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8 항쟁의기관차〉 나라잃은 군인의 민족해방을 위한 삶과 투쟁

투쟁방략을 모색하던 나날

김원봉은 1898.8.13(음력)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김원봉을 부르는 다른 이름으로 대표적인것이 약산이다. 그외 최림·진국빈·이충·김세량·왕세덕·암일·왕석·운봉·김국빈·진충·김약삼등의 이름을 이명·변성명·통신암호명으로 사용했다. 김원봉의 아버지 김주익은 중농정도의 생활을 유지했다. 김원봉에게는 10명의 동생들이 있었으나 김원봉이 해방후 월북하자 보도연맹사건등으로 친동생 4형제가 처형됐고 김주익은 굶어죽었다. 김원봉이 태어날 무렵인 1897 조선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며 체제개혁을 단행했다. 허나 이미 국력은 쇠할대로 쇠했고 열강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있었다. 김원봉이 8세때인 1905 가쓰라·태프트밀약과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주권은 사실상 일본제국주의에 넘어갔다. 1909 안중근은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하며 조선민족의 반일저항의식을 만천하에 알렸으나 1년뒤 1910 결국 일제는 조선을 병탄하고 국권을 탈취했다.

1910.8 김원봉은 훗날 동지가 되는 윤세주등 마을친구들과 눈물을 흘리며 복수를 맹세했다. 1911.4 일왕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행사>가 밀양공립보통학교에서도 진행되자 김원봉·윤세주는 행사를 위해 준비해놓은 일장기를 학교화장실에 처박은뒤 학교를 자퇴하고 동화중학2학년에 편입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향후 김원봉이 의열단·조선의용대등을 조직·창설하는 역사적배경이 됐다.

김원봉의 유년시절에 큰 영향을 준 스승은 동화중학교의 전홍표교장이다. 김원봉은 전홍표의 <빼앗긴국토를다시찾고잃어버린주권을회복하기전에는우리는언제나부끄럽고,언제나슬프고,또언제나비참하다>는 말을 기억하며 항일투쟁에 나서게 된다. 김원봉·윤세주는 항일투쟁을 위해 체력단련을 하는 <연무단>을 조직했고 위인전·역사·지리·병법등을 공부했다. 결국 일제는 전교장을 위험인물로 지목해 학교폐쇄령을 내렸다. 1913 16세가 된 김원봉은 서울로 유학을 갔다. 고모부 황상규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황상규는 밀양의 대표적유지며 독립운동가다. 황상규는 이후 의열단결성에 주도적역할을 했으며 1920 총독부수괴암살·관청폭파를 목적으로 무기를 갖고 국내에 들어왔다 체포돼 7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 무전여행을 떠난 김원봉은 김철성·강택진과 같은 동지들을 만나게 되고 대한광복회등 항일단체의 회원들이 운동자금을 모집하면서 친일파·탐관오리들을 척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시기 김원봉은 <강력한무력으로써만비로소조선은강도일본의기반을벗어나자주독립국가가될수있다>는 신념을 굳혔다.

1916.10 19세 김원봉은 독일의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중국 천진에 있는 독일인의 덕화학당에 입학한다. 김원봉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있던 손일민·김좌진등을 만나며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생각을 무르익혔다. 이후 1차세계대전중에 중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중국에 있는 독일인들이 모두 국외추방되면서 덕화학당은 문을 닫는다. 김원봉은 독일로 갈 꿈을 접고 중국에서 무장세력을 형성해 일제와 싸울 결심을 한다. 1918.9 중국으로 떠난 김원봉은 1945 해방후까지 27년간 중국을 무대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당시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1.18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됐다. 김원봉은 동지들과 함께 변화된 국제정세에 맞춰 새로운 계획을 수립했다. 우선 서간도에 가서 군대를 조직하고 상해에서 잡지를 발간하며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려했다. 1919 상해에서 김구·여운형이 주축이 돼 조직된 신한청년당은 파리강화회의와 미대통령에게 독립청원서를 전달하는 외교활동을 전개했는데 김원봉은 외교적 방법에 회의적이었다. 김원봉은 <국가의존망과민족의사활이걸린큰문제를외국인에게호소해그들의결정을기다린다는것은결코할일도아니거니와해서도될일이아니다>·<열국이대체무엇때문에저희우호국과원수를맺어가며약소민족을위해싸워줄것이냐?도저히있을수없는일이다>라고 확신했다. 김원봉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내려한 이유는 외교적목적이 아니라 자객을 보내 일본대표를 암살해 조선민족의 혁명정신을 세계만방에 알리겠다는 의도였다. 김원봉은 김철성에게 그임무를 맡겼다. 김철성은 파리로 건너가 기회를 노렸으나 권총과 실탄을 도난당해 거사에 실패했다.

1919.3.1 거족적인 민중항쟁이 일어났다. 김원봉은 3.1항쟁의 자세한 소식을 전해 듣고 <독립선언서>를 읽으며 무척 실망했다. 무력항쟁이 아니어서다. 3.1민족대표33인은 민중의 폭력투쟁을 우려해 탑골공원에서 음식점<태화관>으로 장소를 바꿔 독립선언식을 치른후 경찰에 자진출두하는 굴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국내투쟁에 한계가 있다고 여긴 김원봉은 중국에 남아 이후 투쟁을 준비하며 신흥무관학교를 방문한다. 하지만 무관학교의 형편을 보며 무장투쟁의 한계를 절감한다. 당시 만주를 중심으로 전개된 무장투쟁들은 일부 성과적이긴 했으나 일제가 조선인들을 무차별학살하는것을 보며 김원봉은 당장 무장투쟁을 하기에는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의열투쟁을 결심하고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폭탄제조법·총기류취급법을 배우며 동지들을 규합했다.

폭력투쟁론에 기반한 의열단

김원봉은 황상규와 상의해 폭력투쟁론에 기반한 의열투쟁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소집단폭력투쟁은 한마디로 테러방식의 폭력 투쟁을 의미한다. 정규군이 부재하고 당장 대규모무장력을 갖추기 힘든 조건에서 선택한 투쟁방식중 하나다. 김원봉은 폭력투쟁을 통해 민중의식화·조직화를 추구했으며 <민중혁명>을 통해 일제를 타도하고자 했다.

의열단은 1919.11.10 중국길림성의 중국인농민 반가의 집에서 출범했다. 의열단명칭은 정의의 의(義)와 맹렬의 열(烈)을 취해 만들었다. 창단식에는 13명이 모였으며 이자리에서 김원봉이 맏형격인 <의백>으로 선출됐다. 일제문서에는 김원봉을 단장이라 지칭했지만 의열단내부에서는 <의백>이라고 칭했다. 창립단원들은 형제의 의를 맺고 조직규율로 <공약10조>를 채택했다. 마땅히 죽여야할 대상인 <7가살>과 5대<파괴대상>도 결정했다. 의열단은 <7가살>로 조선총독이하고관·군부수뇌·대만총독·매국적·친일파거두·적의밀정·반민족적토호열신(악덕지방유지)을 지목했다. <파괴대상>으로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매일신보사·각경찰서·기타외적 중요기관을 선정했다. <7가살>에 대만총독을 넣은 이유는 당시 대만이 일제식민지로 전락했으며 중국과의 항일연대를 중시해서다.

김원봉은 의열단활동이 고조되면서 의열단정신을 문서화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김원봉은 <선전이뒤를따르지않을때일반민중은행동에나타난폭력만을보고그폭력속에들어있는정신을이해하지못할것>임을 알고있었다. 김원봉은 1923 신채호를 만나 <의열단선언>을 요청한다. 신채호는 민족사학자이자 항일혁명가로 중국망명초기부터 무장투쟁론을 제기하며 임시정부와 맞섰던 인물이다. 신채호는 의열단의 폭탄제조시설을 돌아본후 <의열단선언(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다. <의열단선언>집필에 참여했던 유자명은 <의열단이성립된뒤로5년동안투쟁을계속했으나의열단본체의혁명적목표와정치적주장을발표한적이없어서의열단의이름이세상에드러나지못했다>며 <의열단선언>집필의 또다른 배경을 밝혔다. 의열단의 사상적정립은 김원봉이 신채호를 만나면서 사실상 완성됐다.

1923.6 상해에서 의열단총회가 개최됐다. 창단이래 첫단원총회였다. 이날 활동경과보고·투쟁방략논의와 함께 <활동수칙>이 배포됐다. 우선 의열단입단과 동시에 모든것을 희생하고 오직 <조선독립을위해결사모험으로써활동>한다고 밝혔다. 다음으로 검술·사격술·폭탄제조술·탐정술등의 기술연습·연구를 의무화했다. 이어 기밀·계획은 간부회의에서 지휘한다고 밝혔다. 4번째로 <활동중체포당하는단원이발생할때는반드시복수수단을강구하며,단원을체포하거나단원에게형벌을선고한자는반드시암살한다>고 명시했다. 다음으로 암살대상건물·파괴대상건물은 <의열단활동목표에근거하여실행>하며 망국의 대가로 부를 축적한 <조선귀족>이 의연에 응하지 않을 경우 <금년안으로처단>한다고 분명히 했다. 이어 <의열단의명의를더럽히는자는반드시엄벌>하며 <주요기밀사항은간부회의에서결의한후공표하지않고해당단원에게출동을명령한다>고 밝혔다. <활동수칙>을 통해 의열단은 단원에게 수준높은 혁명성과 능력을 요구하고있으며 조직성과 보안을 강조하고있다는것을 확인할수 있다. 대적관이 분명했으며 의열단의 명예를 중시했다는것도 알수 있다.

1926 의열단은 20개조강령을 채택한다. 20개조강령의 주요내용은 <일제통치타도·조선민족의자유독립완성>·<민주국건립>·<소수에의한경제제도소멸,생활상평등의경제조직건립>·<반제민족과연합·일제침략 주의타도>·<민중경찰조직·민중무장화>·<무제한의선거·피선거권>·<1군단위지방자치실시>·<여자권리남자와동등히할것>·<의무교육·직업교육국가경비로실시>·<일제자본몰수>·<매국노재산몰수>·<대지주토지몰수>·<농민운동자유보장·빈고농민에게토지등공급>·<공인운동자유보장·노동평민에게가옥공급>·<공공기관건설>·<주요산업국유화>·<잡세폐지>·<해외동포의생명재산보장·귀국동포의생활상안전지위부여>다. 1928.10 상해에서 3차전국대표자회의를 열고 1926 20개조강령을 수정·보완해 발표했다. 의열단은 구축왜노·광복조국·타파계급·평균지권등을 <최고이상>으로 재확인하며 자주독립과 반봉건·민주개혁을 강조했다. 또 <인민의자주·평등·복지권이철저히보장되는독립·민주국가의건설>이 최종목표임을 분명히 했다. 개정된 강령에서는 <피압박민족과연대하여투쟁한다>는 조항이 삭제됐다. 이는 당시 중국내전상황에서 중국내부문제에 관여하지않겠다는 의도였다.

민중직접혁명을 선언한 <의열단선언>

신채호가 작성한 <의열단선언>은 5개부문으로 구성돼있다. 1장서두에서 <강도일본이우리의국토를없이하여우리의정권을빼앗으며우리의생존적필요조건을다박탈했다>며 일제를 조선의 국호·정권·생존을 박탈해간 강도로 규정하고 이를 타도하기 위한 정당한 수단이 혁명임을 밝혔다. <3.1독립선언서>서두인 <오늘우리조선이독립국이며조선인이자주민임을선언한다.이를세계만방에알려인류평등의큰진리를환하게밝히며이를자손만대에알려민족의자립과생존의정당한권리를영원히누리게하려는것이다.>와 비교했을때 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혁명성이 더욱 강하다는것을 알수 있다. 조선에 대한 정치적지배만이 아니라 경제적수탈과 민족말살정책까지 짚으며 제국주의침략성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있다. 뿐만아니라 항일투사들에 대한 야만적인 고문·학살과 조선민중에 대한 억압·약탈에 대해 세세히 짚으며 일제총독정치의 야만성을 폭로했다.

1장은 온민족의 분노를 촉발하기에 충분했고 일제당국은 의열현장에 살포된 선언문을 수거하기에 급급했다. 1장은 <우리는일제강도정치,곧이족통치가우리조선민족생존의적임을선언하는동시에우리혁명수단으로우리생존의적인강도일본을살벌함이곧우리의정당한수단임을선언하노라>고 마무리하고있다.

2장에서 <내정독립이나참정권이나자치를운운하는자누구이냐?너희들이<동양평화>,<한국독립보전>등을담보한맹약이목도마르지아니하여삼천리강토를집어먹던역사를잊었느냐?…3.1운동이후에도강도일본이또우리의독립운동을완화시키려고송병준,민원식등12매국노를시키어이따위광론을부름이니이에부화하는자,맹인이아니면어찌간적이아니냐?>며 자치론·내정독립론·참정권론·문화운동론을 일제에 부역하는 적으로 규정하고있다. 이는 3.1항쟁이후 민족주의 우파세력이 개량주의운동세력으로 변질돼 총독정치외곽에서 연명한 결과 무장투쟁론이 급격히 쇠락하게 된것이 배경으로 작용했다. 신채호는 일제개량화책동에 부화뇌동한 민족주의우파세력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 그허구성을 낱낱이 깨고있다.

3장에서는 임시정부의 외교론·실력양성론·준비론등의 허구성을 비판하고있다. <<외교>가그제1장제1조가되며국내인민의독립운동을선동하는방법도<미래의일미전쟁·일로전쟁등기회>가거의천편일률의문장이었고,최근3.1운동에일반인사의<평화회의·국제연맹>에대한과거의선전이도리어2000만민중의분용전진의위기를타소하는매개가될뿐이다>며 외교론에 대해 비판했다. 이어 <경술이후각지사들이…십여성상내외각지에서목이터질만치준비!준비!준비!를불렀지만그소득이몇개불완전한학교와실력없는회뿐이다.그러나그들의성력이부족이아니라실은그주장의착오다.>라며 준비론에 대해 질타했다. 그러면서 끝으로 <우리는<외교>,<준비>등의미몽을버리고민중직접혁명의수단을취함을선언하노라>며 민중직접혁명을 강조했다.

4장에서는 구체적으로 민중혁명·폭력투쟁을 강조하고있다. <조선민족의생존을유지하자면강도일본을구축할지며강도일본을구축하자면오직혁명으로써할뿐이니혁명이아니고는강도일본을구축할방법이없다>고 전제하고있다. 이어 <금일혁명으로말하자면민중이곧민중자기를위하여하는혁명인고로<민중혁명>이나<직접혁명>이라칭함이며…우리혁명의제일보는민중각오의요구니라>고 민중을 강조했다. 신채호는 그방법론으로 <우리민중을환성(喚醒)하야강도의통치를타도하고우리민족의신생명을개척하자면양병십만이일척의작탄만못하며억천장신문잡지가일회폭동 만못할지니라>며 의열투쟁론을 내세웠다. 이어 신채호는 <조선총독및각관공서>·<일본천황및관공리>·<정탐노,매국적>·<적의일체시설물>을 암살·파괴·폭동의 대상물로 규정했다.

5장에서는 5개파괴·5개건설의 목표를 제시했다. 5개파괴대상은 이족통치·특권계급·경제약탈제도·사회적불평등·노예적문화사상이며 5개건설목표는 고유적조선·자유적조선민중·민중적조선·민중적사회·민중적문화라고 규정했다.

끝으로 <의열단선언>은 <민중은우리혁명의대본영>·<폭력은우리혁명의유일무기>라며 <우리는민중속에가서민중과휴수하야, 부절하는폭력-암살·파괴·폭동으로써,강도일본의통치를타도하고,우리생활에불합리한일체제도를개조하야,인류로써인류를압박치못하며사회로써사회를박삭지못하는,이상적인조선을건설할지니라>고 맺고있다. <의열단선언>을 통해 의열단은 항일투쟁노선이 더욱 정확해졌으며 사상·이론적으로 정립하는 계기가 됐다. 민중직접혁명론은 의열단의 향후진로를 규정했으며 노선재정립과 방향전환을 예고한것이었다.

의열단의 과감한 폭력투쟁

의열단은 1930년대까지 존재했으나 의열투쟁은 1920년대중반 에 사실상 마무리됐다. 저명한 소설가인 박태원은 <약산과의열단>을 통해 김원봉의 증언을 담고있다.

1차암살파괴계획은 1920.3 개시됐다. 파괴목적물은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조선은행·매일신보사였으며 암살대상은 조선총독이하 주요인물들이었다. 중국에서 권총·폭발물이 국내로 무사히 들어왔고 착실히 준비됐으나 사전에 비밀이 탄로나 관련의열단원들이 검거돼 실패했다. 의열단은 실패원인에 대해 <무기를국내에서구하지못하고국외로부터수송하는까닭>, <운동자금의부족>에 의한것으로 분석했다.

1차계획이 실패하자 김원봉은 이에 대한 복수를 준비했다. 그렇게 시작된것이 부산경찰서폭탄사건이다. 김원봉은 싱가포르에 있던 박재혁을 상해로 불러 부산경찰서장을 처단하라며 <죽이되그냥죽여서는안된다.제가누구손에무슨까닭으로하여죽지 않으면안된다는것을알도록단단히수죄한다음죽여라.>고 지시했다. 1920.9 박재혁은 고서상으로 위장해 부산경찰서장에 접근한다. 박재혁은 서장과 마주앉은 자리에서 폭탄을 가운데 놓고 터트렸다. 서장은 얼마안가 사망했으며 박재혁은 중상을 입은채 구속됐다. 임무를 마친 박재혁은 잡힌 첫날부터 단식을 결행했고 잡힌지 9일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부산경찰서폭탄사건이 있은지 2달후인 1920.11 밀양경찰서폭탄사건이 발생했다. 최수봉단원은 어린시절부터 김원봉과 가까운 사이였다. 밀양경찰서는 부산경찰서 못지않게 의열단원을 많이 검거한 곳이었다. 최수봉은 직접폭탄을 제조해 밀양경찰서장이 서원들을 훈시하던 방안에 폭탄2개를 연달아 투척했다. 최수봉은 단도로 자신의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했으나 실패했고 21세에 사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1921.9 조선총독부내 회계과에서 폭탄이 터지는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누구의 소행인지 밝히지못했다. 나중에 의열단원 김익상이 다른 폭력투쟁으로 구속되면서 조선총독부폭탄사건의 주인공임이 밝혀졌다. 김익상은 전기공으로 둔갑해 조선총독부에 잠입, 비서과·회계과에 폭탄을 던졌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불발됐으나 회계과에 던진 폭탄은 제대로 터지면서 총독부안은 아수라장이 됐다. 도망가던 김익상은 헌병·경관과 마주쳤으나 유창한 일어로 <위험하다.올라가지마라.>고 외치며 총독부를 빠져나왔다. 김익상의 의거로 국경일대가 삼엄해졌고 조선인신분으로는 무사히 빠져나올수 없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김익상은 자신을 검거하려는 순경에게 <일본신민과조선인하나분간을못한단말이오?…어제서울에는대사건이일어났오.좀정신을차리시오.>라고 오히려 면박을 주며 국경을 무사히 통과했다. 김익상은 1922.3 일육군대장 다나카기이치암살작전에 실패하면서 붙잡히게 된다. 이암살작전에는 김익상·오성륜·이종암 세사람이 동원됐다. 김원봉의 구상으로는 한사람이면 충분했으나 3명이 서로 하겠다며 양보하지않았다. 그래서 1명은 다나카가 배에서 내릴때, 1명은 다나카가 자동차로 향할때, 1명은 다나카가 차에 오를때를 노리기로 했다. 치밀하게 준비된 거사였으나 결국 실패했다. 1선을 맡은 오성륜이 다나카를 향해 총을 쏠때 갑자기 외국여성이 그앞을 지나가면서 총을 대신 맞아 즉사했는데 오성륜은 다나카가 맞은줄 알고 그자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친다. 2선을 맡은 김익상이 실패를 바로 알아차리고 총을 2발 쐈으나 다나카의 모자만 맞혔고 김익상·이종암이 던진 폭탄은 불발했다. 현장에서 김익상·오성륜이 체포됐다.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오성륜은 계획된 탈옥에 성공했으나 김익상은 총독부폭탄사건의 주범으로 감시가 삼엄해 탈옥하지못했다. 사형선고를 받은 김익상은 2번 감형돼 20년형을 살았다. 20년 복역후 출소했으나 한형사가 물어볼 말이 있다며 김익상을 끌고간후 끝내 돌아오지못했다.

1923.1 의열단원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 종로경찰서는 일제식민통치를 뒷받침하는 경찰력의 본산으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고문·탄압으로 악명높았다. 김상옥은 종로경찰서서편유리창을 뚫고 폭탄을 던져 경찰서안이 아수라장이 됐다. 경찰은 사건이 발생하고 5일이 지나서야 김상옥의 의거라는것을 알게 됐다. 김상옥은 의거직전 남긴 <만약실패하면내세에서보자.나는자결하여뜻을지킬지언정적의포로가되지않겠다.>는 말처럼, 수백명의 무장경찰에 대항해 10여명을 살상하고 마지막 탄환한발로 자결했다.

의열단은 이후 2차대암살파괴계획을 세우게 된다. 1919 의열단설립이후 끊임없이 암살·폭파계획을 세우고 실행해왔지만 희생에 비해 성과가 미비했다. 김원봉은 대규모 암살·파괴가 있어야한다고 여겼다. 김원봉은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조선은행·경성우편국·경성전기회사·중요철로간선을 파괴대상으로 삼았으며 암살대상으로 조선총독·정무총감·경무총감등을 지목했다. 김원봉은 사람과 무기 둘다 필요한 조건에서 이태준을 통해 헝가리인 마자알을 추천받게 된다. 마자알은 우수한 폭탄제조기술자이자 국제주의혁명가였다. 폭탄은 순조롭게 제작됐고 이시기 김원봉은 신채호를 만나 폭탄제조공장을 공개하고 <의열단선언>작성을 의뢰했다. 폭탄은 결국 국내반입에 실패하며 일제에 압수된다. 기록에 따르면 압수된 폭탄은 총36개로 파괴용·방화용·암살용으로 나눠져 있었고 그외 권총5자루, 실탄155발, 폭탄장치시계6개도 압수됐다. 폭탄은 모두 최신식이었다.

김원봉은 다시 국내에 무기를 반입하기 위해 현직경부인 황옥의 손을 빌리게 된다. 의열단원 유석현은 황옥의 밀정으로 둔갑해 서울에서 천진까지 황옥과 동행한다. 김원봉은 황옥을 만나 폭탄과 <의열단선언>을 국내반입할 결심을 했다. 김원봉은 황옥을 만난 자리에서 <우리계획이불행히패를보는일이있다하더라도황공은결코우리가이번에취한수단방법에관하여는일체발설을마오.한번드러나고보면같은방책을두번쓸수없는일아니겠소.> 라고 당부했다. 황옥은 무기반입에 성공하지만 의열단원인줄 알았던 밀정의 밀고로 결국 발각돼 실패했다. 황옥의 정체도 발각됐으나 황옥은 김원봉의 당부를 지키기 위해 의열단을 잡을 목적으로 접근했다고 주장하며 비밀을 함구했다.

의열단활동중에는 밀정처단활동도 있었다. 밀정은 항일세력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비밀을 탐지해 돈몇푼에 정보를 일제에 팔아넘겼다. 1925.3 의열단은 밀정중에 가장 악질밀정인 김달하를 처단했다. 의열단원 이인홍은 김달하를 포박한채 <사형선고서>를 낭독하고 수결을 시켰다. 그리고 새끼줄로 목졸라 처단했다. 3년후 북경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대상은 상해임시정부초대외무부장·군무부장을 지냈던 박용만이었다. 박용만은 일제와 내통한 변절자였다. 1928.10 의열단원 이해명은 박용만의 집에 찾아가 단총으로 박용만을 처단했다. 이해명은 현장에서 중국경찰에 의해 검거됐으나 중국법정은 이해명을 애국자라 판단해 4년형을 언도했다. 이해명은 출소후 황포군관학교를 거쳐 조선의용대활동을 했다. 이외에도 의열단은 수백 건의 폭발·암살사건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의열단이후를 모색하는 김원봉

의열단의 의열투쟁은 1924 도쿄거사를 끝으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후에도 여러건의 의열투쟁이 있었으나 대부분 개별적·산발적으로 진행됐다. 김원봉은 희생은 크고 성과는 미비한 의열투쟁을 지도하며 노선재정립과 방향전환을 모색하게 된다. 김원봉이 의열투쟁을 통해 기대했던것은 민중의 항일투지를 강화시켜 항일혁명을 촉발시키는것이었으나 실제 그렇게 되지못했다. 김원봉은 조직적이며 체계적인 민중의식화·조직화가 필요하다는것을 깨닫는다.

당시 중국국민당총리 손문은 광주에 황포군관학교·국립광주대학을 세웠다. 특히 황포군관학교는 국공합작의 결과물이자 소련지원으로 창설된 군사정치학교였다. 1926 김원봉은 동지들과 함께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한다. 교장은 장개석이었다. 이때 이후로 김원봉은 장개석과 연계를 맺게 된다. 김원봉은 장개석의 반공사상에 합의하지않았으나 훗날 창설되는 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의 주요자금줄이 장개석의 국민당이어서 자주적으로 조직운영을 할수 없었다. 황포군관학교의 교수진과 학생중에는 상당수 중국공산당당원들이 있었고 그로인해 김원봉은 공산당의 사상적영향을 받기도 했다. 황포군관학교는 1927.8 1차국 공합작이 파탄나면서 폐교됐다.

김원봉은 1926 유오한국혁명동지회(조선혁명청년동맹)를 결성해 <분파주의에대항해싸우고파벌주의를깨끗이청산한대중운동>을 지향했다. 1926.10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김원봉은 국민혁명군소위로 임관됐다. 황포군관학교시기는 김원봉에게 국민당정부측·공산당주요인사들과 두루 연계를 맺는 계기가 됐다. 의열단원들은 광주를 중심으로 조직된 <한국혁명청년회>·<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등에 참가해 주도적역할을 했다. 황포군관학교·중산대학에서 군사·이론교육을 마친 의열단핵심단원들은 그전보다 사상·정치수준이 향상됐다.

이들은 의열단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변경하고 당강령·정책을 마련했다. 조선민족혁명당은 광주에 중앙집행위원회를 두고 수창·남창에 지부를 뒀다. 비슷한 시기 중국국민당은 광주에서 2차 전국대표대회를 열고 장개석을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했으며 북벌전을 준비하고있었다. 조선에서는 6.10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의열단원 나석주는 식산은행·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고 자결했다. 임시정부는 김구중심체제로 전환중이었다. 김원봉은 1926 한국혁명청년회·무창혁명청년회를 조직했다. 무창혁명청년회는 항일청년세력을 통합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다. <민족혁명및사회혁명을도모>·<세계혁명군중과연합하여세계혁명을완성>한다는것이 그강령이었다. 일부의열단원들은 장개석의 북벌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장개석은 북벌에 성공하고 중국주요지역대부분을 장악하자 국민당내 공산당원을 축출하고 내부결속을 빌미로 <반혁명청당운동>을 벌여 2000여명의 공산당원·노동자를 학살했다.

김원봉은 상해에서도 벌어지던 국민당의 살육·약탈을 뒤로 하고 1927.4 무한으로 이동했다. 당시 상해와 북경에서 민족주의자·사회주의자간의 유일당운동이 활발히 논의되고있었다. 이곳에서 의열단원을 중심으로 독립당촉성회를 조직하고 <독립당촉성회운동선언>을 발표한다. 선언을 통해 김원봉은 <통일적지도기관의확립>·<개인자격으로촉성회가입>·<통일적지휘기관확립되면본단해체선언>·<대독립당출연시까지대독립당의주의와강령등에대한훈련에노력>등을 내세웠다.

이후 김원봉은 주은래가 중심이 돼 일어난 남창봉기에 참여했다. 1927.8.1 중국공산당군은 남창에서 국민당군과의 격전을 벌여 1만여명을 전멸시키고 승리했다. 중국공산당은 <혁명위원회>를 설립하고 혁명정강을 발표했다. 중국공산당사에 중요한 역사적사건인 남창봉기에 김원봉도 중국공산당편에 참전해 승리를 거뒀다. 김원봉이 중국공산당을 위해 싸운것은 남창봉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김원봉은 중국혁명에 피로감을 느꼈고 앞날에 대한 모색은 계속됐다.

이시기 김원봉은 의열단활동의 재정비와 협동전선운동을 준비하며 조선공산당책임비서였던 ML파 안광천을 만났다. 김원봉은 안광천과 1929 북경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했고 안광천이 위원장을 맡았다. 김원봉은 안광천에게 사상적영향을 받으며 과거 아나키즘·민족주의에서 사회주의적경향으로 변화하게 된다. 1929 의열단은 <3.1운동10주년선언>을 발표했다. 선언문에서는 <3.1운동이후10년동안대일투쟁에서얻은것이무엇이냐>며 항일운동진영의 취약성과 국권회복실패의 근본원인을 분석했다. 우선 독립운동이 농민·노동자를 바탕으로 하지않으며 대중투쟁을 조직화하지못한데서 그원인을 찾았다. 그러다보니 독립운동의 전투성이 결여됐고 민족주의·사회주의간의 파벌적대립으로 독립운동세력이 약화됐다고 분석했다. 다음으로 외교론·실력양성론·민족개조론·자치외교론에 경도돼 폭력투쟁을 경시해서라고 봤다. 그러면서 분열주의·반폭력주의·개량주의·타협주의를 타도하고 노동대중중심의 조직적투쟁으로 광범위한 통일전선을 이뤄야한다고 밝혔다.

조선혁명간부학교설립과 김원봉의 위상강화

1931.10 김원봉은 의열단5차임시대표대회를 소집해 국민당정부지원을 받아 항일투쟁을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일제는 1931.9 만주사변 1932.1 상해상륙을 벌이며 중국을 전방위적으로 침략했다. 국민당정부는 이러한때 <외부의적을몰아내기위해서는내부의단결이시급하다>는 미명아래 공산당토벌에 집착했다.

김원봉은 변화되는 정세를 지켜보며 일제침략을 호기로 삼으려했다. 당시 중국인들이 조선독립운동가들을 외면하거나 일제앞잡이로 잘못 인식하기도 했는데 이를 극복할수 있는 계기라고 여겼다. 김원봉은 남경에서 황포군관학교출신들과 접촉해 중국국민당정부의 의열단지원을 요청했다. 김원봉은 단기교육훈련 과정을 두고 중국군초급장교수준의 조선인군사정치간부를 육성해 만주·관내지역과 국내각지의 대일공작에 투입할 목적을 가지고있었다. 이계획에 필요한 예산은 장개석의 승인하에 국민당정 부측의 지원이었다.

김원봉이 장개석의 지원을 받은것에 대해 당시에도 비판이 있었 다. 김원봉은 사상적으로 사회주의영향을 받고있었지만 장개석은 대표적인 반공주의자였으며 실제 성시백을 비롯한 조선인혁명가들이 남경감옥에 수감돼있었다

이에 대한 김원봉의 속내는 장개석암살작전에 대한 입장을 통해 일단이 드러났다. 김원봉은 <장개석이를해치우는건우리의급선무가아니다>·<그자의속셈은우리를이용해보자는거다>·<일본제국주의를타도하기위해서는조금이라도유리한조건이면어떤거나다이용해야하지않겠소>라며 장개석암살작전을 막았다. 김원봉의 말에는 자금문제의 심각성과 사상·실천적인 불철저성이 비껴 있었다.

1932.10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가 설립됐다. <중국국민당군사위원회간부훈련반제6대>라는 또다른 명칭을 사용해 국민당 운영시설로 위장하며 일제의 이목을 돌렸다. 입교식장에 손문· 장개석사진과 태극기·중국기가 걸렸다. 김원봉은 개교사연설에서 <의열단이과거흘린피의대가로얻은결과인동시에현재혈전교섭의결과성립된것>이라며 <중·한민족은절대적으로제휴하여동삼성을탈환함으로써조선의독립을달성해야하는바,이목적하에제군은본교에서열심히기술을습득하고학습을연마하여장래의발전을기약하도록하라>고 강조했다. 김원봉은 교관자격으로 <조선정세와의열단의임무>·<금후조선혁명운동에대한방침>등을 강의했다. 김원봉은 <조선정세와의열단의임무>에서 각계급을 분석했다. 노동계급에 대해서는 <조선혁명에있어서가장전투적인계급이고제일선에선전위대>라고 규정했다. 농민계급에 대해서는 <장래노동계급의동맹군으로서계급혁명에동원될가능성을많이가지고있다.농민은지주와투쟁을전개하면서아울러프롤레타리아혁명을절실히요구하는계급>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노동계급·농민은 <계급혁명에대한선봉대가돼야한다>고 강조했다. 지주의 토지몰수에 대해서는 <전술상500석이상을추수하는지주의토지 를몰수>해야한다고 밝혔다. 토착부르주아와 지주계급에 대해서는 <조선독립의단계까지는행동할가능성>에 주목하며 전술적관계를 중시했다. 소시민계층에 대해서는 <조선혁명의마지막단계까지전투적역할을다할중요성을가진계급>으로 분석했다. 총독부관리층은 <조선혁명운동에있어서완전히반동적이고일제에대한 철저한귀화분자>로 민족주의자는 <완전히혁명세력>이지만 <변동하는세계정세와국내정세에는캄캄하다>고 봤다.

김원봉은 <금후조선혁명운동에대한방침>을 통해 <이론조직은혁명운동에있어서수단일뿐이고직접혁명을전취하는것은오직무장이다>며 무장투쟁론을 강조했다. 또 <프롤레타리아정권없이는진정한조선혁명은없다>·<일러전쟁은조선혁명에있어서중대한조건이되는것이다.우리는러시아를적극적으로지키고일본의후방전선을파괴하여러시아를승리케해야한다.일본을파괴하면조선의혁명은어렵지않다.>고 밝혔다

김원봉의 강연에는 안광천과 같은 초기사회주의자들에게서 보이는 사대주의·교조주의의 사상적한계가 드러났다. 김원봉이 사상·이론적으로는 불완전하나마 사회주의적성향을 띠고있으나 실천은 중국국민당정부의 영향하에서 전개되며 좌·우경적오류를 범하게 되는데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1934.4 김구가 조선혁명간부학교를 방문해 조선해방은 소·일 전쟁이 개시될때 가능하다고 해설했다. 김원봉은 국제정세추이상 미·일전쟁이 일어날거라 예견했으며 여기에 소련이 참전하면 조선독립이 가능하리라 내다봤다.

조선혁명간부학교졸업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김원봉에게서 임무를 부여받았다. 김원봉은 <만주와국내각지에의열단지부조직, 활동기반확보>·<노동자·농민·학생대상으로사상통일·실력양성에주력해이들을향후활동에주력으로삼을것>·<각급민족운동단체를통일단체로규합해주도권장악>·<혁명간부학교입교생모집활동>등을 임무로 주며 졸업생들을 만주·국내에 파견했다. 김원봉은 1932.10~1935.9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운영하며 총125명의 독립운동가를 양성했다. 이는 1930년대 중국지역에서 김원봉의 활동을 가능하게 해준 동력이 됐다. 특히 3기졸업생상당수는 파견되지않고 민족혁명당에 참여하면서 김원봉의 지도력을 뒷받침했다. 125명의 독립운동가들은 김원봉의 인적자원으로 중국관내에서 김구진영을 제외하고 가장 막강했다. 김원봉은 의열단장에서 중국관내지역독립운동지도자의 위치까지 올라섰다.

한편 김원봉은 1931 항일여성운동가 박차정과 결혼했다. 박차정은 광주학생운동의 연장인 서울지역11개여학교시위투쟁을 배후지도하다 1930.2 동래에서 검거돼 고문을 받았고 불기소로 석방됐다. 이후 계속되는 감시로 중국망명에 올랐다. 박차정은 국내에서의 항일운동공로를 인정받아 <조선공산당재건동맹>중앙위원·의열단핵심단원이 됐다. 1931 김원봉과 결혼하고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여자교관으로 활동했다. 이후 김원봉과 정치적행보를 함께하며 조선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에서도 중임을 맡았던 박차정은 1939.2 강서성곤륜산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게 된다. 그후유증으로 1944.5 중경에서 사망했다. 김원봉은 해방후 귀국하면서 박차정의 유골을 가져와 경남밀양 감전동뒷산에 안장했다.

민족혁명당의 창당과 좌절

1935.7 남경에서 조선의 5개독립운동단체가 통합해 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 중국에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은 민족유일당운동을 전개하고있었으나 사분오열돼있었다. 거듭된 노력의 결과 1931 안창호·이동녕·최동오등은 상해에서 독립전선통일동맹을 출범하고 1932.10 상해에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했다. 통일동맹에는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1지부·한국광복동지회·한국혁명당·의열단이 참가했다. 통일동맹은 단일대당운동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결성운동을 추진했다.

1935.7 중국남경에서 민족혁명당이 창당됐다. 1935.6 9개혁명 단체가 모여 대표자대회예비회의를 개최했으나 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의열단·대한독립당만 <무조건해체합일>에 동의했다. 5개단체대표 5명으로 축소위원회를 구성해 조직절차·명칭을 정하고 당의·당강·정책·당장을 기초했다. 민족혁명당은 통일전선적성격의 당이었다. 우선 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대한독립당은 반공노선이 뚜렷한 우익정당이었다. 의열단은 사회주의이념성향을 가진 민족주의좌파조직이었다. 민족혁명당은 민족통일전선운동에서 일정정도 성과를 이뤘으나 통일의 범위가 중국관내지역과 미주로 국한됐고 대중적기반이 미약하다는 한계를 가지고있었다. 임시정부요인들은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지않았다. 민족혁명당창당의 핵심세력이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의열단계열이며 신당창당세력의 일부가 임시정부해체를 주장해서다.

민족혁명당은 12개강령과 17개당면정책을 내세웠다. 민족혁명당은 강령을 통해 <민주공화국설립>·<일제잔여세력·친일반동분자철저히숙청>·<인민의언론·출판·집회·결사·신앙의자유보장>·<조선경내에있는일본제국주의자·매국역적·반역자의모든공사재산과대기업몰수,국영으로전환,농민에게토지분배>·<생산소비합작운동·인민기업경영권보호>·<징병제실시>·<노동시간단축·사회보험제도실시>·<남녀의경제·사회적권리지위평등>·<아동보육제도·어린이노동자제도금지>·<의무교육·직업교육·사회보험제도>·<조선민족문화보급·과학기술발전>·<일본침략세력재기방비·극동의견고하고지속적인평화>를 내세웠다. 중앙집행위원회에는 서기부·조직부·선전부·군사부·국민부·훈련부·조사부를 산하에 뒀다. 민족혁명당은 창당선언문을 통해 <대전이다가오고있다.우리민족의존망문제는여기서결정될것이니이때우리들은반드시민족의혁명역량을공고히하고중화민족과긴밀히협조하며더나아가우리에게동정적인모든민족과연합하여반일전선의동맹을이룬후에우리의최후승리를위해분투하고희생해야만할것이다.>고 강조했다.

민족혁명당총서기로 선출된 김원봉은 <중국민족항일전쟁중조선국내혁명동지들에게고하는글>을 통해 자신의 의지와 사상을 밝혔다. 김원봉은 글에서 조·중간의 상호의존·상부상조해온 역사를 짚으며 정치적연합을 강조했다. 특히 중국의 항일전쟁을 중국국민당중심으로 분석했다. <중국의항일전쟁은잃어버렸던땅을되찾아회복하기위한것이고일본제국주의를대륙에서하나도 빠짐없이몰아내기위한것이며동시에조선독립의실현을반드시보장해줌으로써반세기동안해결하지못했던오래된화근을청산하는것이중국민족지도자장개석선생의의지이고전중화민족의일치된 결심>이라고 언급했다. 김원봉의 말속에는 국민당과 장개석에 대한 환상이 담겨있다.

김원봉은 향후방향에 대해 <전민족의통일전선을건립하고일본강도를타도하기위해연합해야>·<대중을중심으로신간부의조직의기초를강화해야>·<타협주의및개량주의자들간의투쟁은일시적으로방임할수없다>·<혁명의결정적인승리는군중의무장총궐기에달려있다>고 밝혔다. 이어 혁명강령에 대해 <일본제국주의타도>·<친일파등반동세력제거>·<독립된민족국가건립>·<민주적정권확립>·<적군일체의공적,사적재산몰수>·<민중생활개선>·<중국민족및세계반침략세력과공동연합해투쟁>을 강조했다

민족혁명당은 통일전선적당으로 출범했으나 얼마안가 분열된다. 당의 실권을 사실상 의열단인 김원봉·김두봉이 장악한것이 화근이 됐다. 창당 2개월만에 한국독립당계가 탈당했으며 곧이어 신한독립당계도 탈당해 재건독립당에 참여했다. 김원봉은 오히려 주요간부에 의열단계열을 충원하는등 세력확장으로 맞섰고 이는 이청천세력과의 갈등으로 번졌다. 분파성으로 인해 민족혁명당의 통일전선적성격은 훼손됐고 민족혁명당은 의열단확대조직으로 변질됐다. 이는 민족혁명당이 의열단을 계승해 적의 요인암살·파괴활동에 나선것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1937 노구교사건과 중일전쟁이 터지자 장개석은 김구·김원봉·유자명을 초청해 조·중항일연합전선구축을 제안하고 재정지원을 약속했다. 김원봉은 민족혁명당당원들에게 중일전쟁에 적극 참여하도록 명령했다. 1938.5 민족혁명당3차전당대회가 열렸다. 당내 분파적행위로 당세는 더욱 약화됐다. 김원봉은 조선의용대창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조선의용대 창설

노구교사건을 계기로 중국국민당·공산당은 2차국공합작을 이루게 된다. 일제는 초반 선전포고 없이 총공격을 개시해 북경·천진·남경등을 점령하고 30만명이 넘는 중국민중을 학살했다. 진격하는곳마다 계속되는 살육만행으로 도시·농촌에서 1200만명에 달하는 중국인이 학살됐고 친일파를 내세워 남경에 괴뢰정부를 조작했다.

이런 정세를 반영해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군관학교출신 100여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원봉은 1938.7 조선의용대창설계획을 중국군사위원회정치부에 제출했다. 군사위위원장은 장개석이었으며 부부장은 주은래였다. 주은래는 팔로 군판사처책임자이기도 했다. 중국정부는 조선의용대를 정치부에서 관할한다는 조건하에 창설을 승인했다. 김원봉은 김구가 지도하는 광복단체연합회에 함께 할것을 제안했으나 김구측은 이를 거부했다. 1938.10.10 한구 중화기독청년회관에서 조선의용대결성식이 개최됐다. 김원봉은 대장으로 추대됐다. 김원봉은 <중국혁명이완성되지못함으로써일제의조선에대한압박과착취가날로심하며조선민족이해방되지못함으로써일제의중국대륙침략이더욱포악해졌음이사실이다.조선의용대의기치를높이들고중국형제들과굳게손잡고최후의일각까지분투하자.>·<우리의역량이작다고깔보아서는안될것이다.조선3000만민중은모두우리의역량>이라고 연설했다.

조선의용대는 김원봉이 1940 2주년대회에서 밝힌대로 <조선민족해방의선봉대가돼조선민족해방을쟁취>·<중국전장상의하나의국제종대로서국제우인의모습을보여주는것>을 임무로 창설됐다. 조선의용대는 총대부13명·1구대43명·2구대41명으로 편제됐다. 김원봉은 기관지<조선의용대통신>에서 조선의용대창설 의의에 대해 <완전한중국항전승리와동방각민족의영원한우의적연합을위한것>이라고 밝혔다. 조선의용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창군을 자극했고 나중에는 광복군인적자원을 보충했으며 조선독립동맹산하 조선의용군의 조직적기초가 됐다.

김원봉의 <주체적·독립적무장부대>구성에 대한 지향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조선의용대는 국민당정부군의 지원부대라는 제한적지위·임무를 부여받았으며 매월 식비·공작비를 중국측에서 지급받으며 중국군사당국의 간섭을 받았다. 실제 활동에서 중국군과 유격전·합동작전을 전개하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후방지역의 전지공작(일본군에 대한 반전활동과 인원충원을 위한 공작활동)에 투입됐다. 중국군과 달리 무장한 군대가 아니었으며 주로 포로심문과 전지공작에 종사하며 보조적역할이 주어졌다.

이는 1930년대중반에서 1940년대 만주를 중심으로 자체무장력을 가지고 대규모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김일성부대와 뚜렷이 대비된다. 이러한 차이는 조선의용대의 다수가 화북지역으로 이동하게 되는 계기중 하나가 됐다. 당시 국민당정부는 공산당세력타도에만 전력을 쏟고 대일항전을 도외시하며 그반동적정체를 가감없이 드러내고있었다. 반면 화북지역의 팔로군은 치열하게 일제와 싸우고있었다. 조선의용대의 젊은대원들은 만주·화북에 근거지를 구축해 동북지방 조선무장부대와 연합해 일제와 싸워야한다고 주장했다. 1940.11 1차확대간부회의에서는 2년여의 활동을 평가하고 자체무장결여·자력갱신정신결핍등의 문제를 지적하며 <조선동포다수거주지역(화북·만주)으로진출>·<대의자체무장화를통한항일무장대오건립>·<정치선전공작으로부터전투공작으로공작중점변경>·<국민당정부군지원활동은대일선전간부훈련에치중>이라는 4가지사항을 결정했다. 김원봉은 <조선의용대창립3주년기념>글에서 <화북의20만동포를조선의용대깃발아래로단결시키는동시에,동북의조선무장대오와긴밀한연계를취함으로써멀지않은장래에강고한통일된조선 민족의무장대오를건립할수있고,이로써조선민족의자유해방을쟁취할수있을것>이라고 역설했다

중국공산당의 영향하에 조선의용대는 화북지방으로 이동하게 되고 그과정에서 김원봉은 화북행에서 배제된다. 일각에서는 중국공산당이 김원봉의 지도력을 경계해 취한 조치라고 분석한다. 김원봉의 친국민당행보는 중국공산당이 김원봉의 화북행을 경계하기에 충분한 요인이었다. 한편 중경내 망명객가족의 생계보장을 위해 김원봉이 중경에 남았다는 설도 있다. 이들의 생계는 국민당정부지원금에 의해 보장돼왔다. 화북으로 간 조선의용대는 태행산맥일대 팔로군구역으로 들어가 연합활동을 했다. 이들은 일본군과 직접전투를 하며 치열하게 투쟁했다.

임시정부와 김원봉

1941 김원봉은 민족혁명당5기4차당중앙회의를 열어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로 결정한다. 조선의용대일부는 광복군1지대로 편입됐고 김원봉은 군무부장에 취임했다. 한국광복군은 1940.9 중국 사천성중경에서 창설됐다. 재정적으로 매우 어려웠으나 김구의 노력으로 1941.11 중국정부로부터 군사원조를 받게 됐다. 여기에는 <한국광복군행동준승9개항>이 조건부로 붙었다. 즉 한국광복군이 중국군의 일부로 편입돼 중국군참모총장의 명령과 지휘감독을 받으며 임시정부는 명의상으로만 통수권을 갖는것이었다. 망명정부로서 자체무장력을 갖추지못해 발생한 굴욕적처사였다. 1941.3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본부대원 10여명을 이끌고 중경으로 갔으며 임시정부는 1942.4 28차국무회의를 통해 조선의용대의 광복군합류를 결정했다. 김원봉이 임시 정부에 참여하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임시정부측은 오래전부터 김원봉세력을 <공산주의자>라며 배척했다. 김원봉이 주도한 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여러조직에 임시정부가 참여하지않거나 배타적이었던 이유다. 그렇기에 김원봉의 임시정부참여는 민족주의우파세력과 좌파세력간의 연합으로서의 의의가 있었다

한편 1939.5 김구·김원봉은 이미 전국연합진선협회를 결정해 단일전선결성을 시도한바 있다. 이들은 <동지동포에게보내는공개통신>을 통해 <우리들은이미각소단체의불립투쟁으로인한민족적손해를경험하고통일단체에의한광명을발견한이상,한시 바삐완전하게일체가되어단결하지못할어떠한조건도있을수없음을확신한다>고 밝혔다. 김원봉의 임시정부참여과정에서 국민당의 입김이 작용하기도 했지만 김구의 노력도 컸다. 김구는 조선의용대와 민족혁명당본부를 직접 찾아가 대원들을 설득했으며 우파진영과 교민들의 반대에도 통합을 추진했다. 김원봉은 1942.12 광복군부사령관에 취임했다. 김원봉은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합류하며 <우리의무장역량을집중통일하기위한조선의용대의한국광복군합병은우리운동의진보와발전을의미하는것이라고함께인식할것이며또함께치하할바라고믿는다>라고 밝혔다.

1944.4 개최된 36차회의에서 임시정부는 임시약헌을 임시헌장으로 개정하고 국무위원수도 늘렸다. 김원봉은 임시정부의 국무위원·군무부장에 임명됐다. 이로써 임시정부수립 26년만에 처음으로 통일전선내각이 수립됐다. 임시정부는 성명 <국내 외동포에게고함>을 발표했다. 이성명서에서 임시정부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만주지방과 조선의용대가 있는 화북지방을 포함하는 모든 민족해방운동전선을 통합해 일제와 싸울것을 천명했다. 민족혁명당은 5기7차중앙회의에서 <정식선언>을 채택하고 한국독립당과의 합작과 임시정부의 확장을 주장했다. 김원봉은 대의를 쫓아 임시정부에 합류했지만 정치적입지는 줄어들었다. 군무부장·광복군부사령관등의 위상은 내실이 별로 없었으며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은 김구중심의 민족주의우파세력이 장악하고있었다. 중국정부는 1943.3 <정부는마땅히임시정부를,당은한국독립당을,군은이청천의광복군을원조한다>고 방침을 정하면서 김원봉은 중국국민당의 지원에서 소외됐다. 김원봉은 자신의 정치적입지를 위해 미·영과 직접 연계를 맺고자했다. 임시정부측은 이를 경계했고 한국독립당과 광복군사령부우파세력은 군무부장인 김원봉을 배제한채 <한·미연합작전>을 추진했다. 김구도 <김원봉과민족혁명당같은공산주의자들을끌어들여 중요한계획이무산되는것을원하지않는다>며 김원봉을 배제시켰다. 여러제약속에서도 김원봉은 영국군과 접촉해 1943.5 영국군과 조선민족혁명당간 12개조협정을 맺었다.

미완의 광복과 불가피한 월북

1945.8.15 일제가 패망했다. 현장증언에 따르면 <우리조선사람들은두가지다른표정을보여줬다.그하나는연합군의승리로일제로부터해방됐다는기쁜감정과,자신의힘에의한쟁취가아니라연합국힘에의해일제로부터해방된것이라는서운함이었다.>라고 당시 임시정부측의 심경을 표현했다. 김원봉도 <이역만리에서해방된조국을생각하며하루빨리귀국하려해도그자유조차없으니기쁨의감격도순간이며오히려해방된조국의장래가그때부터걱정됐다>고 했다.

김원봉은 8.17 중경에서 중국국민당비서장에게 자신이 구상하는 정부수립방안을 밝혔다. <임시정부가주도하는민선정부수립>·<모든독립운동단체가공동으로조직한임시정부관장하의선거를통한민선정부조직>·<과도정부성격의군정부조직>등이었다. 귀국후 임시정부위상과 자격문제에 대해서는 정파간논쟁이 있었다. 한독당계열은 임시정부조직을 그대로 갖고 귀국하자고 내세웠고 김원봉·민족혁명당측은 임시정권을 인민에게 도로 돌려주는 <간수내각안>을 제시했다. 김원봉은 임시정부가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민중의 뜻을 따를것을 주장했으나 결국 두세력간의 합 치점을 찾지못했다.

10.10 민족혁명당은 9차전당대표대회를 열고 선언문을 통해 <조국이사실상남의힘에의해해방됐고>·<중경임정이전쟁기간동안민족해방운동의영도기구로역할을못했을뿐아니라연합국의승인을받지도못했으니>·<얄타회담의원칙에따라국내의민주단파영수대표회의를소집해전국통일임시연합정부를건립해야한다>고 밝혔다.

임시정부측은 미국으로부터 개인자격으로 귀국할것을 강요받았고 해방된지 3개월이 지난 11.23 김구등 15명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김원봉은 12.2 2진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서울에 도착한 김원봉은 임시정부군무부장자격으로 귀국인사를 했다. 김원봉은 <금후정치는인민을행복스럽고자유스럽게하기에힘쓸것은물론입니다>·<해외에서자유스럽게지내온우리들은오히려편안하였다고할수있습니다>라며 겸손하게 귀국인사를 했다

12.8 전국농민조합총연맹결성대회장에서 김원봉은 처음으로 대중앞에서 정치연설을 했다. 김원봉은 <우리의투쟁대상은일제가아니라일제대리인>·<나는군인이다.우리의군대는농민의군대다.>·<나는일개군인으로농민운동을지지한다>고 밝혔다. 김원봉은 해방정국에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설립한 조선인민공화국의 군사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미군정에 의해 인민공화국은 결국 해체됐다.

미군정에 의해 남코리아가 식민지화된 조건에서 12.26 전국군사준비위원회전국대회가 서울중앙중학교강당에서 열렸다. 공동명예의장중 1인으로 선출된 김원봉은 <국군은친일파민족반역자의군대가되지말고이들을배제한군대가돼야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1946.1 김원봉은 조선국군학교를 중앙육군학교로 개칭했다. 당시는 찬탁·반탁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김원봉·민족혁명당은 김성숙·조선민족해방동맹과 함께 비상국민회의주비회가 우익진영으로만 형성돼 민족의 분열을 격화시킨다고 여겨 비상국민회의주비회를 탈퇴했다. 이어 김원봉은 임시정부에서도 탈퇴한다. 임시정부측은 반탁운동을 주도하며 2.1 비상국민회의를 열었다. 진보진영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결성을 추진하자 미군정은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회를 <남조선대한민국대표민주의원>으로 개편해 미군정사령관의 자문기관으로 삼으려 했다. 민주의원은 의장 이승만, 부의장 김구·김규식을 선출했다. 김원봉등은 임시정부의 변절에 분노하며 임시정부를 탈퇴했다.

김원봉은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했다. 민전은 <모스크바3상회의총체적지지>를 주장하며 친일파·민족반역자등을 배제한 민주주의민족통일체임을 선언했다. 김원봉은 연설을 통해 <모든민중단체와전조선3000만을이민주주의민족전선의기치하에집합시켜야할것>·<이회의임무는민주주의정권을수립하는과도적의회를수립하는것>·<남북일절을규합하여속히임시국회를열어강력한우리의통일정부를수립하도록하여야할것>을 강조했다. 김원봉은 창립대회에서 의장단의장으로 선임됐다.

1947.3.22 김원봉은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지시로 총독부악질경찰출신인 노덕술에 의해 검거됐다. 당시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주도로 24시간 총파업이 단행됐는데 미군정은 민전과 그산하단체들을 일제히 습격해 2000여명을 검거했다. 김원봉의 혐의는 포고령위반이었다. 김원봉은 노덕술과 친일주구경찰들에게 온갖 수모와 고문을 당했다. 김원봉은 전의열단원 유석현에게 가서 꼬박 3일을 통곡하며 <내가조국해방을위해중국에서일본놈과싸울때도이런수모를당하지않았는데해방된 조국에서악질친일파경찰손에수갑을차다니,이럴수가있소>라며 분노를 터뜨렸다.

1947.6 민족혁명당은 10차전당대회에서 당명을 인민공화당이라 바꾸고 정치노선으로 신탁통치(후견제)지지를 확정했다. 이해 7월 여운형이 암살됐고 8.3 여운형인민장장례위원장을 김원봉이 맡아 장례식을 주관했다. 여운형의 장례식은 김원봉이 남에서 활동한 마지막 공개활동이었다. 김원봉을 향한 테러·구속 위협이 시시각각 자행됐다. 8.12 미군정경찰은 김원봉을 잡으려했지만 김원봉은 이미 피신하고 없었다. 경찰은 김원봉등이 8.15기념대회를 가장해 폭동을 일으켜 공산당정권을 수립하려 한다는 혐의를 들씌워 계속 구속하려 들었다.

김원봉은 1948.4.9 가족과 함께 월북한다. 극우세력을 제외한 김구·김원봉등 남측주요인사들은 4.19~23까지 개최된 남북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에 참석했다. 김원봉은 <금일조국이미증유의난국에직면하게된것은미제국주의자들의침략적정책에기인된것이다.그들은모스크바3상회의결정을파탄시켰으며양군동시철퇴에관한소련의제안까지거부하고조선문제를불법적으로유엔총회에상정시켜조선인대표도초청하지않고조선에관한부당한결정을채택했으며유엔위원단이라는것을파견해남조선을미국의식민지로만들려한다.>고 신랄하게 비판하며 연석회의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대회후에도 김원봉은 인민공화당주요간부들과 북에 그대로 체류했다

김원봉의 월북동기는 여러가지로 추측된다. 우선 신변의 위협을 들수있다. 또 북내에 김원봉의 예전동지들이 정치적기반을 잡고있었다. 북정권에서 활동중인 동북항일연군지휘관출신 최용건과의 친분을 들수 있다. 이런 개인적이유외에도 민전의장 으로서 정치적으로 월북했다는 주장도 있다. 민전은 남에 단독정부가 수립되면 북정부에 참여한다는 방침을 갖고있었고 김원봉은 민전의 노선에 충실히 따랐다는것이다. 김원봉의 삶과 투쟁에 존재하는 좌·우경적편향과 노선상오류에도 불구하고 그가 견지한 일제시기 민중중심의 항일혁명정신과 해방직후 민족중심의 통일정부신념은 조국의 역사속에 길이 빛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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