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세계대전에서 파쇼세력은 타승됐으나 제국주의세력은 큰 피해를 입었다. 국토가 화염에 휩싸였고 생활공간과 생산시설들이 파괴됐으며 민족해방운동세력이 장성해 식민지체제가 붕괴했다. 반면 2차세계대전의 전시이윤을 통해 상대적과잉생산공황당시의 경제위기에서 벗어나 경기를 완전히 회복한 미국은 경제적부를 바탕으로 브레튼우즈체제의 금본위제에 기반한 달러기축통화체제를 수립하고 전후복구건설시기 제국주의·자본주의세력의 정점에 서게 됐다. 소련은 2차세계대전의 반파쇼전쟁과정에 주변나라들에 대한 영향력이 강화됐다. 동유럽지역은 나치독일과의 전쟁으로 직접적인 영향력을 갖게 됐다. 이런 영향력은 세계적범위에서 사회주의·민족해방세력의 장성으로, 혁명의 대고조기를 열었다. 제국주의자들은 소련사회주의를 견제하지않으면 안됐다. 제국주의자들의 필요에 의해서 등장한것이 <냉전>이다. <냉전>은 열전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무력과 무력이 충돌하는 일반적인 전쟁과 달리 <총포성없는전쟁>, 저강도전쟁의 개념으로 볼수 있다. 1947.3 트루먼미대통령은 미의회에 그리스·튀르키예에 군사원조를 제공하고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자고 요청하는 연설에서 미국외교정책에 관한 원칙으로 공산주의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세계여러나라에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제공한다고 선언했다. 이원칙에 따라 그리스·터키의 반공정부에 군사·경제적으로 원조했다. 이해 마샬플랜<유럽부흥계획>으로 유럽경제의 복구를 위한 대대적인 지원정책도 결정됐다. 1949.4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의 군사동맹체제를 수립했다. 나토는 1949 소련의 핵무장과 1950 코리아전쟁을 계기로 곧 유럽연합군최고사령부(SHAPE)와 통합지휘체계를 갖췄다. 1950 매카시즘과 코리아전을 거치며 <냉전>은 확고해졌다. 소련과 미국의 강대국사이에 상호확증파괴(MAD)의 <핵균형>을 전제로 열전이 억제되지만 상호견제와 대립은 지속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소련은 전쟁의 확대를 피하기 위해 코리아전에 직접적인 참전을 피했으며 중국도 중국인민해방군이 아닌 중국인민지원군 이름으로 참전했다. 1962 <카리브해위기>는 미국이 튀르키예에 대소련미사일을 배치하자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려다가 갈등이 표면화된 사건이다. 이때 소련은 협상에서 패배하지않았지만 정치외교적으로는 패배했고 흐루시쵸프가 실각하는데까지 이어진다. 1960년대에 이르면서 미달러화위기가 심각해졌다. 미국의 정치경제적위기는 베트남전에서의 군사적위기로까지 이어졌다. 1970년대에는 3세계, 블록불가담운동이 고조되면서 미국의 국제외교적입지가 더욱 좁아졌다. 1975.12 코리아의 유엔사해체결의안이 채택됐다. 1971 달러의 금태환중지를 선언하고 1975 키신저가 사우디에 정치군사적지원을 약속하고 <페트로달러>체제를 세운다. 현대산업에서 빠질수 없는 석유를 고리로 다시 달러의 기축통화지위를 굳건히 했고 위기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1975 미국과 소련을 포함한 35개국이 유럽집단안보체제인 헬싱키협정에 서명했다. 소련은 이협정을 통해 냉전의 항시적인 대립과 긴장을 해소하고자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협정을 이행하는 과정에 소련은 붕괴했다. 소련·동유럽의 군사동맹체제인 바르샤바조약기구는 1991 소련의 붕괴를 앞두고 해체됐지만 미국·서방의 나토는 건재했고 오히려 더 확대됐다. 미국과 IMF(국제통화기금), WB(세계은행)등 국제금융자본집단은 1989 <워싱턴컨센서스>를 합의하며 미국식시장경제체제를 세계각국에 이식하자고 모의했다. 제국주의의 침략·약탈이 소련사회주의가 사라진 자리를 차지할 준비를 다그치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