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70년대 남코리아경제는 차관을 통해 빠르게 성장한 <차관경제>였다. 1970년대는 세계적으로 오일달러가 풀렸고 정부보증의 차관이 크게 증가했다. 남코리아에는 1972~76 54억3180만달러의 차관이 들어왔다. 중화학공업이 급속히 확대되는 1977~79 73억2320만달러가 들어왔다. 대기업들이 중화학공업에 뛰어들면서 정부보증의 차관을 들여왔다. 이기간 원리금상환을 보면, 원금으로 43억4560만달러, 이자로 24억8380만달러를 지불했다. 이는 같은 시기 들여온 차관에 맞먹는 액수였다. 당시 브라질·아르헨티나·멕시코·남코리아에 대해 <이대로가면외채로붕괴할것>이라는 말이 나돌면서 차관망국론이 떠돌았다고 한다. 멕시코·브라질이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을 선언한 반면 남코리아의 전두환정권은 일본의 나카소네정권과의 양자협정으로 일시적으로 달러화를 빌려 위기를 모면했다. 또 1970년대 중동산유국이 자원주권을 주장하며 유가상승이 시작됐는데 유가상승이 북해·알래스카·중남미등 유전개발을 촉진하면서 세계원유시장에 공급망이 확대됐다. 1982부터는 유가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1위산유국 사우디가 감산을 하며 유가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다가 1985 원유증산을 선언하자 1986 저유가시대가 시작됐다. 한편 1985 플라자합의로 엔화에 비한 달러가치절하 즉, 이저달러정책은 당시 37%가 넘은 미국의 일본수입물량을 대체할곳을 찾게 했는데 이때 새롭게 부상한곳이 남코리아였다. 미국의 수입업체입장에서 일본보다 남코리아에서 같은 가격에 많은 양의 물건을 사올수 있었다. 1986 남의 대미수출량이 늘어나 역조현상을 면치못했던 경상수지가 46억달러의 흑자를 기록하면서 대외채무잔액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미정부는 남에 원화절상을 요구했고 1988 남코리아를 <환율조작국>으로 지명해 압박했다. 또, 1970년대말80년대초 한때 20%까지 상승했던 국제금리가 이시기 10%까지 떨어졌다. 그렇게 해서 1986~88 이른바 <3저(저유가·저금리·저달러)호황>을 누린다. 남코리아경제는 1986~88 3년간 연12%의 고도성장을 기록하고 기업들의 고용률이 확대돼 실업률은 1980 5.2%에서 1988 2.5%로 떨어졌다. 1989 국민소득에서 자산가계층이 부동산·주식투자에서 얻은 불로소득이 77.3%에 이르렀고 그해 한해 땅값상승으로 얻은 불로소득만도 85조원으로, 당시 전체노동자임금인상총액인 9조100억원의 9배를 넘었다. 외적요인에 의한 남경제의 호황은 결국 미국의 원화절상압박에 원·달러환율이 1986 860원에서 1989 660원으로 떨어지고 1989 경상수지흑자규모가 크게 줄어들면서 경제성장세도 급격히 둔화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