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 항쟁의기관차〉 민중정권의 반부패투쟁과 반역세력청산

관료주의세력의 부정부패로 붕괴한 소련

블라디미르레닌·이오시프스탈린시기 소련은 당내 기회주의·관료주의와의 투쟁을 통해 부정부패의 근원을 정리하며 발전했다. 소련의 사회주의원칙성에 공공연히 도전한 대표적인 인물이 레프트로츠키다. 트로츠키는 1918 제국주의연합세력의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드시 체결해야했던 독일과의 강화조약을 자의적으로 파탄내며 신생사회주의소련을 위기에 빠뜨리고 기회가 있을때마다 권력장악을 위해 당·국가의 방침을 위반했다. 1923.4 소련공산당12차대회에서 트로츠키주의와의 투쟁이 전면화됐다. 트로츠키는 농민을 착취해 공업을 발전시키자는 반사회주의적인 <공업독재>를 내세우며 레닌의 방침에 맞섰다. 1923.10 당중앙위원회활동을 비방중상하는 편지를 중앙위원회앞으로 보내며 편법적으로 나왔다. 특히 <민주주의중앙집권파>·<좌익공산주의자>·<노동자반대파>와 같은 종파세력들과 결탁해 중앙위원회의 권위에 도전하고 <분파결성의자유>를 요구하며 분열적으로 나왔다. 트로츠키의 반혁명책동은 전국각지 당조직에서 격론을 통해 역공을 당했으며 1924.1 13차당협의회에서 <우리가당면해있는현재의반대파는볼셰비즘을수정하려했고레닌주의로부터명백히벗어났을뿐아니라분명한소부르주아적편향>이라는 비판을 통해 분쇄됐다. 1924 레닌사후 트로츠키는 10월혁명의 주역이 본인이었다고 내세우며 레닌주의를 중상하고 부패한 기회주의적이념을 내세웠다. 1925.1 당중앙위원회·중앙통제위원회합동총회에서는 트로츠키의 책동을 음모라고 규정하며 소련혁명군사위원회의장직을 박탈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여기서 멈추지않고 1927.10 10월혁명10주년기념일에 모스크바·레닌그라드에서 반당·반레닌구호를 내걸고 난투극을 벌였다. 11월 중앙위원회·중앙통제위원회는 트로츠키등 핵심적인 기회주의자들을 당에서 제명하고 중앙위원·중앙통제위원자리에서 해임했으며 관련한 수백명당원을 당세포에서 추방했다.

스탈린은 관료주의와의 투쟁을 강화하며 부정부패의 씨앗을 제거하려 노력했다. 레닌은 1920년대초 <노동조합과관료주의>에 대해 트로츠키와 논쟁하며 <관료주의의해악을극복하는데는수십년이걸릴것>이라고 이미 예측했다. 스탈린은 1928 <공산주의관료는가장위험한유형의관료들이다.그는당원의직함으로자신의관료주의를감추기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당원에 의해 아래로부터 통제를 조직하고 당내민주주의외에는 관료주의와 싸우는 다른 방법이 존재할수 없다고 선언했다. 1937 스탈린은 당중앙위원회전원회의에서 가맹공화국지도자급들에서 나타나는 관료주의와의 투쟁을 선언했다. 실례로 카자흐스탄변강당비서, 야로슬라블주당비서는 공정한 방식으로 간부선발을 하는것이 아니라 측근을 요직에 앉히며 전횡을 부렸다. 비슷한 시기 그루지야공산당지도자는 공공자금을 횡령하고 국가재산을 도둑질한 혐의로 체포됐다. 그루지야공산당중앙위원회임원의 절반이상이 면직을 당하고 부르주아민족주의세력으로 기소됐다. 스탈린은 관료주의자들이 자기파를 형성해 비판세력을 박해했으며 공산당기구에서 부패가 발생하고있다고 지적하며 관료주의자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실제 여러 지방기관에서 관료주의자들이 권력을 악용해 기업·토지를 사적소유물로 만들고있었다. 1937~38 <대숙청>은 공산당에서 27만8818명이 추방되는것으로 마무리됐다.

1930후반 군부에서 부정부패가 발생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게오르기주코프다. 주코프는 니키타흐루시쵸프가 권력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역할을 한 인물로 2차대전중에는 총사령부최고사령관, 전후에는 소련국방상·당중앙위원·중앙위정치국후보위원이었다. 소련각료회의가 극비리에 주코프의 별장을 조사해 스탈린에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고가의 사치품들이 51개의 트렁크·여행가방에 들어있거나 층층이 쌓여있어 사실상 별장전체가 값진 사치품·예술품이 널려있는 골동품창고 같았다. 주코프는 1948 강등됐다.

1952 19차당대회에서 게오르기말렌코프는 스탈린이 썼다고 추정되는 글을 발표한다. 말렌코프는 <여러조직과기관활동에대한대중들의통제가약화된곳이어디든간에,거기에서관료주의와퇴보,그리고심지어는공산당기구의개개부문에서부패도변함없이발생한다>고 지적했다. 뿐만아니라 <파벌을만들어,그힘을이용해생산수단,즉기업과토지를사적소유물로만들고있다.즉이미자본가처럼행동하는사람들,장래의자본가들이우후죽순처럼발생하고있다.>고 규탄했다. 또 <사회주의이데올로기의영향력이약화된다면,그효과는부르주아이데올로기영향력이강화되는것>이라며 사상사업을 경시해 부르주아사상이 지배하도록 허용한 간부들을 비판했다.

1953 스탈린사후 관료주의자들은 사실상 당을 완전히 장악했다. 1953.4.11 각료회의의 포고령으로 성과 그산하부서장의 정책결정권이 강화되며 중앙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농업·공업·생산재·군부등을 장악한 관료주의자들은 정부재원을 서로 많이 가지겠다고 진흙탕싸움을 벌였다. 이시기 흐루시쵸프는 정적인 라브렌트베리야를 1953.6 체포하고 12월 총살했다. 1955.2 말렌코프를 수상자리에서 제거했고 1957.6 스탈린지지세력이 중앙위회의에서 흐루시쵸프를 축출하려하자 주코프의 힘을 이용해 다수를 획득하며 승리했다. 10월에는 주코프마저 중앙위에서 제거하고 1958.3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는 레닌·스탈린시기 공개적논쟁·당원총투표를 통해 기회주의자·관료주의자들을 민주적으로 청산했던것과는 정반대의 방식이다.

흐루시쵸프를 중심으로 한 관료주의자들은 1956 반스탈린주의를 주창하며 사상적기초로 수정주의를 채택했다. 정치·경제적으로 반노동·반민중성이 심화되고 사적소유가 부활했으며 사회주의문화양식이 퇴보하며 자본주의문화가 침투했다.

흐루시쵸프에 의해 정치적수정주의가 대두됐다면 경제적수정주의는 레오니트브레즈네프정권하에 심화됐다. 1962 소련경제학자 리베르만은 <계획,이윤및상여금>이란 논문을 통해 경제의 지방분권화·이윤제도도입을 주장했다. 사실상 개별국유기업을 자본주의적기업방식으로 운영하라는 지시였다. 1965 <리베르만방식>에 의해 자본주의원리가 도입됐다. 그결과 생산의불균형·물품부족이 일반화됐고 부정부패·뇌물수수·밀매·축장이 성행했다. 1970년대후반 소련경제성장률은 눈에 띄게 둔화되며 소련붕괴의 직접적원인이 됐다.

한편 경제적으로 1960년대부터 <2경제>, 즉 지하경제의 범위·규모가 눈에 띄게 커졌다. 이는 브레즈네프시기 성행했는데 2경제에 의해 1경제의 훼손이 심각했다. 특히 2경제는 공산당의 부패를 촉진했다. 2경제의 지하기업은 정부관리를 매수하지않고선 만들어지거나 지속될수 없었다. 1970~80년대초 우즈베키스탄의 당최고위·정부관리들은 수십억루블을 착복하기 위해 면화작물의 크기를 조작한 면화부정비리사건을 일으켰는데 여기에 브레즈네프사위를 포함한 수천명의 관료들이 매수됐다. 뇌물은 당의 최고위원회까지 닿아 흐루시쵸프의 오른팔이자 중앙위비서였던 프롤코즐로프는 보석·돈다발을 뇌물로 받았다. 1985 콘스탄틴체르넨코당중앙위서기장이 죽은 후 중앙위원들은 지폐가 가득한 서기장개인비밀금고를 발견하기도 했다. 2경제는 흐루시쵸프하에서 시작돼 브레즈네프때 발전했고 미하일고르바쵸프시기에는 가장 강력해졌다. 공산당원·정부관리는 부패로 사적기업의 지분을 갖게 됐고 부르주아세력은 고르바쵸프의 지지기반이 됐다. 2경제로 인해 사회주의경제체제하에서의 공정성은 완전히 훼손되며 자본주의화가 가속화됐다. <경제자유수호>라는 조직은 사적기업활동을 불법화한 형법153조의 폐지를 선동했고 부르주아세력은 자본주의화를 <자유주의>운동으로 기만했다.

소련붕괴후 만연한 부패, 최악의 경제공황으로 러시아인의 약75%가 빈곤선이하거나 겨우 빈곤을 모면하는 처지로 전락했으며 학령기아동50~80%가 신체·정신적손상을 가지고있는것으로 분류됐으며 남성의 기대수명은 60세미만으로 급감했다.

소련붕괴후 보리스옐친과 결탁해 국영기업의 사영화과정속에서 핵심사업을 독식한 올리가르히(신흥재벌)들은 공공연한 탈세와 부를 해외로 빼돌리며 연방재정의 궁핍화를 가져왔다. 올리가르히의 청산은 러시아의 반부패투쟁에서 핵심과제였다. 올리가르히는 블라디미르푸틴의 경제개혁의 발목을 잡았고 공공연히 유럽제국주의세력과 결탁해 반푸틴운동을 벌였다. 푸틴이 반부패투쟁의 일환으로 올리가르히청산을 내세우는것은 필연이었다. 푸틴은 올리가르히에 대한 구속·해외추방을 단행했다. 일례로 2003 러시아최대석유회사 유코스사장 미하일호도르코프스키를 횡령·조세포탈·사문서위조·공무집행방해등 경제비리사유로 전격 구속했다. 러시아최고부호 보리스베레조프스키는 푸틴집권초 해외로 망명했고 결국 막대한 부채를 청산하지못한채 사망했다.

관료주의자들의 반민중시책·조치의 끝은 부정부패다. 소련은 기회주의자·관료주의자에 의해 수정주의적으로 변질되고 부정부패가 성행하며 붕괴됐다.

미국의 <합법>화된 부정부패

미국내에서의 부정부패는 만연해있으며 일부는 제도화·<합법>화돼있다. 정치적으로 선거를 둘러싼 부정부패를 들수 있다. 대표적으로 1972~74 워터게이트사건은 닉슨미행정부가 베트남전반대의사를 표명했던 민주당에 대한 불법침입·도청사건과 이를 부정·은폐하려는 행정부의 조직적움직임등의 권력남용에 의한 정치스캔들이다. 1972.6 미워싱턴DC 워터게이트빌딩내 민주당전국위원회사무실에 침입한 5명과 방조자2명중 과거 대통령재선위원회에서 일했던 사람과 백악관근무경력자가 발견되면서 사건은 본격화됐다. 이들은 민주당사무실에 침입한 대가로 재선위원회의 비자금을 받았는데 자금은 백악관비서진이 관리하던것이다. 1973 워터게이트범죄피의자들이 재판을 받았는데 피의자 제임스매코드의 진술로 공직자들의 불법행위가 드러났다. 특히 백악관측근·대통령고문 존딘이 리처드닉슨에 불리한 진술을 하면서 여론은 닉슨을 겨냥했다. 닉슨은 자신의 결백을 끝까지 주장했으나 1974.8 대통령집무실의 대화를 녹음한 백악관테이프가 공개됐다. 닉슨은 <통치상의특권>을 내세우며 테이프제출을 거부했으나 특별검사 아치볼드콕스가 1973.10 기록을 받기 위해 닉슨을 법원으로 소환했다. 닉슨이 콕스를 해임하자 엘리오트리차드슨법무부장관과 차관보가 사임으로 저항했다. 비슷한 시기 부통령 스피로애그뉴의 뇌물횡령증거가 드러나 사직하면서 닉슨정부는 심히 위축됐다. 결국 녹취록은 제출됐고 닉슨이 워터게이트사건은폐에 관여한 사실이 드러났다. 탄핵이 불가피한 조건에서 닉슨은 1974.8 대통령직을 사퇴했다.

또다른 정치적부정으로 2020.11 미대선을 들수 있다. 미역사상 부정선거논란은 여러 차례 있었다. 린든존슨미대통령은 1948 텍사스주상원의원선거당시 지역선거관리인을 매수해 87표차이로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1960 존케네디와 닉슨의 경우 첫개표에서 닉슨이 하와이주에서 141표 더 얻었으나 재개표결과 케네디가 115표 더 많은것으로 번복됐다. 2000 대선당시 공화당 조지부시에 패배한 앨고어는 플로리다주개표논란이 일자 패배인정을 번복하고 재검표를 요구했다. 2004 대선에서 전자투표기가 상용화됐는데 전자투표기제조업체CEO들이 공화당에 거액의 선거자금을 기부한 사실이 공개돼 논란이 발생했다.

여전히 공방중인 2020 대선부정선거문제는 미민주당 조바이든의 당선을 위해 다방면적으로 투·개표가 조작된것으로 사실상 밝혀졌다. 도널드트럼프는 펜실베이니아·조지아를 비롯한 경합주 6곳중 5곳에서 우세했고 2016대선득표수 6298만4825표보다 훨씬 많은 7421만6747표를 획득했으나 패배했다. 개표결과에서 자유당후보의 득표가 2만표 감소하거나 미시간주개표진행상황에서 바이든표가 14만표 증가하는 동안 트럼프표가 단1표도 늘지않는 기현상이 연출됐다. 조지아주의 경우 개표사무원이 표를 조작하는 장면이 CCTV에 고스란히 찍히기도 했다. 여러 경합주에서 공통적으로 개표중단·재개된 시점에서 갑자기 바이든표가 급증했다. 대선개표조작은 미국의 정치·경제적실권을 장악한 딥스(딥스테이트 Deep State)의 선거개입방식이다. 개표조작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딥스가 장악한 미CIA만이 아니라 중국·이탈리아·바티칸등이 개표조작에 개입했다고 말한다. 트럼프측은 미CIA가 개표조작관련소프트웨어 도미니언의 문제, 민주당의 조직적부정선거음모를 충분히 알고도 방치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변호인단은 개표조작에 이용된 컴퓨터서버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고 미군을 투입해 독일현지에서 서버를 입수했다고 인정했다. 프랑크푸르트는 CIA가 운영하는 전문해커집단의 유럽거점이다. 도미니언개표기는 인터넷으로 양방향데이터전송이 가능해 부정선거를 위해 제작된 기계라는 오명을 가지고있다. 이탈리아군수회사 레오나르도SpA IT부서장 아르투로델리아는 로마주재미대사관지휘아래 미대선데이터를 조작해 다수의 주에서 트럼프가 압승한 결과를 바이든이 승리한것으로 조작하는 작업을 진행했다고 진술했다. 미비영리단체 네이션스인액션은 조작된 데이터가 이탈리아북부주 베네토를 경유해 로마주재미대사관을 거쳐 프랑크푸르트에서 다시 로마로 전송됐다고 밝혔다.

경제분야에서의 부정부패·정경유착을 보여주는 대표적사례가 서브프라임모기지사태다. 대표적인 금융세력이 정계와 결탁해 벌인 서브프라임사태는 2008 세계금융공황의 직접적원인중 하나다. 2000년대초반 IT거품이 붕괴되며 금리가 1%까지 인하하자 유동성이 주택시장으로 몰렸고 은행도 대출확대에 주력했다. 2005 저소득층비우량주택담보대출이 확증했고 은행은 주택자금을 빌려주고 받은 대출채권을 리먼브라더스를 비롯한 투자은행들에 팔아넘겼다. 투자은행들은 MBS(주택저당증권)·CDO(부채담보부증권)등을 발행하며 헤지펀드등에 팔았다. 이후 금리인상·집값하락·모기지연체율급증으로 MBS·CDO등이 휴지조각이 되고 2008.9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미정부는 부실은행을 살리겠다며 7000억달러 구제금융을 투입했으나 미실업률이 5%수준에서 10%수준으로 치솟은것에 대해서는 특별한 대책을 세우지않았다. 오히려 복지제도는 축소됐으며 민중들은 실직·주택압류·소송에 내몰리며 파산영락했다. 2010 최저생계비미만소득의 가구비율은 15.1%로 1993이후 가장 높았다. 반면 세금으로 되살아난 금융회사들은 <보너스잔치>를 벌이며 미국민을 분노케 했다. JP모건체이스CEO 제이미다이먼은 2010 기본급·스톡옵션 포함 2080만달러의 보수를 받았고 뱅크오브아메리카는 직원3만명을 해고하고 직불카드사용자에게 월5달러의 수수료를 결정하면서도 해고된 자산운용책임자 샐리그코첵에게 총600만달러를 지급했다.

정치계·금융계의 정경유착이 본격화된것은 1980년대부터다. 레이건정부는 재무부장관으로 메릴린치은행CEO 도널드리건을 임명했고 리건을 중심으로 30여년에 걸친 규제완화를 시작했다. 1982 저축·융자회사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며 고객돈으로 위험천만한 투자를 시작했다. 그결과 1980년대말 저축은행·융자회사 수백개가 파산했고 책임자수천명은 공금횡령으로 수감됐다. 미정부는 이를 회복하겠다는 이유로 세금1240억달러를 투여해 손실을 충당했다. 링컨세이빙스는 악명높은 대부업체인데 1985 연방규제기관의 조사가 시작되자 링컨세이빙스CEO 찰스키팅은 앨런그린스펀을 고용했고 그린스펀은 감사원에 키팅의 투자에 위험성이 없다고 평가했다. 키팅은 그린스펀에 4만달러나 지불했으나 결국 감옥에 수감됐다. 그러나 그린스펀은 레이건정권하에 미연준(Fed 연방준비제도)의장으로 임명됐고 클린턴·부시정부하에서 재신임됐다. 클린턴정부는 전골드만삭스투자은행CEO 로버트루빈을 재무부장관으로 임명했다. 클린턴정부는 1990년대말 금융계가 소수의 거대회사로 합병되는것을 방조했다. 금융자본집단은 단계적으로 정치권을 장악하고 공화당·민주당 양쪽을 돈으로 매수했다. 그러면서 2000.12 파생상품규제금지를 골자로 하는 상품선물거래현대화법을 통과시켰다. 미연준은 주택소유자산보호법으로 서브프라임융자를 규제할수 있었으나 그린스펀은 이를 거부했다. 그결과 골드만삭스는 2006상반기 최소31억달러에 달하는 CDO를 판매했다. 이때 골드만삭스CEO가 헨리폴슨인데 2006.5 재무부장관으로 임명됐다. 2006 벤버냉키가 연준의장으로 임명됐고 서브프라임대출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서브프라임모기지사태가 발생하자 2008.9 폴슨·버냉키는 미의회에 7000억달러구제금융을 요구해 AIG에 1600억달러, 골드만삭스에 140억달러를 쏟아부었다. 2010 오바마정권의 재무부장관 티모시가이트너는 2008 금융공황당시 뉴욕연은(연방은행)의장으로 골드만삭스에 대한 구제금융을 결정한 장본인이며 가이트너의 차기뉴욕연은의장 윌리엄더들리는 골드만삭스의 전경제고문으로 파생상품을 극찬했던 대표적인 금융세력이다. 오바마정권은 은행포상금규제반대를 법제화한 유럽과는 달리 법제화를 거부했다. 2010까지 금융업계는 기소·체포되지않았고 특별검사도 없었으며 금융사의 경우 주식·회계사기로 기소되지않았다. 2013 <21세기글래스·스티걸법안>이 발의됐다. 1933 제정됐던 글래스·스티걸법은 상업은행·투자은행분리법안으로 금융세력에 의해 1999 폐지됐다. <21세기글래스·스티걸법안>은 현재까지 제정되지않고있다. 금융위기후 금융계는 금융위기완화를 위해 의원1명당 5명꼴인 로비스트3000명을 투입해 여전히 정경유착·부패를 심화시키고있다. 미정부를 <월스트리트정부>라고 일컫는 이유다.

미정·재계의 도덕적부패는 최근에도 계속 폭로되고있다. 힐러리클린턴측근 애버딘후마는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남편인 뉴욕주하원의원 앤서니와이어의 수년간의 성추문을 언급하며 빌클린턴의 <지퍼게이트>로 곤혹을 치른 힐러리를 동정했다. 그러나 힐러리의 도덕적부패도 심각하다. <피자게이트>는 힐러리가 <소아강간범>의 다른 말인 <소아성애자>며 아동성범죄를 심각하게 자행했다는 내용이다. 힐러리가 지인들과 주최한 비공개미술전시회에는 각종<아동성학대>그림으로 도배됐다. 힐러리대선캠프선대본부장 존포데스타이메일에서 문맥과 상관없이 등장한 <피자>·<파스타>·<아이스크림>등 단어들은 미FBI(연방수사국)에 의해 <소아성애자커뮤니티>에서 사용하는 은어라고 밝혀졌다. 위키리크스는 힐러리클린턴후보캠프·민주당인사들과 <소아성애>자단체와의 연관을 폭로하기도 했다.

<헌터게이트>도 또다른 도덕적부패다. 미<대통령> 조바이든의 아들 헌터가 아버지의 명성을 이용해 우크라이나에너지회사 부리스마이사로 재직하며 고액연봉을 받고 사모펀드를 설립해 천문학적뇌물을 챙긴 사건이다. 마약중독자 헌터의 노트북하드드라이브가 유출돼 <헌터게이트>관련내용만이 아니라 마약의 일종인 크랙을 흡입하는 동영상을 비롯한 각종성범죄자료들이 가득 있다는 사실이 공개됐다. 미안팎의 정·재계딥스세력이 <미성년자성착취>로 악명높은 제프리엡스타인의 섬에서 각종 추악한 만행을 벌였으며 엡스타인과 친분이 두터웠던 MS창업자 빌게이츠는 최근 멀린다와 이혼하는 과정에서 문란한 성생활이 폭로됐다.

미국내 반딥스·딥스와의 쟁투는 딥스의 부정부패, 추악한 범죄를 척결하는 과정을 통해서도 명확히 드러났다. 반딥스세력인 존F.케네디주니어와 친우관계인 트럼프는 취임첫달 1500명이상의 아동성매매자를 체포했다. 2017.2 트럼프는 다국적범죄조직의 마약밀매·인신매매등 국제적불법거래차단을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했으며 2018.1을 <노예화·인신매매근절의달>로 정하고 인민매매업자의 상업용차량운영금지를 골자로 하는 2개의 반인신매매법안에 서명했다. 반딥스측은 미국내 딥스(카발)가 존재하며 이들이 아동성매매·인신매매·장기밀매·인체실험·마약밀매·정보기관사유화등을 자행하고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미연준은 사금융으로 딥스·금융자본집단에 의해 장악돼있고 화폐발매때마다 정부의 부채가 증가하는 구조는 부정부패·타락을 가중시키고 미국민을 파산영락시키는 근본원인이다. 2018.6 미국가부채는 무려 21조3000억달러(2경3990조원)를 돌파했다. 고도의 자본주의국가이자 제국주의국가 미국의 합법화된 부정부패로 인해 미국민만이 아니라 전세계민중이 고통받고있다. 딥스세력에 의해 합법적으로 감행되는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어낼수 있는 방도는 미국민·세계민중의 반제자주투쟁에 있다.

중국의 운명이 걸린 반부패투쟁

중국공산당은 계기때마다 반부패투쟁을 전개하며 사회주의원칙성을 고수하기 위해 노력했다. 1949.10 중화인민공화국창건후 반혁명·투기자본세력의 불법적인 투기행위를 가로막기 위해 <은화와의전쟁>·<쌀과솜의전쟁>을 잇달아 조직했다. 해방초 불법금융투기세력은 상하이에서 정부법령을 무시하고 금융시장을 교란시켰다. 1949.6 상하이시군사관제위원회가 금융투기의 본거지 <증권청사>를 단호히 폐쇄함으로써 금융세력의 불법활동을 척결했다. 이어 투기세력의 식량·무명실·면포·석탄사재기에 맞서 중앙정부는 상품을 대대적으로 투매하며 투기세력의 음모를 분쇄했다.

반동적인 장개석세력은 신생사회주의중국을 교란·파괴하려 획책했다. 특히 코리아전당시 2차세계대전이 일어날것이라며 <대륙역습>의 환상을 품고 반혁명활동을 심화했다. 1950 반년사이 새로 해방된 지역에서 4만여명의 간부·대중이 반혁명세력에 의해 살해됐다. 1950.10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는 <반혁명활동진압과관련한지시>를 내리고 <진압과관용을서로결합하는방침>을 전면적으로 관철시킬것을 강조했다. 중국정부는 1951.2 <중화인민공화국반혁명징벌조례>를 통해 반혁명진압투쟁을 위한 법적무기·양형기준을 정했다. 반혁명진압운동은 1952말 마무리됐다.

한편 1951.10 중국공산당중앙정치국이 전국각지에서 애국증산절약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탐오·낭비·관료주의문제가 적지않게 발생했다. 1951.10 톈진지구위원회전서기·스자좡시당위원회전부서기 류칭산, 톈진지구특파원·당위원회서기 장쯔산의 불법비리사실이 폭로됐다. 이들은 부패·타락·변질돼 직권을 남용하고 공금을 도용해 불법경영활동에 종사했다. 도용한 공금규모는 총150여억원(1만원=1위안)이며 도용한 국가재산중 3억7000만원이상을 횡령하거나 사용했다. 1951.12.1 당중앙위원회는 <군대의정예화와행정기구의간소화,생산증대와절약,탐오반대,낭비반대,관료주의반대를실행하는데관한결정>을 내렸다. 처벌은 경중에 따라 경고·전출·철직·출당·징역형에 처하거나 최악의 경우 총살형에 처했다. 전형적인 횡령범죄자에 대해서는 반드시 대중을 동원해 공판을 진행했다. 이로써 <3반(반탐오·반낭비·반관료주의)운동>이 정식가동되기 시작했다. 1952초 모택동의 제안으로 당중앙위는 대도시·중등도시에서 자산계급의 뇌물행위반대, 탈세·세금누락반대, 국가재산빼돌리기반대, 부실공사반대, 국가경제정보빼내기반대등의 <5반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1952.1 당중앙위는 <대도시와중등도시에서5반투쟁을우선전개하는것에관한지시>를 통해 전국적으로 <5반운동>을 확대했다.

1956 소련에서의 스탈린격하운동이 전개되고 수정주의가 대두되며 국제사회주의진영에서 반수정주의·반관료주의투쟁이 중요하게 대두됐다. 1957.2 모택동은 최고국무회의에서 <인민내부의모순을어떻게처리할것인가>연설을 통해 <사회주의사회는모순으로가득차있다>·<적아의모순을해결하는방법으로인민내부의모순을해결해서는절대안된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간부의 기풍을 바로잡고 능력을 높일것을 요구했다. 1957.4 당중앙위는 전당범위에서 <정풍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현실은 당중앙위의 의도와는 달리 반정부투쟁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일부공장에서는 종업원들의 파업현상이 발생했고 대학교에서는 <민주의벽>이 형성되며 당의 영도를 부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중앙위는 우파반격문제에 대해 정식으로 조치를 취했으나 반우파투쟁이 심각하게 확대되며 좌·우경적오류를 범했다.

1962.9 당중앙위8기10차전원회의가 베이징에서 개최됐다. 당중앙위는 <수정주의에반대하고방비하기위한견지>에서 전국적으로 사회주의교육운동을 진행했다. 도시에서의 <5반운동>, 농촌에서의 <4청(장부청산·창고청산·재물청산·노동점수청산)운동>의 전개를 결정했다. <4청>은 이후 정치숙청·경제숙청·조직숙청·사상숙청으로 바꼈다.

문화대혁명의 후과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개최된 1970.8 당중앙위9기2차전원회의에서 부총리·총리권한대행 임표(린뱌오)는 모택동을 찬양하며 양봉음위했다. 모택동은 <나의몇가지의견>을 통해 임표무리를 비판했다. 임표무리는 무장정변까지 획책하며 모택동을 살해하려했다. 이들은 음모가 들통나자 외국으로 도주했고 결국 몽골의 은드르항부근에서 비행기가 추락해 모두 사망했다. 이과정에서 강청(장칭)등이 정치국내에서 <4인방>을 결성하며 권력탈취를 기도했다. 모택동은 이들을 <4인방>이라 선포하고 1975.1 4기전국인민대표대회1차회의에서 등소평을 국무원1부총리로 선출하며 <4인방>의 내각구성음모를 분쇄했다. <4인방>은 1976.9 모택동이 서거하자 권력찬탈을 또다시 음모했다. 10월 중앙정치국은 <4인방>을 타도하며 반혁명책동을 분쇄했다. <4인방>타도후 강청반혁명세력의 죄행을 적발하고 파벌체계를 철저히 조사했으며 잘못 처리된 사건을 바로잡고 우파분자들의 직위를 해임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1978.12 당중앙위11기3차전원회의에서는 임표·<4인방>의 죄를 적발하고 비판하는 대중운동을 끝내고 사회주의현대화건설에 집중할것을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등소평은 개혁개방을 적극 추진하는 동시에 1983.10 당중앙위12기2차전원회의에서 <당정돈에관한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의결정>을 채택해 당기풍·당조직을 전면적으로 정돈하기로 결정했다. 당원·간부들의 반혁명적비리사건들을 조사해 처리하고 <3부류> 즉 <임표·강청집단추종자로서반란으로출세한자>·<파벌사상이심각한자>·<폭행·파괴·약탈을일삼는폭력배>를 숙청하는 과정을 통해 당대오를 정화했다. 이는 1987.5까지 진행됐다.

1989.7 등소평과 당중앙위·국무원은 <가까운시일내에대중이관심을갖고있는몇가지일을행하는데에관한결정>을 내리고 간부자녀의 상업경영등 편법적사항을 중점적으로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8월 당중앙위는 <당건설을강화하는데에관한통지>를 발부해 1989~90 각급당조직은 정치풍파를 일으키는데 중점적역할을 한 사람을 집중조사했다. 11월에는 중앙기율검사위원회가 제기한 <당기풍과청렴건설을강화하는데에관한의견>을 비준해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당기풍·사회기풍을 호전시켰다.

1993 중국국가주석에 장쩌민이 선출됐다. 그전후로 중국내에서는 적지않은 지방에서 <개발구붐>·<부동산붐>이 불었으며 갈수록 심각해졌다. 개혁개방은 가속화돼 1993.11 당중앙위14기3차전원회의에서는 <사회주의시장경제체제구축관련몇가지문제에대한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결정>을 채택해 <사회주의시장경제체제>수립을 국가의 거시적조정하에 시장이 자원배치에 대해 기초적역할을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정경분리원칙에 따라 대형기업그룹들이 설립됐고 일련의 국유기업에 대해서는 회사제·주식제로 개편됐다. 2000 적자상태였던 국유기업·국유지주형기업이 줄어들고 기업이윤창출액도 1.97배가 증가했다. 그러나 국유기업의 개혁과정에서 수천수만의 근로자들이 정리해고 되거나 분류됐다.

당중앙은 이시기 당풍건설강화를 위해 <청렴한당풍건설책임제를실시하는데관한규정>·<당정기관의엄격한절약및사치낭비행위제지관련몇가지규정>등의 법규를 제정하고 일련의 중대한 불법사건을 조사처리했다. 2001.9 당중앙위15기6차전원회에서는 <당의기풍건설을강화하고개진하는데에관한결정>을 채택해 <8가지견지,8가지반대>를 내세웠다. <8가지견지>의 8가지는 사상해방·실사구시·이론과실제의결부·대중과의밀접한관계·민주집중제원칙·당규율·청렴결백한기풍·힘든분투·어질고현명한인재등용원칙을 의미했다. <8가지반대>의 8가지는 낡은것답습·현실안주·교조주의·형식주의관료주의·독단무기력산만·자유주의·사리도모·향락주의를 의미했다.

2007.11~2012.6까지 전국기율검사감찰기관이 입건수사에 착수한 사건이 64만3000여건이었으며 종결한 사건이 63만9000건이었다. 당규율·행정규율위반으로 처분된 당원이 66만8000여명이며 범죄혐의로 사법기관에 이송된 이는 2만4000만명이었다. 그중 전상하이시장 천량위는 사회보장기금비리로 축출됐으며 전충칭당서기 보시라이는 기업인들로부터 47억원상당의 뇌물을 받아 처벌됐다. 특히 보시라이는 후진타오주석등 최고지도부의 통화까지 도청하고 기업가들의 재산을 약탈해 국외로 빼돌렸다는 정황도 드러났다.

칭화대국정연구원원장 후안강교수는 장쩌민시절 공산당관료비리규모는 연9조9000억위안에서 최대1조2600억위안에 달했다고 추산했다. 이는 당시 중국국내총생산의 13~16%에 해당하는 수치다. 한편 2014 위키리크스는 해외조세도피지역에 자산을 빼돌린 중국고위직가족명단을 보도했으며 한통계자료는 원로들이 해외로 빼돌린 자산이 무려 10조달러에 이른다고 폭로했다.

2012.11 18차당대회이후 기풍개선을 위한 중대조치로 형식주의·관료주의·향락주의·사치풍조를 엄격히 다스렸다. 2013.3 시진핑이 7대국가주석에 선출됐다. 2013.11 당중앙위·국무원은 <당정기관절약실행낭비반대조례>등 20여부의 관련제도를 출범시켜 사치·낭비풍조를 원천적으로 억제하고 실행가능·활용가능한 구체적규범을 마련했다. 18차당대회이래 당자체건설에서 가장 뚜렷한 특징은 당을 전면적으로 엄히 다스리는것이었다. 2013.5 당중앙위는 <전당내에서당의대중노선교육실천활동을깊이있게전개하는데에대한의견>을 발부하고 2013.6~2014.9까지 당의 대중노선·교육실천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형식주의·관료주의·향락주의·사치풍조의 4가지기풍문제를 집중단속했다.

2012.12 쓰촨성당위원회부서기 리춴청이 엄중한 규율위반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이는 <호랑이때려잡기>의 시작이었다. 당중앙위는 부패척결에서 <무금지구역·전면포괄·무관용>원칙을 견지하며 <호랑이때려잡기>·<파리때려잡기>·<여우사냥>등을 확고부동하게 추진했다. 18기중앙위비준을 거쳐 입건심사처리한 성·군급이상당원간부·기타중앙조직부등록간부440명, 청·국급간부8900여명, 현·처급간부6만3000명, 기층당원간부27만8000명이 처분을 받았다. 특히 정치국상무위원 저우융캉은 1억2977억위안뇌물수수·국가기밀누설등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차당대회에서도 부패척결투쟁은 계속됐다. 2018말까지 77명의 중앙조직부등록간부가 잇달아 입건심사·조사를 받았고 조직폭력배의 보호세력을 엄하게 징계했다.

18차당대회에서 19차당대회까지 전국적으로 중앙8가지규정정신위반문제 총17만6100건을 조사·처리하고 당원·간부 총23만9000명을 처리했다. 총12만8000명이 당규율·행정규율위반처분을 받았는데 이는 하루평균 약140명이 처분을 받은 셈이다. 2020.5 전국적으로 중앙8가지규정정신위반문제 1만91건을 조사·처리했고 1만4506명이 처분을 받았으며 8149명이 당규율·정무처분을 받았다. 당규율·정무처분을 받은 간부중 지구·청급간부32명, 현·처급간부475명, 향·과급및이하간부7642명이 포함됐다.

2017.1 중국국가부주석 왕치산은 단일반부패최고감찰기구인 국가감찰위원회신설을 제안했다. 당이 비당원부패공직자에 대한 조사권한이 없어서 제보를 받더라도 감찰부·공안부등에 이첩시킬수밖에 없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것이었다. 2018.3 13기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감찰법안>이 통과되면서 국가감찰위원회는 반부패헌법기관으로 출범했다.

현재 중국의 주요반부패담당기구로는 중앙기율검사위원회·기율검사기관·행정감찰기관·심의기관·인민검찰원·국가부패예방국·국가감찰위원회가 있다. 시진핑권력하에 당의 감찰기구 중앙기율검사위원회의 권한이 강화되고 기율검사위원회체계의 독립성이 제고됐다.

당중앙위는 순시감독업무를 강화했다. 277개조직에 대해 순시감독을 진행했고 여러 성·자치구·직할시당위원회는 총8362개의 당조직에 대한 순시감독을 조직했다. 당중앙위의 강력한 지도아래 순시감독업무가 당역사상 처음으로 한임기안에 전면적으로 실현됐고 부패척결투쟁이 압도적승리를 거뒀다.

시진핑의 반부패투쟁을 가로막은 세력은 다름아닌 장쩌민·후진타오세력이다. 2014 장쩌민은 <부패척결행보가지나치게빨라선안된다>며 제동을 걸었다. 후진타오도 2013 <후임자가반부패전선을과도하게확대해선안된다>고 언급했다. 장쩌민이 반부패투쟁을 경계한 이유중 하나는 장쩌민아들 장몐헝이 저우융캉아들 저우빈과 함께 정유회사를 운영했고 장쩌민측근 쩡칭훙전부주석도 <석유방(석유산업을기반으로한정치파벌)>의 대부로서 석유방출신거물 저우융캉과 연관이 있어서다. 저우융캉을 중심으로 한 석유방은 초토화됐고 저우융캉의 친인척·측근관리300여명은 구금됐다.

특히 장쩌민가계·세력과 딥스가 밀접한 연계를 갖고있는것으로 알려지고있다. 장쩌민손자 장즈청은 2011 설립한 사모펀드 보위캐피탈을 통해 면세점기업 선라이즈듀티프리를 인수하며 부를 축재했다. 또 보위캐피탈이 중국최대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지분매입등을 통해 챙긴 돈을 원자바오전총리가 부정축재했다는 사실이 보도됐다. 선라이즈는 국제공항의 모든 면세점을 소유하고있는데 1999 장쩌민주석하에 국무원은 국가독점이던 면세점사업을 처음으로 해외기업에 개방했고 미국국적화교기업 프레드창은 이당시 선라이즈를 설립했다. 선라이즈는 설립·성장에 특혜를 입었는데 2011 장즈청은 선라이즈면세점지분 40%를 8000만달러라는 헐값에 구입했다.

2019 미국에 망명중인 중사업가 궈원구이는 장쩌민가족이 해외에 1조달러 자산을 가지고있다고 주장했다. 장즈청의 자산만 5000억달러에 이른다고 언급하며 <장씨일가는국유기업·금융기관·보험등다양한기업을1000개이상지배하고있으며이를통해해외에서5000억달러를세탁했다>고 폭로했다. 세탁된 자금중 일부는 미국의 금융펀드·대형첨단기업에 투자됐다.

장즈청은 골드만삭스에서 일한 경력이 있으며 중국개발은행총재 천위안딸 천샤유단은 모건스탠리에서 일하는등, 중국고위급정치인자식들을 지칭하는 신태자방은 월가의 금융자본집단과 연결돼있다. 최근 장즈청이 시진핑암살기도에 연루돼 싱가포르에서 체포·압송됐다는 보도가 있어 사실여부와 향후전개에 이목이 집중되고있다.

부정부패세력은 반민중세력이자 반사회주의세력이다. 시진핑의 강력한 반부패투쟁의 칼날이 어디를 겨냥하는지는 분명하다.

<부패공화국> 프랑스의 반부패노력

올해 3.1 니콜라사흐코지전프랑스대통령이 부패혐의로 징역3년·집행유예2년을 선고받았다. 사흐코지는 2014 뇌물공여혐의로 기소됐다. 사흐코지는 이사건외에도 2012 대선당시 법정한도를 초과해 선거자금을 사용한 혐의로 재판중이며 2007 대선당시 리비아지도자 무아마르알카다피로부터 선거자금을 받은 의혹도 수사중이다. 사흐코지는 2007 화장품회사 로레알의 대주주 릴리앙베탕쿠르에게 거액의 불법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도 있었으나 이는 무죄로 판결됐다. 베탕쿠르의 회계사는 에힉뵈흐트예산장관이 대중운동연합재정담당책임자로 있으며 대선두달전에 현금 15만유로를 받았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사흐코지이전에는 자크시하크가 2011 파리시장재임당시 지지자를 위해 시청에 위장취업을 알선한 혐의로 2년형의 집행유예를 받았다.

프랑스는 증세복지국가로서 방만한 국가재정을 운영하는만큼 공직자의 청렴성확보가 중요함에도 유럽의 다른 국가에 비해 부패방지·공직청렴성에 대한 제도적노력이 미흡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2010년대 들어 프랑스는 EU(유럽연합)의 입법적동향에 맞춰 새입법·행정명령제정을 통해 반부패·공직투명성을 추구하고있으며 직제상 법무부소속의 공직자부패행위방지를 위한 제도적장치이자 범정부적부패방지기구인 중앙부패방지처(SCPC)를 설치해 운영하고있다. SCPC는 감시·부패관련정보종합화·사법당국과의업무협조를 임무로 한다. 그외 공직윤리위원회·고등사무국·공화국재판소등이 부패방지체계로 운영된다.

경제분야의 부정부패청산과 관련해서는 2000.9 OECD(경제협력개발기구)뇌물방지협약에 서명하며 기업의 부정부패청산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2000이전에는 부패행위에 대해 관대했다. 기업고위임원들이 해마다 재무부에 제출하는 <특별비용목록>에 따르면 프랑스기업들이 국제입찰에서 낙찰받기 위해 가장 많이 이용한 수단은 뇌물이었다. 재무부는 규정에 따라 <특별비용>의 세금을 공제해주면서 사실상 위법행위를 합법화했다. 미국의 해외부패방지법(FCPA)을 위반해 고액의 벌금을 지불한 기업중에는 프랑스항공기제조사 에어버스도 있다. 에어버스는 2020.1 해외뇌물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미법무부와 합의했는데 그금액이 무려 20억달러에 달했다.

프랑스는 2016 반부패법안인 <투명성,부패와의전쟁그리고경제활동의현대화에관한법> 일명 <샤팽2법>을 제정했다. 법안제정의 배경이 된 사건은 건설서비스회사 테크닙의 뇌물수수사건이다. 테크닙은 미국플랜트엔지니어링회사 KBR등의 회사들과 나이지리아의 액화천연가스관련합작투자를 하는 과정에서 프로젝트수주를 위해 나이지리아공무원들에게 1억8000만달러상당의 뇌물을 지급했다. 테크닙은 FCPA위반혐의로 9800만달러의 벌금을 지불해야했는데 이는 FCPA고액벌금순위 10위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법의 주요특징은 반부패청(AFA)신설·내부고발자보호강화·일정규모이상기업의법규준수프로그램수립의무화·프랑스판기소유예합의제도도입등이다. 또 행동강령·위반처벌규정·부패리스크를표시한리스크매핑·관련이해관계자들에대한평가·내외부회계감사·교육·내부고발제도·효율성관리위한내부시스템등 8대요건을 갖춘 반부패 컴프라이언스프로그램의 보유를 요구하고있다.

위반시 법인은 100만유로, 개인은 20만유로까지 벌금을 부과한다. 이법의 적용대상은 직원 500명이상, 연매출액 1억유로이상인 기업·기업대표자·경영진, 다국적기업·기타관계회사들이다. 이들은 부패·권한남용예방을 위한 조치를 반드시 마련해야한다.

친미매국세력이자 부정부패세력

베트남전에서 북베트남이 승리하면서 1973.1.27 파리평화조약이 체결됐고 2개월만에 미군이 완전 철군했다. 남베트남이 2년후인 1975.4 북베트남에 항복하며 베트남은 통일됐다.

남베트남이 붕괴된 객관적요인중 하나는 남베트남권력의 뿌리깊은 부정부패다. 1955 응오딘지엠은 부정선거의 결과 98.5%의 지지율로 당선됐다. 응오딘지엠은 프랑스식민시절 25세나이에 프랑스식민지방군대장을 맡았고 약300곳의 마을을 관리한 고위관료출신이다. 민족반역자 응오딘지엠은 미국신학교를 다녔고 임기내내 미국의 비호하에 파쇼통치를 감행한 핵심적인 친미세력이다. 천주교신자인 지엠은 민중대다수가 불교신자임에도 불교를 극렬하게 탄압했고 공산당을 비롯한 정적을 제거했는데 공개된 사실에 의하면 1955~57기간 처형된 정치범만 무려 1만2000명이었고 1958에는 수감된 정치범숫자가 4만여명을 넘어섰다.

응오딘지엠의 공포정치·파쇼통치하에 그측근들은 정부주요사업을 비롯한 다양한 부문에서 각종부정부패를 일으키며 대부분의 이권을 장악했다. 군부도 계속되는 군기문란행위로 인해 전력우위에도 불구하고 혁명적인 북베트남군에 패배했다. 1963 지엠이 쿠데타로 암살된후 남베트남내에서는 1964.10까지 군사쿠데타만 5회이상 일어났다. 이시기 총병력수는 46만3000명의 현역정규군이었는데 이중 15만명이나 탈영했다. 민중의 반미·반정부·반부패투쟁은 더욱 거세졌다. 1967.9 응우엔반티우가 대통령에 선출되며 2공화국이 출범했다. 티우는 초기3년간 나름 부정부패를 일소하겠다고 했으나 고질적인 부정부패문제는 더욱 심화됐다. 반역세력의 사리사욕·부정축재는 민중을 더욱 분노케 했다. 뇌물·도박·아편·매춘이 성행했고 현역군인 58만명중에 10여만명은 뇌물로 장기휴가를 가서 민간인복장으로 회사에 출·퇴근했다. 심지어 티우의 사위도 대학생으로 있다가 군에 입대해 유학을 갔다. 티우의 부정부패의 심각성은 그가 베트남을 도망나올때 절정을 이뤘다. 티우를 수행한 미CIA요원은 그의 트렁크를 옮길때마다 <금속이부딪치는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금덩이가 부딪히는 소리였다. 티우는 대만으로 도주했고 스위스비밀은행계좌에 비리자금을 은닉했다.

1980.12 베트남의회는 통일된 베트남에 적용하는 새헌법을 개정했고 1980년대중반부터 도이머이(Đổi Mới 쇄신)정책을 도입했다. 도이머이정책은 정경분리원칙에 기초를 두고 경제분야에 있어서만 대외개방·경제적자유확대등 부분적으로 시장경제질서요소를 도입한것이다. 예상되는 <정치적다원화>등의 요구에 대처하기 위해 당원·관료의 부정부패, 마약·밀수등 각종범죄확산을 제거하기 위한 당차원의 정풍운동을 단행하고 국가적차원의 부정부패를 일소했다. 반사회주의를 주장하는것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처했다. 그러면서 민주적중앙집권제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2011 응우옌푸쫑이 공산당서기장에 선출되며 부패청산작업이 더욱 강화됐다. 2012.8 베트남최대은행인 아시아상업은행설립자 응우옌득끼엔은 불법사업운영으로 체포됐는데 당시 베트남총리 응우옌떤중총리및측근과 유착관계였다. 베트남국영조선기업 비나신은 베트남 GDP 4.5%에 달하는 45억달러부채로 파산했고 비나라인도 20억달러부채를 지고있었는데 비나신·비나라인의 회장·책임자도 부패로 구속됐다. 부패스캔들이 있었음에도 응우옌떤중을 중심으로 고위공직자들이 중앙집행위원회·반부패사정기구를 일정하게 장악하고있었다. 쫑의 부패척결노력이 결정적으로 결실을 맺기 시작한것은 2012 부패방지중앙지도위원회(OCSCAC)를 쫑이 직접 지휘하는 정치국직속으로 재편하면서부터였다. 2016 12차공산당전당대회후 국영기업·금융부문에 대한 수뢰사건을 척결하는데 집중했으며 고위급공무원을 대상으로 처벌강도를 높였다. 2017.11에는 부정부패척결관련행동계획안을 담은 결의안<126/NQ-CP>를 발행하며 2020까지 해결할것을 촉구했다. 2017 최소220명의 고위급공무원이 구속됐고 수많은 정부관리들이 파면·강등됐다. 2016~19상반기까지 약70명의 공산당간부·당원이 부정부패로 징계처벌을 받았다.

1959.1 피델카스트로를 핵심으로 한 쿠바혁명세력이 반민중권력을 격퇴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카스트로는 1955 <7.26운동>을 결성하며 15개항의 혁명강령을 발표했다. 그중 15항의 내용은 공금횡령자의 재산몰수였다. 혁명이전의 바티스타정권은 친미반민중정권으로서 미국자본과 바티스타인척·측근이 쿠바재부를 독식하고있었다. 카스트로혁명세력의 승리가 확정되자 바티스타와 그측근들은 국립은행·재무부가 보유하고있던 달러를 훔쳐 도주했다. 쿠바정부는 준비금이 100만달러정도밖에 남지않은 반면 공채는 12억달러가 넘었고 예산결손액이 8억달러에 달했다. 세금을 낼수 있는 부유층도 재산을 처분하고 예금을 인출해 마찬가지로 도주했다. 카스트로는 정권을 수립하자마자 <혁명재판소>를 설립해 초반 6개월간 부정부패세력을 포함한 반혁명세력을 집중적으로 처단했다. <바티스타정권의하수인들이길거리에끌려다니거나개인의복수의희생자가되는것을원치않는다>며 반혁명세력처단의 기준을 제시했고 몬카다프로그램에 의해 처벌을 합법적으로 단행했다. 반혁명세력들은 예비법안의 심판을 거쳐 공개재판을 받았다. 일부는 중형에 처하고 일부에게는 사형이 집행됐다. 초반6개월간 부정부패세력이자 반혁명세력 550여명을 처단했다. 실례로 바티스타경찰수뇌부 헤수스소사블랑코는 108건의 살해행위혐의로 1959.1.22 아바나실내체육관에서 재판을 받고 중형을 받았다. 정치적처벌뿐만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반혁명세력의 재산을 몰수하고 기준이상의 재산을 보유한 부유층의 재산도 국가에 귀속됐다. 이런 조치는 카스트로에게도 적용돼 카스트로가족이 소유한 농장도 원칙에 따라 국유화됐다.

바티스타정권의 옛경찰을 비롯한 반혁명세력은 미국의 배후조종하에 반카스트로책동·카스트로암살음모를 감행했다. 미CIA는 반혁명세력을 규합해 반카스트로조직을 300개 넘게 만들고 이를 정치적·금전적으로 지원했다. 그결과 1961.11~1963.1까지 쿠바내에서 5780건의 테러가 발생했는데 그중 717건은 산업시설에 대한 공격이었다. 카스트로에 대한 암살시도도 공개된것만 600건이 넘었다. 수년간의 테러결과 총3500명이 사망했고 2000명이상이 불구가 됐다.

그중 쿠바·미국재단은 호르헤마스카노사가 운영했는데 카노사는 바티스타측근의 아들이었다. 재단은 바티스타측근이 횡령한 자금을 토대로 운영했으며 미CIA는 이들의 테러계획에 돈을 지원했다.

1989.6 아르날도오초아사단장과 측근들이 체포됐다. 부패·마약거래혐의였다. 오초아는 국경수비대를 매수하고 밀수업자·마약거래업자들과 내통했다. 밀수업자들은 내무부장관 호세아브란테스가 관리했다. 처음에는 경제봉쇄조건에서 산업부속품구입을 위해 한 행동이었으나 점차 비용을 빼돌려 해외계좌에 축재했다. 오초아와 그측근들은 1989 <1사건>으로 군사재판을 받아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중 4명은 <조국에대한최대반역>행위로 총살형을 받았고 나머지는 실형을 선고받았다. 1989.7 오초아·아토니오델라과르디아대령·호르헤마르티네스대위·아마도파드론소령이 총살됐다. 총살형은 국가평의회31명의 만장일치로 결정됐다. 곧이어 <2사건>으로 카스트로경호원출신 아브란테스와 그측근들이 체포돼 실형을 언도받았다. 아브란테스는 20년형을 받았다. 혐의는 마찬가지로 부패·마약거래였다. 카스트로는 후에 <쿠바를큰위험에빠지게했기때문에우리는엄하게처벌해야만했다>·<그런범죄행위를저지르는지도부사람들에게는더그래야했다>고 회고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2002.4 차베스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한 쿠데타가 발생했다. 미국은 쿠데타로 인해 우고차베스대통령이 실각되자 <쿠데타가아니라국민의뜻이반영된정권변화>라고 강변했다. 미국의 의도와는 달리 20만명이상의 베네수엘라민중들이 차베스지지시위를 전개하고 차베스지지군부세력이 쿠데타를 규탄하면서 2일만에 차베스는 정권에 복귀했다. 쿠데타는 미국과 결탁한 반민중정치세력·재벌세력에 의해 벌어진것이다. 2001.11 미국 조지부시정부는 <베네수엘라를외교적으로고립시키겠다>, 쿠데타직전 IMF(국제통화기금)는 <베네수엘라에대한신규자금지원이과도정부에제공되기를희망한다>며 쿠데타음모를 미리 알고있었다는것을 드러냈다. 2001 미국은 베네수엘라·미국내 반차베스단체에 수십만달러를 제공했는데 수혜단체중에는 쿠데타이전 반정부시위를 주도한 CVW(베네수엘라노동자연맹)도 포함됐다. 기금은 NED(국립민주주의재단)에서 제공했으며 지원금액은 2000에 지원한 금액보다 4배 증가한 87만7000달러로 알려졌다. 당시 CVW위원장 카를로스오르테가는 2일간의 <대통령>이었던 상공회의소의장 페드로카르모나와 밀접한 관계였고 2월 미정부와 접촉한 정황이 있다. 일련의 사실은 미국의 반민중세력에 대한 조종, 반민중세력의 부정부패를 확인시켜준다.

2019.1 후안과이도국회의장이 친미반정부시위를 주도하며 <베네수엘라임시대통령>을 사칭했다. 과이도가 <셀프대통령>을 선언하자마자 미국등제국주의연합세력은 일제히 과이도를 베네수엘라<대통령>으로 밀어줬다. 과이도는 미제국주의의 베네수엘라지배전략을 위해 길러진 인물이다. <캔버스(CANVAS 비폭력행동과전략응용센터)>가 2005부터 베네수엘라를 본격적으로 공작하기 시작했다. 캔버스는 NED와 미CIA파생조직인 <국제공화주의협회>·<국제문제를위한국가민주주의협회>와 같은 단체로부터 자금지원을 받는 친미극우단체다. 캔버스는 베네수엘라내에서 친미극우학생조직간부훈련·반정부시위조작을 하기 시작했다. 친미극우학생조직의 핵심이었던 과이도는 2007 워싱턴대학에서 <통치·정치경영>에 등록했는데 이는 베네수엘라경제학자 루이스엔리케베리즈베이셔의 후원에 의해 이뤄졌다. 베리즈베이셔는 IMF전직사무총장이자 차베스이전 반민중정권의 에너지부문에서 10년이상 일한 신자유주의경제학자다.

베네수엘라정부는 과이도의 면책특권을 박탈하고 공직출마를 15년간 금지하며 과이도를 처벌했다. 2019.7 미국은 베네수엘라야당세력지원을 위해 4190만달러를 전용하면서 반마두로세력·야당을 배후조종했다. 한편 과이도는 2017~19 미국이 <인도주의적지원>명목으로 2억6000만달러, <개발지원>명목으로 2억4700만달러를 지원한 금액과 EU·캐나다·독일등 제국주의연합세력으로부터 받은 <지원금>의 대부분을 횡령한 심각한 부패세력이었다.

역사적경험은 반민중세력의 배후에는 제국주의가 있고 제국주의에 의해 부정부패세력·반민주세력이 양성된다는것을 잘 보여준다.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민중이 정치권·경제권의 주인이 되는 유일한 방도는 민중정권수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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