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이후 남코리아에 들어선 미군정은 일왕과 일제정부의 소유재산을 귀속시켰지만 일본인개인의 사유권은 인정하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본국으로 철수하기에 바빴고 남민중들이 스스로 일본인들의 기업체를 접수하고 관리해나가자 미군정은 일본인재산까지 귀속시켜 해방직후 새사회건설에 떨쳐나선 남민중을 억압했다. 나라의 독립과 그물적바탕인 경제자립은 이같은 미군정의 의도에 의해 파탄났다. 농업과 농민의 비중이 컸던만큼 해방직후 가장 큰 과제는 토지개혁이었다. 남코리아의 정치세력은 지주출신의 우익세력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있는 가운데 가까스로 <농지개혁>을 시행했으나 이는 남코리아농업이 망하는 시작이 됐다. 이승만정부의 재정은 주로 유엔군대여상환금과 미국의 원조로 제공되는 재화를 판매해 얻은 수입(대충자금)이었다. 유엔군대여상환금은 전쟁중 남정부가 참전유엔군이 필요로 하는 경비를 한국은행에서 빌려주고 그대가로 받은 달러였다. 1955년대중반 원조PL480호에 따른 미국의 잉여농산물도입으로 남농업은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수입잉여농산물은 당시 곡물생산량의 40%를 차지했고 농촌은 완전히 파괴됐다. 1953~60 정부총수입의 72.5%가 원조였다. 원조는 소비재와 원자재가 81%, 생산재와 시설재는 19%에 불과했다. 시설재와 원자재등을 미국에 의존하는 공업분야를 집중육성했는데 이른바 <수입대체산업화>로 이뤄낸 면방직·설탕업·밀가루제조업의 <3백공업>이었다. 이산업들은 값싼 원조물자를 독점으로 배정받아 가공판매했는데 소수자본가들이 시장을 독점하며 재벌로 비약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이승만은 일본기업을 싼값으로 불하했고 이들이 나중에 재벌로 됐다. 이병철은 정권의 특혜성자금지원등을 통해 제일제당·제일모직을 설립했다. 1950년대말 삼성그룹은 16개계열사를 거느린 재벌로 성장했다. 정부는 이산업들을 중점발전시킨다는 명목으로 보호무역정책을 실시했다. 또 당시 모든 금융기관이 귀속재산의 형태로 정부통제하에 있었던만큼 이승만정권은 이를 통해 금융통제정책으로, 저금리정책과 민간은행의 여신상한제·융자순위제등을 실시했다. 이승만정권은 저환율·고정환율을 통해 유엔군대여상환금의 양을 늘리면서도 고정환율로 달러를 싸게 구해 자유시장환율에서는 비싸게 유통해 엄청난 차익을 노렸다. 여기에는 이승만정권의 자금확보를 위한 정치적계산이 깔려있었다. <중석불사건>은 전쟁시기 세계적으로 수요가 컸던 텅스텐을 수출하고 받은 달러를 정부가 불법적으로 불하하면서 생긴 사건이다. 불하된 달러를 통해 환차익을 봤다. 이시기 금리정책이나 환율정책은 원조로 들어오는 달러를 부풀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승만정권의 경제정책·산업정책은 철저히 미국, 외세에 의존해 이승만정치집단의 이익을 위한것이었으며 산업의 기초축성이나 경제발전, 물가·민생안정에는 전혀 기능을 하지못해 <못살겠다,갈아엎자>는 외침을 불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