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이승만정부에 저평가된 달러가치를 절상할것을 요구했다. 이승만정부는 원조달러의 이익율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환-달러의 비율을 500대1로 묶어놓았다. 1960.2 미국측이 일방적으로 650대1로 인상했다. 장면정부는 수출경제를 추진하면서 1961.1.1 1000대1, 2.1 1300대1로 환율을 조정하고 4.11 수출시장개척비로 3억환예산계획을 발표했다. 박정희정권이 들어선뒤 1962 외환보유고가 2억500만달러에서 1963 1억2100만달러로 떨어졌다. 원리금상환을 고려하지않고 1961·62 들여온 단기상업차관때문이었다. 박정희정권은 미국의 압력을 받아 1964.5 원-달러환율을 130대1에서 255대1로 올렸다. 미국국제개발처(AID)·세계은행등은 수출지향적공업화전략을 세우도록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1963.1.1 수출입링크제라는것을 실시해 수출대금전액을 수입에 사용할 권리를 수출업자한테 부여하고 1965.3 단일변동환율제를 실시하면서 수출금융금리도 인하해 적극적인 수출장려정책을 실시했다. 미국의 대외원조법이 개정되면서 1958부터 종래의 무상원조를 개발차관으로 대체하는 방향으로 전환됐다. 1959~79 남코리아에 도입된 차관총액은 151억5900만달러였고 외국인직접투자총액은 15억6980만달러였다. 이기간 남이 받은 차관에서 국제금융기구차관이 20.7%, 미·일차관이 38%를 차지했고 외국인투자에서는 미·일자본이 77%를 차지했다. 남일협상결과 1965~69 일본차관3억5600만달러, 상업차관7800만달러가 도입됐다. 창원·거제·구미·포항등지에 공업단지가 조성됐고 미·일에서 중고설비가 대량 들어왔다. 한국비료·쌍용시멘트·한일합섬·대한조선·한국알미늄등 47개의 차관기업체들이 건설됐다. 일본기업체는 1960년대 33개였던것이 1970~74 5년간 230개로 늘어났다. 1970년대말 일본독점자본은 남코리아전기기기생산의 70%, 강판생산의 60%, 시멘트생산의 50%, 냉장고생산의 57%, 비료생산시설의 40%를 장악했다. 남코리아는 1977 수출100억달러 목표를 달성했다. 특히 1970년대 중화학공업이 수출경제를 이끌었다. 박정희정권은 각종정책특혜로 수출기업의 손해를 메꾸고 이윤까지 보장했다. <제살깎기식적자수출>로 1970년대 수출단가는 제조원가의 42~59%수준이었다. 이윤을 메꾼 재원은 결국 국가세금이었다. 반면 미·일자본은 남코리아로부터 헐값에 제품을 납품받아 제값에 시장에 내놓음으로써 엄청난 차액을 챙겼다. 수출기업의 생산성을 받쳐준 노동자들의 저임금, 농촌과 중소기업에 대한 차별등은 극심한 소득격차로 이어졌다. 1961 82달러였던 1인당국민소득은 1979 1636달러로 20배로 성장하고 이기간 연평균성장률 9.3%를 기록했지만 1980 경제성장률은 -1.9%로 뚝 떨어졌다. 통화량이 늘어나고 물가가 상승하면서 실업률이 높아지는 스태그플레이션현상을 보이면서 1970년대 중화학공업육성정책에 따라 과잉투자됐던 기업들이 줄도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