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코리아는 1980년대 경제위기는 피해갔으나 1997 동아시아외환위기는 피해가지못했다. 1996 경제성장률이 이전해보다 감소해 경기침체라는 언론보도가 있었지만 여전히 경제성장률은 7.6%였다. 이는 수출액감소로 인한 무역적자증가(약230억달러)와 대외채무폭증(1000억달러이상)과 결합됐다. 무역적자는 김영삼정부의 환율정책으로 인한 수출감소에 원인이 있었다. 김영삼은 1995 달성한 <1인당국민소득1만달러시대>의 성과를 인위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원화고평가환율정책을 유지하려했다. 여기에 삼성의 반도체수출을 견제하는 일본반도체업계의 담합에 의한 반도체가격인하의 출혈수출도 전반적인 국내수출악화에 원인으로 작용했다. 1995 미클린턴정부는 경상수지적자를 자본수지흑자로 보전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G7에서 강달러를 추구하고 엔약세를 허용한 <역플라자합의>를 이뤄냈다. 그주요내용으로는 엔-달러환율을 100엔선으로 회복하고 미의 일에 대한 통상압력을 보류하는 대신 일은 저금리정책을 유지하고 내수를 늘리기 위해 재정확대정책을 편다는것이었다. 역플라자합의는 미경제정책방향이 금융과 무역통상에서 금융우위전략으로 선회했다는것을 보여준다. 즉, 통상을 통한 문제해결방식을 버리고 금융을 통해 세계의 주도권을 행사하겠다는 정책전환이라는것이다. 이시기 중국이 세계자본주의시장의 수출공장으로 편입돼 수출상품에서 가격경쟁력을 갖게 됐다. 김영삼정부의 금융시장자유화와 <세계화>기조로 재벌들의 해외투자 혹은 해외채무와 관련된 규제가 해제되고 국내금융업진출에 대한 규제도 해제돼 재벌들이 종합금융회사설립에 뛰어들며 해외채무가 폭증했다. 재벌들은 이렇게 얻게 된 외화채무로 국내과잉투자, 그리고 동남아금융시장·부동산투기등과 같은 대외투자에 몰두했다. 1997.1 미국은 고금리정책으로 자국의 수입시장을 수축시키면서 동시에 동남아와 남코리아금융시장에 투자된 해외자금을 미국내로 회수하게 했다. 남코리아의 달러화외환보유고는 급속히 고갈되면서 많은 대외부채를 지닌 국내기업들의 채무이행이 어려워졌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 IMF(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남정부에게는 3가지의 길이 있었다. 하나는 모라토리엄(지불유예)선언이었고 다른 하나는 1980년대초 전두환정권당시 일본과의 양자협의로 일시적으로 달러를 빌려 외채위기를 해결했던 방식이었다. 그러나 미클린턴정부가 일본에 압박을 가해 지원을 하지못하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것이었다. IMF와의 협상이 타결되기 며칠전인 11.28 클린턴미대통령이 김영삼대통령에게 전화로 IMF행을 강하게 압박했다. IMF는 본래 지원대상국의 경상수지균형문제만을 다룬다는 취지로 설립됐으나 점차 그런 원칙은 무색해졌다. IMF는 남정부·한국은행·은행감독원과 통화·재정정책, 금융구조조정, 무역·자본시장개방, 기업지배구조개선, 노동유연화등 광범위한 부분에서, 민간기업을 비롯한 국가경제전반에 개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