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로부터 해방이후 코리아의 38선남단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미군정이 수립된다. 거기에 남과 북은 분단됐다.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됐다는 사실에 반발이 컸다. 알려진바와 같이 <신탁통치>는 3상회의결정을 거부하는 미국과 친미파들에 의한 왜곡·조작이었다. 결국 3상회의결정사항을 이행하기 위한 소미공동위는 합의 없이 결렬됐다. 1946 남민중들은 미군정에 반대해 9월총파업, 10월대구인민항쟁등을 벌였다. 1948 우리민족은 단일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2.7구국투쟁은 남의 단독선거를 반대했다. 4.3 제주의 봉기자들은 무장을 들고 싸웠다. 1948.4 남북연석회의에 이승만·한민당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정치세력들이 참여했으나 5월 남측만의 망국적인 단독선거가 강행됐다. 그결과 북에는 연석회의결정에 기초한 정부가 수립됐고 남에는 이승만친미세력의 정부가 수립됐다. 38도선인근지역을 비롯한 남측의 적지않은 지역에서 빨치산유격투쟁과 토벌대의 전투가 벌어졌다. 전쟁과 토벌로, 보도연맹·국가보안법등의 반민주악법과 제도로 민족자주세력의 다수인사가 투옥·학살됐다. 친미반공정권에 의해 남녘에는 숭미공미의식이 사회를 지배했다. 그러나 노동자·민중의 분노를 잠재울수 없었으며 그들의 투쟁은 사회적으로 성숙해갔다. 1980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미국의 식민지배의 본질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미문화원방화사건등 선도적반미투쟁이 벌어졌다. 전방입소를 거부하며 분신한 대학생들은 <양키고홈>을 외쳤다. 2002 효순이·미선이의 죽음은 미군범죄의 진상을 절실히 깨닫게 했다. 이듬해 미국의 침략전쟁에 동원된 이라크파병도 대중적인 반미시위를 불러일으켰다. 점령군인 맥아더동상의 철거농성과 방화투쟁도 조직됐다. 자주통일민주주의코리아연대는 미군철거를 요구하는 미대사관앞평화시위와 미군의 북침전쟁연습을 반대하는 미대사관앞기습시위를 벌이면서 미국의 침략과 모략의 소굴 미대사관을 압박했다. 민중민주당은 2019 <미군철거원년>을 선언했으며 반미투본은 반미대장정을 하면서 미국의 남코리아지배를 끝장내기 위해 민중들의 투쟁을 조직하고있다. 또 청년레지스탕스의 미대사관앞기습시위가 우리민중의 반미저항의지를 힘있게 시위하고있다.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분단된 베트남의 남단에서 불타오른 반미투쟁처럼 코리아의 남단에서의 반미투쟁의 승리는 역사의 필연이 될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