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 폴란드 바르샤바, 나치독일은 유대인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한다. 처음에는 유대인들에게 <다윗의별>을 그린 완장을 차게 했고 이후에는 게토에 몰아넣었다. 그리고나서는 대량학살했다. 유명피아니스트 스필만은 <학살기차>에 올라타기직전, 도움을 받아 겨우 살아남는다. 강제수용소에서는 레지스탕스의 투쟁준비를 방조했고 그곳에서 나올수 있게 될때는 도심속으로 숨어들었다. 수용소는 격전후 파괴되고 수용소내 유대인은 몰살된다. 전쟁의 막바지, 아사직전의 스필만은 독일장교 호센펠드에 발각된다. 자신을 피아니스트라고 소개한 스필만은 호센펠드앞에서 유려하게 연주를 한 후 생명과 안전을 보장받는다.
야만적현실속에서도 인간본연의 가치는 빛난다. 파쇼의 야만성은 유대인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가며 존엄과 생명을 앗아간다. 길들여진 순한 양처럼 파쇼독일군의 명령앞에 춤을 추라면 춤을 추고 엎드리라면 엎드리다가 결국 머리에 총을 맞아 죽어가는 유대인의 모습이 인간본성일수는 없다. 인간성은 저항하다 생을 마친 유대인과 스필만을 숨겨주며 레지스탕스를 지원하는 동료들에게 있다. 그리고 최악의 순간에도 숨길수 없는 피아노연주의 아름다움에 움직이는 독일장교의 마음에 있다.
유대인학살의 원흉, 파쇼독일의 수괴인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 유대금융자본의 전폭적지원이 있었다는것, 또 미군이 소련붕괴를 기다리며 참전을 지체했고 소련군이 유대인수용소를 해방시킨것을 유대인들이 애써 외면하는 사실을 무시할수 없다. 팔레스타인민중을 총칼로 몰아내며 이스라엘건국을 강행한 이유중 하나로 유대인학살을 거론하는데서 발견되는 모순을 역시 무시할수 없다. 유대인학살숫자가 수만에서 수백만으로 고무줄처럼 늘어나고 파쇼세력들이 <불편한진실들>을 숨기며 팔레스타인인과 중동민중들을 학살하는 만행도 당연히 무시할수 없다.
3개의 피아노연주가 있다. 하나는 영화<신바빌론>에서의 피아노연주다. 다른 하나는 영화<피아니스트>의 쇼팽발라드1번이다. 마지막은 우크라이나전이 개전된 2.24 한소년이 친 <학교가는길>이다. <신바빌론>의 연주는 파리코뮌을 지키며 결사항전한 파리노동자·민중의 숭고한 노동계급성을 대변한다. <피아니스트>의 절정에는 폴란드의 최고음악가이면서도 독립에 기여한 쇼팽의 곡이 나온다. 예술은 계급과 민족을 초월할수 없다. 우크라이나전에서 울려퍼진 피아노곡은 러시아의 군사작전에 <파쇼>의 이미지를 덧칠하려는 뻔한 술책에 지나지않는다. 예술은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