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특수속에서 1950년대 일본은 연평균10%의 경제성장률을 보였고 1955~73 연평균GDP성장률은 9.3%에 달했다. 1968 일본은 서독을 제치고 세계경제대국2위에 올랐다. 1970년대 오일쇼크에서도 일본은 호황을 맞았다. 1980년대 일본은 반도체분야에서 세계최대생산국이 됐다. 1980년대중반 들어 자동차와 전자제품등 일본상품의 세계시장점유율이 10%를 넘어섰다. 일본의 무역흑자 역시 대규모로 늘어났다. 1985 일본은 미국의 1인당국민소득인 1만5000달러를 앞질렀다. 1980 미대선에서 레이건은 무역적자와 경기침체를 극복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미연준의 강력한 고금리정책으로 고유가에 의한 고물가는 점차 안정을 찾아갔고 유가 자체도 점차 정상화돼갔지만 무역적자와 재정적자의 이른바 <쌍둥이적자>는 해소되지않았다. 1985 미국무역적자는 GDP의 3%에 육박하는 1336억달러에 달했는데 이중 일본과 독일로부터의 무역적자가 각각 37.2%와 9.1%였다. 1985.9 미국·프랑스·영국·독일(서독)·일본의 재무장관이 모여 달러화강세문제를 해결하기로 한 플라자합의가 이뤄졌다. 당시 242엔이던 엔달러환율이 3년에 걸쳐 1988 124엔까지 떨어졌다. 급격한 엔화절상으로 일본의 수출경쟁력은 수직하강했다. 일본정부는 산업경쟁력저하를 우려해 기준금리를 연5%에서 2.5%로 인하했다. 일본정부는 내수시장을 키워 무역손실을 만회하려했지만 낮은 금리로 풀린 자금은 제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데 사용되지않았고 환차익을 노린 외국자본유입으로 자산시장은 더 커졌다. 수출기업들은 고급화전략을 채택하거나 그마저도 어려운 기업들은 자산투자에 나섰다. 일할 사람이 없어서 흑자도산하는 기업들까지 나타났다고 한다. 일본은 금리를 인상하려했지만 1987.10 뉴욕증시사고인 <블랙먼데이>가 터져 미증시폭락으로 경기침체우려가 커지면서 세계각국의 저금리정책이 이어지자 일본도 금리인상을 포기했다. 1989에야 일본의 금리인상조치가 취해져 2.5%에서 6%로 급격히 인상했는데 그러자 외국자본이 빠져나가 일본증시는 약2년만에 70% 가까이 폭락했다. 1992 일본의 실물경기가 침체하기 시작했다. 일본정부는 경기회복을 위해 공적자금을 투입해 부채비율이 급증했다. 1990 이전까지 GDP의 70%선에서 유지됐던 일본정부의 부채비율은 2000즈음 150%를 넘어섰다. 코비드19가 터진 2020에는 266%까지 치솟았다. 남코리아와 대만, 중국이 반사이익으로 일본을 대체하는 무역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70년대 남코리아에 국가주도로 육성된 중화학공업과 전기전자공업이 이시기 수출주력산업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