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5 항쟁의기관차〉 정치권·경제권을 둘러싼 딥스와 반딥스의 사활적쟁투

영지배계급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전쟁

딥스(딥스테이트 Deep State)로 불리는 미국의 실제주인이자 <그림자정부>는 미국민을 채무노예로 전락시키고 정치·경제적권리를 독점한채 오늘에 이르렀다. 금융자본집단을 핵심으로 한 미국의 기형적인 사회체제하에서 정계·학계·문화계등의 주류세력은 금융자본집단의 사환꾼으로 전락했다. 금융자본집단은 미국을 숙주로 삼기 위한 과정을 계획적이며 단계적으로 밟아왔고 이를 경계한 세력들은 공화주의·애국주의기치아래 딥스세력과 투쟁을 벌여왔다. 

1620 영국내 종교적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대륙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은 종교적이상사회를 미국에 건설하려고 했다. 청교도들은 대륙에 도착하기전 메이플라워협약을 통해 <영국왕에충성>·<신대륙에식민지건설>·<자치사회건설해질서·안전지킬것>·<평등한법률을만들어지킬것>을 맹세했다. 맹세에서 보여지듯 초기정착민은 영국민이라는 자의식이 있었다. 1754 프렌치인디언전쟁에서 미국민이 영국의 편에서 싸운 사실은 이런 성격을 보여준다. 반면 전쟁결과 1억3000만파운드의 부채를 지게 된 영정부는 미국민에 대한 경제적착취로 부채를 해결하려했다. 

영국의 막대한 부채로 영정부의 운명은 금융재벌의 손에 떨어졌다. 이미 1689 금융세력은 영국왕에 오른 오렌지공 윌리엄에게 125만파운드를 빌려주고 영국은행칙허를 받으며 영중앙은행을 장악함으로써 영국의 실질적인 주인이 됐다. 화폐독점권을 갖고 화폐발행의 대가로 영국민의 직접세로 이자·원금을 받음으로써 영국경제를 집어삼킨 금융세력은 아메리카대륙으로의 진출을 호시탐탐 노렸다. 반면 미국민들은 영국과의 불평등무역구조로 대량의 금·은화폐가 영국으로 유입돼 통화부족상태에 이르자 원시화폐를 사용해 상품거래를 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1690 식민지지방정부차원에서 정부신용표준화폐를 발행함으로써 영국과는 다른 방식의 화폐발행체계를 창조했고 그결과 미경제가 활성화됐다. 이에 대해 미<건국의아버지>중 한명인 벤자민프랭클린은 <상업과공업의필요에따라동등한비율의화폐를발행하면상품이생산에서소비자에게쉽게이동된다>·<정부는누구에게도이자를지급할필요가없다>고 언급했다. 영국민의 세금을 담보로 화폐를 발행하던 방식대로 미국민을 착취하려고 한 영금융재벌은 독자적인 화폐발행시스템에 의해 자립하고있는 미국경제에 타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명분은 1754 전쟁부채를 해소하기 위한것이었다. 영금융재벌의 조종을 받는 영의회는 1764 통화조례를 통과시켰다. 미식민지각지의 화폐발행행위를 금지하고 영정부에 황금·백은으로만 세금을 납부하는 법안이었다. 영정부는 그외 세금인상을 위해 1764 설탕법, 1765 인지세법등을 제정했다. 그결과 영정부는 미국으로부터 1763이전보다 매년 10배가 넘는 세입을 거둬들였다.

프랭클린은 <만약영국은행이식민지의화폐발행권을박탈하지않았다면식민지시민은기꺼이차와기타상품으로남은소량의세금을냈을것이다.이법안으로실업과불만이초래됐다.자신의화폐를발행하는것이불가능해진식민지는국왕조지3세와국제은행가들의통제에서영원히벗어날수없게됐다.이는미국에서독립전쟁이발발하게된가장중요한원인이다.>라고 분석했다. 

1765 버지니아하원의원 패트릭헨리는 <아메리카인은영국인과동일한권리를갖고있으며특히식민지대표만이유일하게식민지인에게과세할권리가있다>·<버지니아인은버지니아의회의동의를받지않은세금을납부해선안되며영의회가버지니아인에게세금을부과할권리가있다고주장하는사람은누구든식민지의적으로간주한다>는 내용의 <버지니아결의>를 발표했다. 같은해 여름에는 인지세법에 항거한 민중봉기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중 보스턴에서의 봉기가 가장 규모가 컸다. 그럼에도 영재무상 찰스타운센트는 1767 미국민이 아메리카주둔영국군에게 숙박을 제공해야하는 반란법을 따를때까지 뉴욕의회를 해산시키고 영국에서 식민지로 수입되는 흑연·페인트·종이·차등에 타운센트관세를 부과했다. 뿐만아니라 관세청을 설치하며 미국민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1770 보스턴학살, 1771 노스캐롤라이나소규모내란등 영정부의 부당한 세금정책에 대항한 미국민의 투쟁은 독립전쟁의 일환이자 의도를 떠나 그자체로 영금융세력에 대한 저항이었다. 독립정신이자 공화국정신은 1776 토머스페인의 소책자<상식>을 통해 정리됐다. 

1776 대륙회의는 <식민지연합은자유롭고독립된나라가돼야하며또그렇게될권리가있다.영국왕에대한모든의무에서벗어날것이고식민지연합과대영제국이맺고있던모든정치적관계는완전히해체될것이며그렇게돼야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여러지역에서 수개월간 최소90가지 다른 형태의 <독립선언서>들이 발표됐고 이를 종합해 토머스제퍼슨은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대륙회의는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대륙지폐를 발행했다. 대륙지폐는 아무런 담보없이 인쇄돼 전쟁초기에는 1200만달러였던 통화량이 종전무렵에는 5억달러에 육박했다. 화폐가치는 은과 액면가대비 1대1에서 1781 168대1로 폭락했다. 각각의 주도 자체적으로 화폐를 발행했다. 대륙지폐가 유명무실해지자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결국 금융세력에게 빚을 졌다. 이는 건국후 1미국은행설립의 중요한 이유가 된다. 

미국은행의 운명을 둘러싼 대결

1784~87까지 전후경기불황이 계속됐다. 화폐공급문제와 막대한 부채를 해소할 능력과 세금징수권한이 없었던 연방정부는 주에만 세금을 청구해 문제를 극복하려했다. 주정부 역시 전쟁부채가 있었고 이를 세금인상으로 해결하려했다. 독립전쟁당시 군인이었던 농민들은 세금인상이 아닌 화폐발행으로 부채를 해결하라고 ??구했?$?. 농뉼에 대한 과)??와 ?t?에 딬륺 착???는 결국 <셰이즈의봉기>로 이어졌다. 대륙군대령이었던 대니얼셰이즈는 화폐발행·세금경감·채무지불연기·채무로인한수감폐지등을 요구했다. <셰이즈의봉기>는 헌법제정과 연방정부강화로 이어졌다.

연방정부강화를 촉구했던 정치세력의 핵심에 알렉산더해밀턴이 있다. 워싱턴정부의 재무장관인 해밀턴은 <엘리트지배계급>에 의한 통치를 강조했다. 특히 기존의 정부부채를 장기공채화하고 독립전쟁기간 각주가 진 부채를 연방정부가 모두 책임져야한다고 주장했다. 여러채권증서를 수익채권으로 전환시켜야한다고 한 해밀턴의 주장은 채권소지자인 금융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는것이었으며 필연적으로 엄청난 재정난을 초래했다. 뿐만아니라 소비세·관세법제정으로 제조업자·채권자등 부르주아세력에게는 이득이, 소규모자작농을 비롯한 미국민에게는 세금부담이 가중됐다. 해밀턴은 영국은행을 본따 1미국은행을 창설함으로써 금융세력이 미경제를 장악할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해밀턴이 금융자본집단의 중심인 로스차일드가와 밀접했다는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791 1미국은행은 개인80%·정부20%소유의 20년만기로 설립됐다. 

제퍼슨의 <만약미국인이끝까지민간은행으로하여금국가의화폐발행을통제하도록둔다면이들은행은먼저통화팽창을이용하고이어서통화긴축정책으로국민의재산을박탈할것이다.이런행위는어느날아침그들의손자들이자기의터전과선조가개척한땅을잃어버렸다는사실을깨달을때까지계속될것이다.>는 경고는 오늘날 현실화됐다. 제퍼슨정부하에 1미국은행연장안은 부결됐다. 제퍼슨은 1802 모든 내국세를 폐지하고 관세·서부지역토지판매만 연방정부세입의 원천으로 삼으며 미국민의 세금부담을 경감시켰다. 정부지출을 과감하게 축소한 결과 국가부채를 8300만달러에서 4500만달러로 줄일수 있었다.

1812 영미전쟁이 발발했다. 영미전쟁은 로스차일드가에 의해 예고된 전쟁이었다. 3년간 지속된 전쟁결과 해상운송·금융분야에 혼란이 야기됐다. 미정부의 부채는 4500만달러에서 1억2700만달러로 증가했다. 매디슨정부는 1815.12 2미국은행설립을 승인함으로써 금융세력에 굴복했다. 2미국은행은 총주식3500만달러에 1미국은행과 같이 개인80%·정부20%소유의 20년만기로 설립됐다. 2미국은행은 주은행의 화폐발행자체는 막을수 없었지만 그규모와 경제적영향력을 이용해 표준화폐만 발행하도록 주은행을 강제하거나 파산시킬수 있었다. 

1819 경제공황은 2미국은행·금융세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작됐다. 1800~04 미서부 토지투기붐을 타고 토지가격이 상승했는데 토지법에 따라 연방정부·주은행·부실은행등에서 투기목적의 대출을 남발했다. 1819 2미국은행은 갑자기 대출을 축소하고 대출금을 회수했으며 저당물을 처분하기 시작했다. 그결과 주은행이 잇달아 파산하며 금융공황이 발생했고 그에 따른 이익은 고스란히 2미국은행·금융세력이 독점했다. 

이시기 연방대법원의 판결은 금융세력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쳤는지 확인할수 있다. 1801~35 미국연방대법원장 존마샬은 행정부·입법부를 희생시켜 사법부를 강화하고 주정부를 희생시켜 연방정부를 강화했다. 특히 부르주아계급의 이익에 복무했다. 마샬은 1819 <매컬로크대메릴랜드>사건을 통해 미국은행의 <합헌성>을 확인시켜줬다. 미남부·서부의 여러주가 미국은행지점을 파산시키려는데서 시작된 이사건에서 마샬은 미은행측변호인단중 1명인 대니얼웹스터의 <만약주가미국은행에과세할수있다면은행이파산할때까지과세할것이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미국은행의 손을 들어줬다. 주정부의 미국은행지점파산시도배경은 미국민중의 미국은행에 대한 불신과 분노며 마샬의 판결은 사법부까지 금융세력에 의해 장악된 현실을 보여준다.

1824미대선은 앤드류잭슨이 선거인단표수·일반투표수에서 모두 1위를 했음에도 과반수이상획득에 실패하면서 2위였던 존퀀시아담스가 미하원의 표결에 의해 대통령에 선출되며 논란이 됐다. 아담스가 해밀턴주의자며 잭슨은 제퍼슨적이론을 추구했다는 사실은 1824대선의 문제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하게 한다. 

1824대선때는 유권자가 전체백인성인남성의 27%가 안됐으나 1828대선때는 58%에 이르렀다. 1828 잭슨의 당선은 백인성인남성의 선거권확대의 영향을 받았으며 농업중심의 남부·서부개척지에서의 강력한 지지를 기반으로 했다. 잭슨파는 반귀족적이며 반해밀턴주의적이었다. 그렇기에 금융자본집단의 독점화를 두려워하던 소규모은행가·사업가와 채무자·하층민이 강력히 지지했다. 잭슨파는 대선승리를 1800 제퍼슨의 승리와 마찬가지로 완벽하면서도 중요한 승리라고 생각했다. 다시 한번 특권층을 미정부에서 몰아냈으며 민주적인 승리자가 백악관을 차지하게 됐다고 여겼다. 이들은 <새로운민주주의의시대>·<보통사람의시대>에 들어섰다고 주장했다. 

1832 잭슨은 2미국은행을 연장하지않을것을 분명히 하며 재선에 성공했다. 은행장 니콜라스비들은 연방의회를 포섭하기 위해 <대출호의>를 베풀었으며 1832 연방의회는 재인가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거부권을 행사한 잭슨정부는 2미국은행에서 정부지분을 인출해 각주은행으로 송금했다. 비들은 신용대출을 지나치게 제한하며 잭슨정부를 압박했다. 1833~34사이겨울 금융상황이 악화되자 미국은행지지자들이 잭슨에게 미국은행재인허를 촉구했다. 잭슨은 경제위기의 책임을 비들에게 돌리며 재인허를 거부했다. 1835.1 잭슨은 마지막부채를 상환했는데 그러고도 국고에 수천만달러의 잉여금을 남겼다. 

1837 시작된 경제공황은 영금융자본집단에 의해 조작된 통화부족으로 인해 발생했다. 은행가 헨리클루스는 1837공황이 2미국은행면허만료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클루스는 <1837금융공황을악화시킨것은영국은행이었다.영국은행은미국과관련된증서를하루안에모조리팔아치웠다.>고 밝혔다. 

잭슨의 후임인 마틴밴뷰런은 독립재무제도를 통해 재무부에서 화폐를 관리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타개하려고 했다. 잭슨의 정적이자 금융자본집단의 편인 헨리클레이는 휘그당을 결성해 잭슨의 은행정책을 결사적으로 반대했으며 중앙은행을 부활시키려했다. 

미국은행부활에 부정적이었던 휘그당출신 대통령 헨리해리슨은 의문사했다. 그후임인 존타일러가 1841 미국은행부활·독립재무제도폐지를 부결하자 휘그당은 타일러를 제명했다. 이어 당선된 재커리테일러도 미국은행부활을 거부했고 이후 비상중독으로 사망했다. 

영원히 상환할수 없는 채무와 미국민의 운명

남북전쟁의 주요원인은 노예제폐지문제로 알려져있지만 직접적으로는 북부공업중심과 남부대농장중심의 산업체제의 차이와 함께 금융자본집단의 이간책에 의한것이었다. 독일수상 비스마르크는 <미국을남부와북부두약세연방으로분열시키는것은유럽의금융세력이남북전쟁이발발하기전부터오랜시간치밀하게준비해온시나리오였다>고 증언했다. 영정치인·백작이자 유대인인 벤저민디즈레일리는 로스차일드가의 결혼식에서 <합중국을2개로나눠>라고 언급했다. 금융자본집단은 영국·프랑스·스페인을 동원해 북부에 군사적긴장을 높이며 링컨정부를 압박했다. 그러면서 링컨에게 24~36%의 고금리융자방안을 제시했다. 링컨은 정부화폐인 그린백과 공채발행을 통해 전비를 마련했다. 링컨의 재정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영정부와 뉴욕은행협회는 1861.12 링컨정부에 금속화폐지급을 정지한다고 선포했으며 금으로 정부채권을 매입한다는 약속도 철회했다. 

1863 국립은행법이 제정됐다. 이법안은 정부가 은행에 그린백과 같은 은행권발행권한을 준다는것이다. 기존은행이든 새로 설립된 은행이든 자본이 충분하고 그자본의 1/3을 공채에 투자하면 이체계에 합류할수 있었다. 은행은 실질적으로 미국가화폐를 발행하게 됐는데 은행이 미정부채권을 은행권발행준비금으로 삼아 화폐발행과 미정부채무를 연동시킴으로써 영구적으로 채무를 상환할수 없게 했다. 

금융자본집단은 1863 국립은행법지지를 위한 해저드버킹회보를 미은행가에게 배포했다. 회보를 통해 <그린백이라불리는정부발행지폐를어떠한기간도통화로유통시켜서는안된다.우리들이그것을관리할수없기때문이다.그러나국채라면관리가가능하고그것을통해은행문제를통제할수있다.>고 단언했다. 링컨정부재무장관 살몬체이스는 <우리재무부가국립은행법의통과를추진하려고진력한것은재정상범한내평생최대의잘못이었다.국립은행법은독점을강화했다.그덕분에우리나라의모든이해에영향을미치고있다.이법은마땅히폐지돼야하지만그것을달성하기위해서는국민전체를정부쪽에붙게하고은행과싸워야만한다.이나라에서는전례없는싸움이될것이다.>라고 한탄했다. 링컨은 1865 연임성공후 이법안을 폐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불과 41일만에 암살됐다. 

링컨사후 전후경제회복을 해야하는 시기임에도 1866 통화긴축법안이 통과됐다. 그결과 통화유통량이 18억달러에서 1867 13억달러로, 1876 6억달러, 1886 4억달러로 줄었다. 1873 통과된 화폐주조법은 은화를 화폐에서 배제하고 금화를 유일한 기축화폐로 삼는 법안이었다. 이해 대불황으로 인해 미국내 실업률은 30%가 치솟았다. 그럼에도 1875 미의회는 태환법을 통과시켰다. 이법에 따라 1879.1.1을 기해 그린백을 회수하고 금가격을 안정시켜 새증권을 대체해주겠다고 고시했다. 금에 기초한 화폐는 쉽게 공급량을 늘릴수 없어 당시 철저히 채권자·금융자본집단의 이익을 보장했다. 미국민들은 백은위원회·그린백당을 조직해 금은복본위제회복과 그린백재발행을 촉구했다. 

1881 취임한 제임스가필드대통령은 금융자본집단이 요구하는 법안들에 대한 서명을 거부했으며 <한나라의통화량을조절하는자가공업과상업의절대적지배자>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1881.7.2 찰스기토에 피습을 당해 사망했다.

1880년대초 경제위기는 농민의 토지를 겨냥한것이었다. 농산물가격폭락으로 600만명이 넘는 농민들이 파산직전에 놓였으며 그결과 1890년대 미농토의 27%, 1910에는 33%가 저당잡혔다. 농민들은 신용을 통제하며 대출금이자율을 멋대로 조종하는 미은행에 분노했다. 이자율은 10%에서 25%까지 달했으며 대출금상환시기에 농산물가격하락·화폐부족문제가 발생해 땅을 빼앗겼다. 농산물가격하락의 원인은 은행·주정부가 결탁해 가격을 고정함으로써 농민에게 손해를 입히고 그대가로 이익을 추구했기때문이다. 또 제조업자의 편에서 저농산물가·고공산품가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이같은 문제는 1890년대 전국적인 대규모 정치운동으로 표출됐다.

1875 농민동맹이 결성됐다. 농민동맹은 극소수거대기업과 금융자본집단에 권력이 집중되는 현실을 규탄하며 1880년대말 전국적인 정치조직으로 발전했다. 1890 중간선거에서 농민동맹이 지지한 후보가 12개주입법부를 부분적 혹은 완전히 장악했다. 농민동맹성원들은 제3당결성계획을 갖고 1892.7 1300명의 대표가 모여 인민당(People’s Party)을 결성했다. 인민당은 중앙은행폐지·부재지주제종식·상원의원직선제·민중정치참여확대·철도등에대한규제및공영화·은의재통용등을 주장했다. 일부 인민당성원들은 공개적으로 반유대주의를 표방했다. 

한편 일각에서는 남북전쟁후 재정난에 시달리던 미의회가 법인<워싱턴DC주식회사>이름으로 1871 교황청으로부터 차관을 대부받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말하고있다. <워싱턴DC주식회사>는 교황청의 요구에 따라 만들어진것으로 추정되며 1871 헌법개정을 통해 헌법권한이 법인으로 이전됐다. 그로인해 미국민들은 워싱턴DC법인의 자산으로 편입됐으며 미국민의 권리는 박탈됐다. 교황청의 재산관리는 <런던>은행이 맡고있고 워싱턴DC가 <런던>은행을 통해 차관을 받으면서 영금융자본집단에게로 천문학적인 액수의 미국민의 세금이 유출됐으며 미국은 채무불이행상태에 빠져 파산했다고 주장하고있다.

독점의 가속화와 연방은행의 설립

1830년대부터 각주들에서 <주식회사법>을 통과시킨 결과 기업규모가 확대되고 독점화가 가속화됐다. 앤드류카네기는 1873 피츠버그에 제철소를 설립했으며 곧 철강산업을 지배했다. 카네기는 주식을 팔아서 막대한 기업인수자금을 조달했는데 1901 4억5000만달러에 존피어폰트모건에게 회사를 매각했다. 모건은 여러기업을 합병해 유에스철강회사를 설립했다. 140억달러짜리 이회사는 미강철생산량의 2/3를 통제했다. 존록펠러는 1870 오하이오주에 스탠더드정유회사를 창립한후 수년만에 피츠버그·필라델피아·뉴욕·볼티모어에 있는 공장과 클리블랜드에 있는 25개정유공장중 20개를 장악하며 공격적으로 독점화했다. 뿐만아니라 자체적인 석유통제조공장·화물창고·송유관을 건설하며 1880년대 이미 독점의 대표적상징으로 악명높았다. 독점화의 결과 19세기말경 미국내기업1%가 미제조업의 33%이상을 통제할수 있었으며 1%는 모건과 같은 뉴욕은행가나 록펠러와 같은 산업거부들이었다. 모건·록펠러는 미금융·산업자본을 빠르게 장악해 들어갔다. 미연방정부·주정부의 법적·제도적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07금융위기의 목적은 미중앙은행설립을 위한 명분마련과 소규모금융기업을 도산시켜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에서 3번째로 큰 니커보커신탁회사의 파산소문에 투자자들의 인출요구가 쇄도했고 그결과 투신사들이 증권시장에 돈을 빌리면서 대출금리가 150%까지 치솟았다. 금융자본집단의 일원인 모건이 <해결사>로 등장했지만 긴급구조자금은 하루만에 바닥나고 금리폭등으로 8개은행·투신사가 도산했다. 모건은 금융위기를 틈타 테네시강철강회사지분을 가지고있는 무어·실리사를 구제함으로써 테네시강철강회사채권을 독점하려고 했다. 시어도어루즈벨트대통령은 이를 승인함으로써 모건·금융자본집단의 손을 들어줬다. 

심화되는 독점화현상과 그로인한 미노동자의 파업·투쟁은 미정부를 압박했다. 1890.7 상·하원은 거의 반대없이 셔먼트러스트금지법을 통과시켰다. 독점금지법안이었으나 상징적조치였으며 법원에 의해 꾸준히 약화돼 통과된지 10년이 지나도록 독점기업에 아무런 충격을 주지않았다. 1901 법무부는 노조에 대해서는 트러스트금지소송을 많이 제기했으나 기업연합에 대해서는 14건만 제기했으며 유죄인정은 극히 드물었다. 

같은해 통과된 셔먼은매입법은 정부가 은을 매입해 대신 금으로 대가를 지불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많은 미국민이 은에 대한 통화유통중지가 금융자본집단에 의한것임을 깨닫고 이사건을 <1873범죄>라고 칭하고있었다. 셔먼은매입법은 금은복본위제로의 회귀를 요구하는 미국민을 개량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조차도 블랜드대통령2번째임기초 의회가 대통령의 요구에 부응해 법안을 폐기했다. 

1896 대선은 은화를 둘러싼 정치세력간의 대결로 치러졌다. 민주당하원의원 윌리엄제닝스브라이언은 유명한 <황금십자가연설>을 통해 <임금노동자가우리를지지하는한우리는이렇게말하는것으로금본위제에대한그들의요구에답하고자한다.<당신들은가시면류관을노동자의이마에씌울수없으며황금십자가에인류를못박을수없을것>이라고말이다.>라고 일갈했다. 금융자본집단은 막대한 자금을 공화당선거운동에 기부했고 그결과 공화당 윌리엄매킨리가 당선됐다. 

금본위제를 달성한 금융자본집단은 법정화폐체제로의 전환을 모색했다. 화폐발행권이 금융자본집단에게 있는한 무한대로 화폐를 찍어내며 인플레이션을 조장함으로써 민중의 자산을 약탈할수 있었다. 영경제학자 존케인즈는 <이방법을이용해눈에띄지않게국민의재산을몰수할수있다.100만명가운데한사람도이러한절도행위를발견해내기어렵다.>고 말했다. 

1913 연방준비은행법안이 통과됐다. 연방준비은행법통과를 위해 금융자본집단은 공화당상원의원 넬슨올드리치가 발의한 올드리치법안과 민주당의 B프로젝트를 동시에 추진했다. 올드리치는 대표적인 금융자본집단의 하수인으로 그의 딸 애비올드리치는 존록펠러주니어의 아내다. 모건·록펠러별장이 있는 지킬섬에서 연방은행(FRB·Fed)을 준비해온 금융자본집단은 뉴욕으로 돌아와 올드리치법안에 대한 선전운동을 전국적으로 펼쳤다. 프린스턴·하버드대학과 록펠러가 5000만달러를 기부한 시카고대학이 이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전국은행들은 500만달러자금을 동원해 이작업에 가세했다. 당시 뉴저지주지사·프린스턴대학전총장 우드로윌슨이 올드리치법안의 대변인으로 지명됐다. 윌슨은 <모건처럼봉사정신이투철한사람6~7명을임명해위원회를구성하고거기에미국의문제를다룬다면모든문제를예방할수있다>고 공언했다. 미하원의원 린드버그는 올드리치법안에 대해 <금융트러스트를위한계획>·<월스트리트법안>·<정부에대한금융트러스트권력자들의전반적도전>이라고 비판했다. 

민주당은 올드리치법안을 비난하며 민주당의 연방은행법이 독점구조타파를 위한 취지에서 심화됐다며 상호제약·분권분립체제가 완벽한 중앙은행시스템을 세워야한다고 주장했다. 올드리치법안에 대한 미국민의 반감은 높아졌으며 반대급부로 금융자본집단을 위한 법안이라는 본질을 가린 B프로젝트에 대한 호감이 상승했다. 

1913.6 윌슨정부하에 버지니아하원의원·은행가 카터글래스가 B프로젝트 즉, 연방은행법을 하원의회에 부쳤다. 9월 표결결과 287대85로 통과됐다. 상원에서 글래스·오언제안으로 이름이 바꼈는데 상원의원 로버트오언역시 은행가였다. 연방은행법은 40군데의 법안수정을 단 3일만에 졸속으로 수정한채 통과됐다. 린드버그는 <금권은최종적으로의회를통제할수있다.우리상원의원과하원의원들이의회를속이지않으면월가는우리를속일수없다.>·<의회가저지른최대의범죄는바로화폐체제법안인연방준비은행법이다.이은행법의통과는우리시대가장악랄한입법범죄다.>라고 일갈했다.

윌슨정부는 이미 독점화가 어느정도 완료된 금융자본집단·독점자본의 해외진출을 위해 언더우드·시먼스관세법을 통과시켜 보호관세율을 낮췄다. 그리고 세수를 보전하기 위한 명목으로 누진소득세를 승인함으로써 미국민에 대한 착취구조를 더욱 심화시켰다. 

1·2차세계대전과 금융자본집단

1차세계대전은 미금융자본집단이 영국·프랑스등 연합국측에 천문학적인 액수의 신용대출을 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확산됐고 전쟁참상은 심화됐다. 미국은 중립국을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연합국의 재정을 담당하고있었을뿐만아니라 군수공장노릇을 했다. 윌슨정부는 전쟁이 끝날때까지 전쟁관련비용으로 320억달러를 책정했다. 1915이전 연방정부총예산이 10억달러를 넘는 경우가 드물었고 미국민총생산이 1910 350억달러였다는 사실은 320억달러의 규모를 확인시켜준다. 윌슨은 자유국채판매로 미국민으로부터 차입활성화운동을 개시해 1920까지 230억달러를 판매했고 100억달러가까이를 과세했다. 1917 전시산업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는 정부가 군수품구매조정을 위해 만든 기구였다. 위원회는 금융자본집단의 일원인 버나드바루크에 의해 관리됐다. 월슨정부는 1917 방첩법, 1918 태업법·선동방지법을 제정함으로써 금융자본집단·독점기업을 규탄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여론을 원천봉쇄하는 한편, 왜곡된 애국심에 호소하며 민중을 전쟁·전시생산으로 내몰았다. 법이 겨냥한 세력은 사회당·세계산업노동자동맹과 같은 반자본주의조직들이었다. 사회당 유진데브스는 1918 10년형을 선고받았고 세계산업노동자동맹원의 다수가 기소됐다. 이해 1만1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정부·전쟁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전쟁은 물자소모속도를 가속화하고 전시경제는 빠르게 돌아간다. 전쟁은 한번 시작하면 중단할수 없기에 엄청난 경제적대가를 치르면서도 금융자본집단에 손을 벌리게 된다. 전쟁이야말로 금융자본집단과 그하수인들에게는 호재중의 호재다.

전후 초인플레이션은 전시경제의 대가인 미국민의 얼마 안되는 자산을 빨아들이며 금융자본집단·독점세력에게 부를 집중시켰다. 1919~20 물가상승률은 연평균 15%이상이었다. 반면 1920~21 국민총생산은 10% 감소했고 10만에 이르는 기업이 파산했으며 500여만명의 미국민이 해고됐다. 분노한 민중들은 시애틀·보스턴등에서 대규모파업을 전개했으며 중서부도시에서는 35만명의 제철산업노동자가 8시간노동제·노동조합인정을 내세우며 장기파업을 전개했다. 독점자본세력은 공장을 비조합노동자들로 운영하려했고 금융자본집단에 의해 장악돼있는 언론은 파업을 왜곡보도했다. 특히 개량화된 미국노동총동맹도 파업노동자들을 비난했다. 정부는 민중투쟁을 가로막고 미국민의 분노를 왜곡하기 위한 목적으로 <적색공포>상황을 조작했으며 30여개주는 <평화시선동방지법>을 통과시키며 변혁적목소리를 가로막았다. 훗날 최장기FBI(미연방수사국)국장으로 악명높은 에드거후버는 이시기 법무장관의 보좌역으로 있으면서 6000명이상을 체포, 파쇼적탄압을 확대했다.

1929공황의 원인은 미경제학자 밀턴프리드먼의 <연방은행은1929~33통화유통량의1/3을감축했으며그결과경제대공황을몰고왔다>는 말에서 확인된다. 시작은 뉴욕연방은행이 금리를 4%에서 3.5%로 인하하고 1928 한해에만 600억달러의 통화를 회원은행에 방출하면서부터다. 뉴욕연방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린 은행들은 12%의 금리로 증권업체에 대출을 해주면서 차액을 챙겼다. 뉴욕증시가 폭등했으며 정가·월가는 미국민을 선동해 증권투기로 내몰았다. 1929.8 연준은 금리를 6%로 인상했고 뉴욕연방은행은 금리를 20%로 인상했다. 10월부터 2달간 엄청난 투매로 1600억달러재산이 순식간에 금융자본집단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1930~33 9000개가 넘는 은행이 도산·폐업했다. 총통화공급이 1/3이상 감소했으며 구매력감소·물가하락이 동반됐다. 국민총생산은 1929 1040억달러에서 1932 764억달러로 25% 감소했다. 1932 미노동자의 최소 25%가 실업상태였다. 1930년대말까지 실업률은 거의 평균 20%를 유지했으며 고용노동자의 1/3은 불완전고용상태에 있었다. 농가소득또한 1929~32사이 60%나 감소했고 미전체농민의 1/3이 토지를 잃었다.

1932대선결과 프랭클린루즈벨트가 당선됐다. 루즈벨트는 당선되고 얼마후 긴급은행법을 발의해 거대은행을 우선 구제했다. 그결과 연방은행에 속해있던 은행의 3/4이 영업을 재개했고 10억달러에 달하는 자금이 은행에 유입됐다. 루즈벨트정부는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테네시계곡개발공사·연방긴급구호청·토목사업청·민간자원보존단등을 만들었지만 경기부양에는 실패했다. 특히 1933 프레이져·렘키농장파산법을 시행했음에도 1934 미농장소유자중 25%가 토지를 잃었다. 뉴딜에 대한 비판은 좌우를 막론하고 격렬했다. 그중 라디오설교로 유명해진 카톨릭신부 찰스커글린은 금융개혁으로 은화재주조·그린백발행·은행국유화를 주장하며 1935 <사회정의를위한전국연합>을 조직했다. 루이지애나주출신 상원의원 휴이롱은 은행·정유회사·전력회사·보수과두정치간의 결탁관계를 맹렬히 공격했다. <부를공유하자>계획을 주창하며 자본가재산몰수와 부의 재분배를 주장했으며 전국적으로 <부의공유를위한모임>을 조직했다. 롱은 1935.9 루이지애나의사당에서 암살됐다. 유력대선후보였던 롱의 사망후 이들세력은 연합해 통일당(Union Party)을 조직했으나 결국 루즈벨트를 꺾지못했다.

산업생산자수가 1937.8 117에서 1938.5 76으로 떨어지고 이기간 400만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다. 이런 경제적문제는 2차세계대전에 따른 전시경제로 어느정도 극복된다.

독일·이탈리아·일본의 군비증강·파시즘대두로 전쟁위기는 고조되고있었다. 미국은 1935 중립법을 제정해 무기수출금지조항을 제정했다. 1937에는 <현금주고실어가기>정책에 따라 교전중인 국가는 미국으로부터 오직 비군수품만을 현금으로 구입할수 있었다. 금융자본집단·산군복합체의 이해와 상충되는 이법안은 전쟁이 본격화된 1939.9 루즈벨트의 중립법개정요구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루즈벨트는 전쟁에 참가하고있는 모든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무기수출금지조항을 삭제해달라고 의회에 요청했으며 <현금주고실어가기>조건으로 교전국이 무기를 구입할수 있게 했다. 나아가 영국을 지원하기 위해 <무기대여>법안까지 통과시켰다. 미국의 이같은 조치는 2차세계대전의 확전을 군사적으로 뒷받침했다.

1941~45 전시기간 연방정부는 총3210억달러를 지출했다. 이는 정부수립이후 150년간 지출한 비용의 약2배이며 1차세계대전에 투입한 비용의 10배에 해당했다. 미국가채무는 1941 490억달러에서 1945 2590억달러로 증가했다. 필요한 수입의 절반은 1000억달러에 이르는 채권을 판매해 차용하거나 1942 소득세법을 통해 소득세율을 급격히 올려 마련했다. 달러지출·국가채무·고율소득세 모두 미국민의 재산을 착취하고 금융자본집단·독점기업에 부를 집중시키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종전직전인 1944 금융자본집단은 브레튼우즈협정을 체결한다. 금융자본집단은 금본위제를 약화시키기 위해 미국내 유통·교환되는 금화를 폐지하고 세계적으로 금의 화폐기능을 없애려했다. 브레튼우즈협정의 결과 달러환전시스템이 완성되면서 금의 화폐기능이 약화됐다. 금은복본위제에서 금본위제로, 금본위제약화에서 금본위제폐지로 가기 위한 수순은 1971 닉슨대통령에 의해 금본위제가 폐지되며 완료된다. 

달러의 추락과 반딥스세력의 반격

전후 노동자·민중이 쌓아온 부를 약탈하기 위한 시도는 인플레이션방식으로 감행됐다. 이시기 물가는 매년 14~15% 증가했다. 그럼에도 신용카드발달·외상계정·할부금계획등으로 1945~57 소비자신용이 800% 증가했고 소비재의 소비가 촉진됐다. 소비자신용의 본질은 미래의 부를 앞당겨 쓰는것이며 그신용을 결정하는 주체가 금융세력이라는 점은 금융자본집단이 경제권을 완전장악한 후 다양한 방식으로 착취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진실은 1960년대 미국전체가정의 1/5이상 즉, 3000만명이상이 정부가 정의한 빈곤선이하의 생활을 하고있었다는데 있다.

1963.11.22 미대통령 케네디의 암살은 금융자본집단과 그부역자들에 의한것이다. 케네디는 쿠바·베트남침략을 거부함으로써 마피아집단·산군복합체의 표적이 됐다. 무엇보다 1963.6.4 11110호대통령령에 서명함으로써 은본위제를 부활시켜 연방은행으로부터 화폐발행권을 되찾으려고 했다. 은증서가 유통되면 연방은행이 발행하는 달러의 유통량이 차츰 줄어들어 연방은행의 파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컸다. 이는 철저히 금융자본집단에 반하는것이었다. 케네디암살후 3년만에 18명의 결정적증인이 연이어 사망함으로써 진상은 철저히 가려졌다. 영국의 한수학자의 기고에 따르면 이런 우연이 발생할 확률은 10-16(1/10경)이었다. 케네디사후 대통령이 된 린든존슨은 1964.3 재무부에 은증서와 은실물의 교환금지를 지시함으로써 은증서발행을 중단하고 같은해 8월 통킹만사건을 구실로 베트남을 침략한다. 

1971 금본위제가 폐지됐다. 미국은 이미 달러를 남발함으로써 금의 고정환율을 유지할 힘이 없었다. 은행가 존엑서터에 따르면 1971.8.10 은행가·경제학자·화폐전문가들은 비공식회의를 열고 화폐위기문제를 토론했다. 금리인상이나 금가격인상을 하지않는 상황에서 화폐위기를 극복할수 있는 방안은 금교환창구폐쇄였다. 그리고 5일뒤인 8.15 닉슨은 금본위제를 폐지했다. 이로써 금융자본집단이 100여년에 걸쳐 준비해온 <법정화폐시대>가 도래했다. 달러의 추락하는 신뢰도는 미정부가 사우디아라비아에 석유거래를 달러로 결산하게 하면서 막았다. 

금본위제폐지는 필연적으로 인플레이션공황을 불러왔다. 특히 석유자원을 장악하고있는 금융자본집단은 국제유가를 무려 400%나 폭등시킴으로써 공황을 촉진했다. 석유가폭등에 따라 달러수요가 폭증하면서 달러는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고유가로 인해 석유를 주에너지로 사용하는 경제가 큰 타격을 받았다. 1974 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아시아국가들의 무역적자가 줄을 이었고 1974 개발도상국의 무역적자는 350억달러였다. 공업생산·무역은 세계적으로 위축됐는데 그정도가 2차세계대전후 최고수준이었다. 

한편 1960년대중반 반전운동에서 시작한 히피운동의 혁신적분파로 볼수 있는 사이퍼펑크(Cypherpunk)운동이 1990년대전후 인터넷대중화와 함께 일어났다. 사이퍼펑크운동은 자유에 초점을 맞추고 정부로부터 개인의 사생활, 프라이버시보호를 매우 중시했다. 특히 1980년대 레이건정부의 신자유주의경제질서에 의해 미국내 소득불평등이 심각해졌다. 세계적범위에서는 자유시장·규제완화, 자유무역, 외환시장개방등으로 빈익빈부익부가 심화됐고 금융자본집단·초국적독점자본에게 부가 편중됐다. 사이퍼펑크운동은 초국적독점자본과 이에 결탁한 정부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졌다. 

사이퍼펑크운동가들중에서 <암호무정부주의자(Cryptoanarchist)>들의 주도로 암호기술이 발달하면서 암호화폐가 만들어졌다. 데이비드차움은 익명디지털화폐이자 은닉서명·암호화된계좌·이중지불방지시스템이 적용된 이캐시를, 암호학자 애덤백은 블록체인에서 쓰는 작업증명알고리즘인 해시캐시를, 신시아더크·대니돌레브는 가단성암호화기술을 개발하는등 사이퍼펑크운동가들이자 암호학자·컴퓨터전문가들은 화폐의 탈중앙화를 목적으로 한 암호화폐를 만들어냈다. 2009.1 비트코인출현을 낳은 이런 역사적시도들의 바탕에는 달러가 지배하는 세계경제의 통화·금융시스템에 대한 뿌리깊은 저항의식이 자리잡고있다. 

금융자본집단의 탐욕은 미중산층을 붕괴시키고 미빈곤층의 호주머니까지 털어가기 위한 시도로 이어졌다. 서브프라임모기지사태는 주택모기지채권과 파생상품의 투자등, 위험자산에 투기함으로써 주택채권시장이 비대해진 결과다. 미모기지시장에 전세계돈이 몰리면서 1990년대 미GDP 46%를 차지하던 모기지시장은 2008 73%로 비대해졌다. 당시 연준의장 앨런그린스펀, 미재무장관 로버트루빈이 파생금융상품규제에 반대한 사실은 서브프라임모기지가 누구의 이익을 위한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리먼브라더스파산을 시작으로 공황은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2007.1~2009.9까지 미국·유럽은행의 1조달러자산이 증발됐으며 세계경제위축규모는 2조달러에 달했다. 부시정부는 금융기관구제를 위해 7500억달러를 투여함으로써 경제위기의 직접적피해자인 미국민에게 더욱 부담을 가중시켰다. 2009.3 연준의 850억달러구제금융으로 되살아난 거대보험회사AIG가 1억6500만달러의 보너스를 지급한 사실은 미국민의 분노를 들끓게 했다. 미하원은 구제금융을 받은 회사의 보너스를 100% 세금으로 환수하는 법을 328대 93의 표결로 통과시켰으나 상원은 위헌요소가 있다며 부결시켰다. 

2007 통계에 따르면 미상위1%가 미전체부의 34.6%를 차지하고있으며 상위20%가 85%의 부를 차지하고있다. 이런 현실은 월가점령시위로 이어졌다. 

미국내 조세저항운동과 금융자본집단·딥스의 본색을 밝히는 활동은 지속적으로 있어왔다. 미연방의회예산국의 자료에 따르면 1979~2007 상위가계1%소득이 275%상승한데 반해 중산층60%소득은 40%증가했다. 1979이후 미국민하위90%세전소득이 평균900달러 감소한 반면 상위1%소득은 70만달러 증가했다. 조세저항운동세력은 소득세가 헌법상에 규정돼있지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과세의 목적이 금융자본집단의 화폐발행에 따른 부채를 지급하기 위한것이며 금융자본집단을 핵심으로 하는 딥스세력의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세계지배전략을 다양한 방식으로 폭로하며 치열히 저항하고있다. 

2020 미대선을 계기로 천문학적인 규모의 대선부정의혹을 넘어 딥스의 추악한 본색이 드러났다. <피자게이트>·<헌터게이트>로 대변되는 딥스의 반인륜적범죄행위와 이를 폭로하며 <새로운공화국>을 설파하는 반딥스간의 쟁투가 첨예하게 진행되고있다. 반딥스세력이 <새로운공화국>의 정책적대안으로 제시하는 네사라·게사라(NESARA·GESARA)의 핵심과제는 연방은행의 국유화와 금본위제로의 회귀다. 정치·경제적권리를 둘러싼 딥스대반딥스의 충돌은 마주 달리는 기차처럼 불가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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