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제는 베네치아·피렌체등 이탈리아도시국가들에서 일부 나타났다가 중세시대의 왕권 또는 교권의 약화와 함께 군주제를 대체하는 정치체제로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와 함께 다시 역사무대에 등장했다. 이탈리아의 마키아벨리, 영국의 공상적사회주의자 모어·깜빠넬라등은 공화제에 주목했다. 원래 마키아벨리는 군주제의 절대적인 지지자였지만 신흥부르주아세력이 등장하면서 그들의 의사와 요구를 반영한 공화제를 들고나왔다. 마키아벨리는 통치형태를 군주제와 공화제로 구분하고 공화제는 자체내에 민주제와 귀족제를 결합시키고있다면서 공화제야말로 주권조직과 실현에서 합리적인 통치형태라고 주장했다. 한편 18세기 네덜란드의 스피노자는 절대군주제를 반대하고 군주의 권력제한을 제기했다. 영국의 로크는 <주권재민설>에서 인민이 자산계급임을 명백히 하면서 국가권력의 분권을 주장했다. 권력분립론은 프랑스의 몽테스키외에 의해 3권분립으로 구체화됐다. 이는 부르주아혁명시기 자본주의정치형태수립에 결정적영향을 끼쳐 부르주아공화제는 3권분립하의 공화제로 됐다. 프랑스혁명에는 프랑스계몽주의사상 특히 루소의 <사회계약론>(1762)이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사유재산·불평등은 국가의 발생에 앞섰으며 인민들의 계약에 의해 국가가 발생, 그들의 <일반의사>에 따라 국가의 주권이 행사돼야한다는 루소의 사상은 신학적국가기원론과 봉건절대주의를 타격했다. 루소는 사적소유의 규모를 제한할것을 주장하고 빈부의 양극단을 조절하는것이 입법자의 과업이라고 여겼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호베스피에흐등에 의해 프랑스혁명의 지도적인 정치이론으로 됐으며 여러나라의 부르주아자유민권이론에 큰영향을 줬다. 18세기말 프랑스혁명에서 혁명세력은 자산자격제가 없는 선거에 의한 국민공회를 수립했고 공화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곧 공화정은 붕괴됐고 나폴레옹의 제정으로 이행됐다. 혁명에 대한 이해관계가 가장 절실한 세력은 기층민들이었고 혁명의 중심에 항상 기층민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혁명을 영도하지못했다. 그들에게는 혁명을 영도할 사상이론적무기가 없었다. 혁명의 영도세력이었던 부르주아들의 혁명에 대한 불철저성은 혁명의 전진을 가로막았다. 영국의 부르주아들은 신귀족과 동맹했으며 프랑스부르주아들은 나폴레옹의 등장을 막지못했다. 프랑스에서는 1848 2공화정을 수립하지만 다시 제정이 등장했고 인류역사상 첫프롤레타리아정권인 파리코뮌을 파괴한 부르주아세력에 의해 프랑스3공화국이 건설됐다. 3공화국은 1930년대 인민전선을 마지막으로 나치독일에 의해 무너졌다. 나치로부터의 해방을 이끈 레지스탕스전국평의회가 주축이 돼 4공화국이 수립됐다. 의원내각제의 4공화국은 인도차이나전쟁의 패배와 알제리독립전쟁등 프랑스제국주의의 위기속에 나폴레옹제정이 연상되는 대통령중심제의 5공화국으로 변질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