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베트남전패배와 데탕트(긴장완화)의 실패, 이란인질사건으로 미국의 위신이 실추된 가운데 1981 출범한 레이건정부는 <힘을통한평화>를 기치로 내걸고 압도적군사우위를 바탕으로 한 공세적안보전략을 추구했다. 1983.3 소련을 <악의제국>으로 규정하며 강경한 대소정책기조를 주장하면서 소련핵미사일을 우주에서 요격하는 체계에 대해 밝혔다. 1983.11 미국과 나토는 핵무기사용을 가정한 전쟁연습<에이블아처83>을 진행했다. 코리아지역에서의 핵전쟁연습<팀스피리트>도 이시기 더욱 강화됐다. 이전략의 핵심은 SDI(전략방위구상), 이른바<스타워즈>계획이다. 이는 소련과의 <핵균형>, 상호확증파괴(MAD)체제를 붕괴시키고 기술적격차를 통한 절대적우위를 목표로 했다. 1980년대초 미국은 GDP의 약6~7%를 국방비로 투입하는 대규모군비확장을 단행했는데 이는 카터행정부시절대비 40%이상 증가한 규모였다. 미국방예산은 1980 1340억달러에서 1985 2527억달러로 급증했다. 군사적팽창으로 미국의 쌍둥이적자(재정·무역적자)가 심화되자 1985 플라자합의의 경제적조치를 일본·독일의 동맹국들에게 강요했다. 이러한 고강도군비경쟁이 고르바쵸프의<개혁>·<개방>과 <냉전>종식에 맞물려 레이건미대통령은 20세기에 획을 그은 사회주의혁명과 2차세계대전종전후 40여년간 지속된 냉전의 종식을 가져온 인물로 내세워졌다. 1985.3 새로 집권한 고르바쵸프소련공산당서기장은 이해 4월 미사일의 유럽배치중단을 선언하고 7월에는 더이상 핵시험을 하지않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1986.1 소련의 핵시험금지조치를 일방적으로 3개월 연장한다면서 지구상의 모든 핵무기를 앞으로 15년내 2000까지 없앨것을 주요내용으로 한 전면군축안을 제의했다. 이해 고르바쵸프는 아프간(아프가니스탄)전쟁에서의 철수도 발표했다. 1986.10.11 소미양국의 정상회담이 진행됐다. 회담은 고르바쵸프의 SDI제한요구로 인해 결렬된것으로 알려졌다. 1987 고르바쵸프는 SDI제한요구마저 철회했고 레이건도 탄도탄요격미사일(ABM)금지조약에 서명, 12월 소미양국은 워싱턴정상회담에서 중거리핵전력(INF)조약에 서명하고 4년뒤인 1991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에 합의했다. 이해 소련이 붕괴했다. 레이건정부는 고강도군비경쟁과 함께 저강도분쟁전략을 실시했다. 1985.2 연두교서에서 레이건은 <자유를위해싸우는이들을지원하는것은우리의권리일뿐아니라사명>이라며 아프가니스탄·니카라과등의 반군을 지원하겠다는 방침을 공식발표했다. 아프가니스탄·니카라과·앙골라등지의 반정부세력을 지원하며 사회주의의 확장을 저지하고 미국의 패권을 확대했다. <레이건독트린>으로 불린 저강도분쟁전략은 이전까지의 냉전전략, 트루먼독트린의 <봉쇄>전략이 이미 <공산화>된 지역을 붕괴시키는 <축출>개념으로 전환된것으로 평가된다. 1960년대 베트남전의 전면전에서 크게 패퇴하고 1970년대 수세에 몰린 미국의 냉전전략을 1980년대 <저강도전쟁>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시켰다고 보는것이다. 이는 1991 소련의 붕괴로 인해 역사적으로 더 강력한 호응을 얻게 됐다. 한편 1980 이란인질구출작전의 실패와 1983 그레나다침공작전의 지휘혼선을 겪으면서 미의회가 군개혁에 나섰고 1986 골드워터니콜스법을 통과시켰다. 법안은 국가안보전략(NSS)보고서작성을 의무화해 안보정책의 통제와 민주적책임성을 강화하며 <최상위전략지침서>로 안보전략이 국방부뿐아니라 범정부적차원에서 통일적으로 관철되도록 요구했다. 법안은 매년 보고서작성을 하도록 했지만 실제 매년 보고서가 제출되지는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