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2 항쟁의기관차〉 고립주의의 완전한 탈피 미국중심의 글로벌체제 확립 

1929세계경제공황은 고립주의를 강화함과 동시에 미국의 안보전략을 <국가주도형>으로 바꿨다. 1933 루스벨트미대통령은 금본위제를 사실상 폐지하고 화폐가치를 인위적으로 조정하기 시작했다. 이는 대내적으로는 경기부양을 위한 조치였으나 대외적으로는 군수산업을 포함한 국가동원체제의 재정확보를 위한 조치기도 했다. 경제공황의 여파로 미국이 보호무역주의(스무트홀리관세법)를 채택하자 자원이 부족했던 일본과 독일은 각각 <엔블록>과 <생존권(Lebensraum)>을 내세우며 팽창을 시도하는데로 나아갔다. 미국은 이를 <경제적침략>으로 간주하고 일본에 대한 석유·철강수출중단(ABCD포위망)이라는 안보적단죄를 내렸으며 이는 진주만공습의 직접적발단이 됐다. 루스벨트는 나이위원회가 제기한 <은행가들의장부를위해피를흘리지말자>는 여론을 의식해 <돈을빌려주는것이아니라장비를빌려주는것>이라는 교묘하면서도 실리적인 프레임을 구축했다. 루스벨트는 <옆집에불이났을때호스를빌려주지않겠는가>라며 중립법의 핵심인 <무기수출과차관금지>를 무력화했다. 루스벨트의 <렌드리스(전쟁지원)>는 후불제·임대형식을 취해 영국·소련에 무제한 물자를 공급하도록 했다. 이런 논리로 시작된 전쟁물자공급은 1929공황이후 유휴시설이 된 미국공장들의 생산가동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이는 또 본격적참전전에 미국의 공업을 전시체제로 미리 전환시킬수 있었다. 이같은 렌드리스매커니즘을 <민주주의의병기창>으로 치장했다. 미국은 렌드리스를 대가로 영국에 <전쟁후차별적무역장벽철폐>를 요구했고 영국이 보유한 금과 미국내자산을 모두 매각할것을 요구했다. 이는 영국파운드화의 패권을 상실하는 결정적계기가 됐다. 1944 브레튼우즈회의에서 영국측대표였던 케인즈는 국제청산동맹(ICU)과 방코르(Bancor)라는 중립적통화를 제안했으나 미국은 이를 묵살하고 달러중심의 금본위제를 강요했다. 1941.12 일본의 진주만공습으로 인한 미국의 2차세계대전참전직전 이해 1월 루스벨트는 연설에서 2차세계대전참전의 명분으로 언론과표현의자유·신앙의자유·결핍으로부터의자유(경제권)·공포로부터의자유(국방권)를 내세웠다. 고립주의적인 미국내여론을 무마시키고 전쟁참여를 정당화한 핵심이념으로 알려졌다. 이런중에 1941.8 미영정상은 대서양회담에서 파시즘에 대항한 공동의 목표를 확립했다. 주요내용은 영토확장금지·민족자결·전후국제평화와안전을위한국제협력·경제적협력(자유무역)·공포와결핍으로부터의자유보장등이다. 이는 이후 1945 종전후 유엔의 창설로 귀결됐다. 루스벨트는 외교협회가 2차대전발발이후 꾸린 <전쟁과평화기획>팀과 국무부내에 구성한 <전후대외정책자문위>의 기획에 의존했다. 루스벨트사후 취임한 트루먼은 전후 가장 큰 위험을 소련과 사회주의세력으로 보고 1947 <트루먼독트린>을 발표, 사회주의세력의 확장을 막기 위한 <봉쇄전략>을 안보의 근간으로 삼았다. <마샬>계획(유럽부흥계획)을 통해 경제적으로,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를 통해 군사적으로 이를 실현했다. 1950 국가안보회의보고서 NSC68은 미국의 안보예산을 기존보다 3배이상 증액할것을 권고하며 전세계 어디서든 공산주의확장을 저지하기 위한 군사력증강과 전면적인 대결태세를 확립했다. 1953 취임한 아이젠하워는 경제적건전성을 국가안보의 기초로 보면서 <뉴룩>전략을 표방했다. 재래식군사력을 감축하고 핵무기의 압도적우위를 바탕으로 <대량보복>원칙의 <비대칭억제전략>을 내세웠다. 또 직접적군사개입보다 CIA를 통한 비밀작전과 상호방위조약(SEATO·CENTO등)을 통한 저비용·고효율의 안보망을 구축하려했다. 그런 그도 퇴임사에서 <군산복합체>의 위험성을 경고하지않을수 없었다.

- Advertisement -
The World Anti-imperialist Platfor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