협정에서 미·아르메니아는 잔게주르회랑에 대한 99년간의 독점적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이같은 결정에 대해 아르메니아연구소정치분석가 카렌이기티안은 이지역에 대한 미국의 장악은 러시아·브릭스회원국이 개발한 국제남북교통회랑을 방해하고 러·이란을 우회해 중앙아시아와 튀르키예사이에 서방이 통제하는 무역과 에너지경로를 구축하기 위한것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아르메니아는 잔게주르회랑통제권을 미국에 양도함으로써 자국국경과 전략적영토에 대한 주권을 상실했다고 우려했다.

3차세계대전·<신냉전>조작에 골몰하는 제국주의호전세력

2차세계대전종전후 <냉전>체제를 통해 위기를 모면한 제국주의호전세력에게 있어 3차세계대전을 통한 <신냉전>체제완성은 전략적목표다. 2024하반기 이전략적목표가 파탄나자 2025상반기 다른방식으로 전쟁을 본격화하기 위해 책동하고있다.

아시아의 주요화점마다에서 국지전이 연속 터지고있다. 2025.4.22 인도·파키스탄분쟁지역 카슈미르 파할감에서 테러가 발생했다. 5.7 인도는 <신두르>작전을 실시, 파키스탄9개지역에 미사일공습을 했다. 핵보유국인 양국간 전쟁이 전면화될경우 3차세계대전은 새국면으로 진입하게 되며, 인도와 파키스탄동맹국인 중국간 관계악화로 이어져 반제진영의 분열을 초래할수 있었다. 5.11 인도·파키스탄은 극적으로 휴전했다. 트럼프는 <인도·파키스탄이미국중재로전면적,즉각적으로휴전에합의했다>고 언급했다.

6.13 이스라엘이 <일어나는사자>작전으로 이란을 침공했다. 이란수도 테헤란을 비롯한 여러곳에 미사일을 발사했다. 이에 즉각 이란은 <진정한약속3>작전으로 대응, 이스라엘수도 텔아비브를 비롯한 주요군사시설을 폭격했다. 미사일강국 이란은 구형미사일과 <하지카셈>등첨단유도탄도미사일·극초음속미사일을 섞어쏘면서 이스라엘방공망<아이언돔>을 무력화시켰고 이란을 향해 전개하던 이스라엘F35전투기를 격추했으며 6.18 이스라엘영공의 완전한 통제를 선언했다. 이스라엘이 최악의 위기상황에 몰리자 미국은 6.21 벙커버스터GBU를 사용해 이란핵시설 포르도를 공격했다. 이란은 NPT(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돼있고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받고있다. 미국의 이란폭격은 국제법위반이다. 이란은 6.23 카타르 알우데이드미군기지에 미사일을 발사해 대응했다. 미·이란간 주고받은 공격은 사전에 예고된 <약속대련>으로 평가된다. 이란에게 주도권이 있음에도 미주도하에 <휴전>을 한 모양새는 반제진영·이란이 <전략적인내>를 견지하고있다는것을 확인시켜준다.

7.24 태국·캄보디아간 국경갈등이 격화돼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캄보디아는 태국민간시설공격에 <그라드>다연장로케트발사시스템을 사용했고, 태국은 캄보디아군기지를 공습했다. 초반 캄보디아공습으로 최소14명민간인이 사망했고, 태국국경4개주에서 10만명이상의 주민이 대피했다. 양국간교전에 항공기·전차등이 동원되며 두나라관계가 급격히 악화됐다. 1907 시암왕국(태국)이 프랑스와의 국경을 획정한뒤 일부국경구역이 처리되지않은채 남아있었는데, 캄보디아가 1953 프랑스로부터 독립후 프레아비헤아르사원을 둘러싼 지역은 영토분쟁대상이 됐다. 분쟁의 또다른 직접적원인으로 태국총리를 배출한 친나왓가문과 캄보디아 훈센가문사이의 갈등격화를 들고있다. 한정세분석가는 태국·캄보디아분쟁이 아세안의 중요교차점에서의, 브릭스내에서의 갈등이자 지리·경제적으로 중국과 밀접한 두나라간 충돌이라는점에 주목하고있다. 두나라는 브릭스가입국은 아니지만 태국은 브릭스파트너국이다. 상반기 3건의 교전은 제국주의세력의 반제진영포위전략인 <U>형전략의 중요화점들에서 발생했다. 전쟁의 불길은 동아시아를 향하고있다.

제국주의호전세력의 3차세계대전·<신냉전>전략에 맞서 반제진영은 3차세계대전을 반제전쟁으로 전화시키며 승리를 향해 나아가고있다. 전쟁은 혁명의 전야이자 공고한 평화의 전야다. 반제진영은 3차세계대전에서 제국주의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키며 세계자주화위업과 공고한평화실현의 위업을 반드시 달성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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