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동과 주체
반동은 역사의 전진을 가로막고 되돌리려는 사회세력을 의미한다. 반동세력은 계급사회가 출현할때 함께 생긴 사회세력이다. 인류사회가 적대계급으로 분열되면서 역사·사회발전에 대한 이해관계가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세력들이 등장했다. 그중 반동은 사회역사발전을 방해하는 온갖 착취계급이자, 민중을 억압·착취하지않고서는 살수 없는 계급이다. 역사적으로 모든 착취계급은 정치권과 경제권을 장악하고 낡은 사회제도를 유지하려고 하며 사회변혁을 반대했다. 사회유형에 따른 전형적인 반동세력은 노예사회에서의 노예소유자계급, 봉건사회에서의 지주계급,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자본가계급을 들수 있다. 착취계급의 역사적반동으로서의 역할은 민중의 변혁적진출에 대한 가혹한 탄압, 침략전쟁·약탈, 향락·탕진·부정부패등으로 표현된다.
반동과 대립되는 주체는 사회역사적운동을 주동적으로 일으키고 발전시켜나가는 담당자다. 역사는 자연과 사회를 개조·변혁하기 위한 민중의 투쟁에 의해 발전해왔다. 민중의 주동적작용·역할을 떠나 사회적운동은 일어날수 없고 역사발전도 이뤄질수 없다. 오직 민중만이 역사·사회발전의 주체며 반동·착취계급은 주체가 될수 없다. 결국 주체인 민중은 반동세력을 반대하는 투쟁을 통해 인류역사를 전진·발전시킨다. 민중의 지위·역할은 국가주권·생산수단의 소유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민중이 국가주권인 정치권과 생산수단인 경제권을 자기손에 틀어쥐어야만 참다운 주인으로서 역사를 창조해나갈수 있다.
파쇼이탈리아의 반동정책
파시즘은 20세기 제국주의단계에서 후발자본주의국가가 국내위기극복을 위해 취한 폭력적인 정치체제를 총칭한다. 사회계급적기초는 제국주의독점자본이고 그역사적배경은 제국주의의 전반적위기다. 대내적으로는 자본가를 중심으로, 중산층을 개량화하면서 공산당세력·진보세력과 노동운동을 탄압하고 동시에 인종론·민족배타주의를 고취시키면서 국가주의적독재를 통해 위기를 모면하려고 한다. 대외적으로는 식민지재분할요구등 침략적정책을 실행한다. 1919 베니토무솔리니가 반동적장교들과 지주·자본가의 자식들을 규합해 파쇼단체<이탈리아전투자단>을 조작하면서 파시즘은 가장 반동적인 정치사조를 의미하는 술어로 쓰이기 시작했다.
무솔리니는 1차세계대전기간 사회당에서 축출된뒤 일간지<이탈리아인민>을 발간했고 <이탈리아전투자단>강령으로 상원제폐지·유권자모임·전쟁수익몰수·농민토지분배를 내세웠지만 1919 선거에서 파시스트당원들이 단1명도 당선되지않자 극우로 노선을 전환했다. 1920 개정된 파시스트강령에는 애국심·전쟁의정당성·위대한국가·이탈리아사회당에대한혐오가 담겼다.
1921 무솔리니는 노동조합·진보조직을 겨냥해 내전을 방불케하는 공격을 시작했다. 상반기 노동회의소119곳·인민회관59곳·협동조합건물107곳·농민연맹건물83곳·노동자정당지부및서클이있는141개건물·노조위원회및노동자신문편집국28곳을 파괴·방화했다. 뿐만아니라 노조·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을 억압하기 위해 사회주의자들과 노조지도자들을 폭행·학살했다.
<파시스트행동대>중에는 소부르주아출신 학생들이 많이 포함됐다. 사회당의 토지공유정책에 불만을 가진 소지주들·소작인들도 적지않았고 대다수 전쟁에 직접 참가했던 사람들이었다.
반동적파쇼대열의 악랄한 파괴·학살만행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저항은 수동적이고 분산적이었다. 노동자투쟁은 방위적성격을 띠고있었고, 정치·조직적으로 대응할 준비가 돼있지않았다. 몇몇도시들에서 사회당·공산당·노조성원들과 무정부주의자·종교인들이 참가해 프롤레타리아방위위원회를 조직했고 집회등을 조직하기도 했지만 참가조직간 의견차이와 분열, 반파쇼운동에 대한 소극성으로 인해 운동은 쇠퇴했다.
무엇보다 사회당이 투쟁정신을 잃은채 자본가·지배계급과 타협하는 우경적오류를 범하면서 반파쇼운동에 불철저하자, 1921.1 리보르노에서의 사회당17차대회에서 안토니오그람시를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이 탈당해 이탈리아공산당을 창설했다. 공산당은 이해 5월선거에서 15석을 차지했다.
한편 1921 선거에서 조반니졸리티총리는 무솔리니·파시스트들이 여당후보로 입후보하는것을 허용했고 파쇼세력을 민족주의세력과 함께 <민족진영>에 포함시켰다. 유리한 조건속에서 무솔리니와 파시스트34명이 처음으로 의회에 진출했다. 파쇼세력이 집권층에 편승해 얻은 실질적인 첫성과였다. 파시스트는 사회당과 맺은 <화해의협약>을 파기하고 정부·국가기관들의 비호·협조를 받으며 더 심각하게 파괴·폭력을 일삼았다. 1921.11 <이탈리아전투자단>은 <국민파시스트당>으로 재편했다. <국민파시스트당>은 계급모순과 노동자·민중의 변혁적진출을 완전히 부정하면서 <통일적민족>이념을 내세우고 강력한 정권수립, 자유주의국가의 <협동조합국가>로의 전환을 강령으로 했다. 또 파시즘을 <위대한이탈리아>를 창조할수 있는 <정치·군사·경제적유기체>로 선언했다. 이후 반동적어용노조인 <전국노동협동조합연맹>을 조직했다.
1922.10 나폴리당대회개회후 4만여명의 파시스트행동대원(<흑셔츠단>)이 중심이 돼 1922.10.28 <로마진군>을 감행했다. 왕은 반란군을 진압하지않은채 오히려 무솔리니에게 내각구성을 요청했고, <막후협상>에 따라 무솔리니의 첫번째정부가 수립됐다. 정부에는 인민당·자유당이 참여했다. 무솔리니는 정권장악후 1923 본격적으로 공산당·사회당·민주주의세력·자유주의세력·종교인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폭력·탄압을 감행했다. 그전해까지는 파시스트들에 의한 테러였다면 이때부터는 국가기관이 결합된, 조직적이고 대대적인 파쇼탄압이었다.
1926.1 프랑스 리옹에서 비밀리에 열린 이탈리아공산당3차대회에서 정식으로 총서기가 된 그람시는 <리옹테제>를 통해 파시스트집권에 따른 공산당과 이탈리아노동계급의 당면위기에 대해 <혁명적프롤레타리아의패배는노동자당의정치·조직·전술·전략적오류때문이다.이러한오류의결과프롤레타리아는대다수인민봉기를지도할위치에서거나,그인민봉기를노동자국가를이룩하는방향으로이끌어가지못했다.>며 <1922파시즘의승리는혁명에대한승리가아니라,혁명적세력들이그들자신의본질적취약때문에겪은패배의결과>라고 평가했다.
반동적파시스트발호의 배후에는 국제금융자본이 있었다. 미금융자본은 무솔리니를 <이탈리아를위해훌륭한일을한,매우훌륭한친구>라며 재원을 투입했다. 뿐만아니라 영국등에게 <무솔리니의에티오피아점령을인정할것>을 압박했다.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공격에 대한 국제연맹의 침략국규정·제재조치를 가로막은것도 독일과 미국이었다. 미금융자본은 이탈리아가 독일과 동맹을 맺을때까지 재원을 투입했다. 교황청도 미국이 파시스트에 돈을 대주는데 보증을 섰다.
에티오피아침공과 발악하는 파쇼무리
1935.10 무솔리니는 선전포고 없이 에티오피아를 침략했다. 우세한 병력으로 에티오피아를 빠르게 수복할것으로 예상했던것과 달리 에티오피아민중들은 이탈리아의 전격전을 파탄시켰다. 한편 미국·영국·프랑스제국주의는 이탈리아의 침략전쟁에 대한 방임정책을 취했다. 영국은 수에즈운하를 이탈리아파쇼군대가 계속 사용할수 있게 방조했다. 이같은 책동은 파쇼이탈리아의 침략야욕을 부추겼고 결국 1936.5 이탈리아군대는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함락, 에티오피아를 병탄했다. 이탈리아국왕 비토리오에마누엘레3세가 황제로 선포됐고 에리트리아·이탈리아령소말리아·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지방이 통합돼 이탈리아령동아프리카제국이 형성됐다.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간 전투는 1937.12.19까지 계속됐다. 이날 <예카티트12(아디스아바바)>학살이 발생했다. 이탈리아점령군이 에티오피아인을 학살·투옥했는데, 에티오피아측 출처에 따르면 이시기 3일동안 학살된 사람의 수는 무려 3만명에 달한것으로 추정되며 2017 한연구에 따르면 1만9200명으로도 파악되는데, 이는 아디스아바바지역인구의 20%에 해당한다. 1주일뒤 이탈리아의 통치를 반대하는것으로 추정되는 에티오피아인을 잡아 처형했는데, 에티오피아반파쇼저항운동조직<블랙라이언즈>성원들과 귀족출신들도 포함됐다. 이탈리아군은 1936~41 파쇼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점령에 맞선 반파쇼저항군<아르베뇨크>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투원·민간인을 상대로 제네바의정서·제네바조약에 위반되는 독가스를 살포했다. 모든 추산에 따르면 이탈리아침략으로 인해 수십만명의 에티오피아민간인이 학살됐다. 이탈리아는 신체조직들을 심하게 손상시키는, 국제적으로 금지된 일명<덤덤탄>을 사용했고 노동자들을 살해했으며 포로로 잡힌 에티오피아인들의 신체일부를 절단·거세하는등, 매우 잔학하게 고문·학살했다.
에티오피아가 함락되고 2달뒤 스페인에서 인민전선정부대 프란시스코프랑코·파시스트간의 전쟁이 터졌다. 1936.10.23 독일 베를린에서 이탈리아·독일의정서를 체결한 무솔리니·아돌프히틀러는 스페인내전이 터지자 파쇼군대의 승리를 전폭적으로 지지·지원했다. 반면 미·영·프는 <불간섭정책>을 고집하면서 암묵적으로 파쇼세력의 승리를 밀어줬다.
반동적인 히틀러나치즘의 시작
1923.11.8 히틀러가 독일 뮌헨의 맥주홀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로마진군>에 감명을 받아 폭동을 일으킨것으로 알려졌다. 2일뒤 시위대와 함께 체포된 히틀러는 5년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9개월만에 석방됐다. 수감전 뮌헨내에서의 정치인이었던 히틀러는 출소후 전독일적인물로 등극했다. 히틀러는 1925 나치당을 재건했고, 나치당은 1920말~30초 지지기반이던 바이에른지역의 범위를 벗어나 독일전역으로 조직을 확대하면서 여러사회계층으로부터의 지지를 받기 위해 노력했다. 1928.5 선거에서 2.5%를 득표, 12개의석을 확보한 나치당은 1929 우익언론재벌 알프레드후겐베르크의 <민족국민당>과 함께 <영플랜>반대투쟁을 전개했다. 1930.9 총선에서 107석, 1932.11 총선에서 196석을 획득했으며 히틀러가 총리가 된후 1933.3 총선에서 전체647석중 288석을 차지했으나 과반장악에는 실패했다. 1929대공황에 의해 경제위기·민생파탄이 심화되던중에 나치당은 소부르주아계층·퇴역군인등을 자기진영에 끌어들였고, 민중들사이에 불안과 공포심을 조장했다. 특히 민족배타주의·반공주의선동에 열을 올렸고 인종주의·반유대주의를 주창했다.
1921~32 프로이센주의원출신·우익정치인 프란츠폰파펜은 1932 초당파소수내각의 총리가 된뒤 전임정부가 나치의 준군사조직 <돌격대>와 <친위대>에 내린 금지조치들을 같은해 6월 해제했다. 나치당은 위기를 심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폭력·파괴행위를 자행했고 그결과 몇주동안 수백명이 사상당했다.
한편 1932.9~12 금속·섬유·건설산업을 중심으로 약1100건의 파업이 발생했고 대부분 성공했다. 이시기 파업의 특징은 노동계급이 처음으로 정부의 <긴급명령>에 반발해 그시행을 상당히 막은것이다. <긴급명령>은 단체교섭권폐지를 내용으로 하는 정부조치였다. 위기감을 느낀 독점자본·부르주아정치세력은 1933.1 히틀러가 새연립내각총리로 임명될수 있도록 파울폰힌덴부르크대통령을 압박했고 1.30 결국 히틀러는 총리가 됐다. 이로써 최악의 반동세력에게 권력이 쥐어졌다. 히틀러의 권력장악으로 인해 바이마르공화제의 <부르주아민주주의>체계까지 큰타격을 입었다. 나치당은 가장 공격적인 독점자본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는 당이었고 이당의 주요목표는 독일제국주의의 세계지배를 위한 새세계전쟁준비였다. 히틀러집권하에 공산당·사회민주당·노동조합등은 모두 해체됐고 그활동은 다 불법화됐으며 국가적인 테러·파괴가 공공연히 감행됐다.
히틀러파시즘의 백색테러·사건조작
히틀러파시즘의 본질을 보여주는 사례들로는 독베를린국회의사당방화사건·<수정의밤>·<통조림>작전을 들수 있다. 1933.2.27 21시14분 베를린소재 국회의사당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네덜란드출신공산주의자>로 불린 마리뉘스판데르뤼버가 범인으로 지목됐다. 화재가 발생한지 얼마안돼 도착한 경찰·소방대는 발화점이 60~65개소이고 건물전체에 흩어져있었으며 연기를 내지않고 치솟는 불기둥이 있었다고 보고했다. 정황상 뤼버의 단독범행이라는 나치주장은 의심스러웠다. 국회의장 헤르만괴링은 사건현장에 도착하자마자 <공산주의자들의소행>이라고 단언하며 공산당정치지도자들을 체포하라고 광분했다. 괴링으로 인해 수사가 시작되기도전에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방화로 굳어졌다. 이사건을 두고 히틀러의 선전상인 요제프괴벨스는 자신의 일기에 <하늘이주신기회>라고 썼다. 앞서 히틀러는 총리가 된뒤 의회내 나치당의석을 확대하기 위해 힌덴부르크에게 국회해산을 압박했고, 1933.3.5 재선거를 앞두고있었다. 나치당은 최대정적인 공산당을 압박·제거할 명분이 필요했다. 이후 내무장관자격으로 증인소환된 괴링과 국제공산주의지도자·불가리아공산당당수 게오르기디미트로프간의 설전에서 괴링은 디미트로프에게 완패했고 결국 범인으로 지목됐던 3명의 불가리아진보활동가들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사건을 계기로 히틀러는 독일공산당·진보세력에게 대대적인 공안탄압을 가했다. 2차세계대전이후 이사건은 나치의 자작극으로 판명됐다. 일례로 뉘른베르크재판때 나치장군 프란츠할더는 1942 히틀러생일점심때 괴링이 이사건에 대해 <진짜제국의회를알고있는유일한사람은나다.내가제국의회에불을질렀다.>라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수정의밤>은 2차세계대전개시직전인 1938.11.9~10 발생한 폭력적인 반유대주의<포그롬(대박해)>을 일컫는다. <포그롬>은 독일과 합병된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점령지역 주데텐란트전역에 걸쳐 대대적으로 발생했다. 나치당관료·<돌격대>·히틀러청년단회원에 의해 주로 발생한 <수정의밤>은 1938.11.7 독일대사관직원 에른스트폼라트를 폴란드계유대인이 저격한것이 계기가 됐다고 하지만, 사건발생수일전 독당국은 독일거주 폴란드계유대인수천명을 추방시켰다. 11.9 폼라트가 사망했는데, 이날은 1923 맥주홀폭동<기념>일과 같은날이었다. 기념식을 위해 뮌헨에 모인 나치당지도부와 괴벨스는 <국제유대인>이 폼라트를 암살했다고 모략하며 <나치당에서시위를준비하거나조직해서는안되지만,이것(폭력사태)은자발적으로발생한경우이기때문에제재하지않기로결정했다>며 사실상 폭력을 조장했다. 지역나치당원들이 지역사무소에 지침을 내리며 독일여러곳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했고, 나치당은 히틀러청년단부대의 유대인일반을 겨냥한 백색테러를 <분노한대중의반응>으로 조작했다. 나치당중앙은 <비유대인독일인의생명·재산위협금지>·<외국인을폭력대상에서제외>·<유대인회당의모든유물·재산약탈후훼손>·<약탈유물은치안서비스로보낼것>등의 구체적지침들을 내려보냈다. 이시기 최소91명의 유대인이 학살됐고 폭동여파로 강간·자살건수가 급증했으며 최대3만명의 유대인남성들이 체포돼 집단수용소로 보내졌다. <수정의밤>은 나치당의 반유대인정책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중 하나다. 폭동에 대해 독일국민들이 수동적으로 반응하는것을 본 나치당국은 이를 계기로 독일경제·사회에서의 유대인완전제거를 목표로 한 조치를 확대실시했다. 최종적으로 <유대인없는독일>을 만들기 위해 유대인을 살육했다.
<통조림>작전은 폴란드침략을 위한 나치당의 자작극이었다. 1939.8.31 나치독일당국은 나치친위대에게 <통조림>작전실행명령을 하달했다. 이들은 반나치투쟁을 하다가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된 13명의 정치범에게 폴란드군복을 입힌뒤 폴란드국경인근에서 살해했다. SD(친위보안부대) 알프레드나우요크스소령이 이끈, 폴란드군으로 위장한 군인들은 폴란드국경마을 글라이비츠의 라디오방송국에 난입, 아나운서를 죽인뒤 폴란드어로 <위대한폴란드는지금독일을향해진격을개시했다>며 선전포고를 조작했다. 1939.9.1 나치독일은 폴란드를 침략했고, 2차세계대전은 시작됐다.
나치를 비호·지원한 반동세력들
1929.10 독공산당중앙위원회총회에서 에른스트텔만은 대자본가가 나치당의 재건을 돕고있다며 나치당을 <가장위험하고더러운금융자본의도구>라고 규정했다. 실제 나치당은 같은 반동세력인 거대금융자본가와 산업자본가들의 지지·비호하에 육성됐다. 독일의 대공업자본·대금융자본은 1920년대중반부터 독일내 파시스트운동을 지원했고, 1930년대초부터 티센·플릭·슈뢰더·샤흐트등, 대자본으로부터 나온 막대한 자금이 나치당으로 들어갔다. 독점자본이 히틀러를 지지한 배경에는 극우반동적인 히틀러나치당이 독일공산주의운동·노동운동을 전면적으로 탄압하면서도 기만적인 포퓰리즘정책으로 중간층을 효과적으로 개량화할수 있을것이라고 판단했기때문이다.
한편 미<월가>는 1924~41 <도스플랜>·<영플랜>을 통해 독일의 배상금지급의무를 완화해줬고 1380억마르크를 대출해줬다. 미은행가는 히틀러에게 1500만달러를 투입해 집권을 지원했고 이후에도 여러차례 자금을 지원했다. 1932 미의회기록에 따르면 같은해 4.27 연준(연방준비제도 Fed)은 75만달러가량의 미국인보유황금을 독일에 보냈고 같은해 5월중순 1200만달러상당의 황금이 독일에 유입됐다. 독일군수산업과 유착한 미기업들로는 제너럴모터스·포드·제너럴일렉트릭·듀폰등이 있는데 이들은 사실상 모건은행·체이스은행·맨해튼은행의 휘하에 있었다. 히틀러는 독점자본세력의 막대한 지원을 받으며 놀라운 속도로 군대를 재정비한뒤 2차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전쟁을 거치며 독점자본가들은 엄청난 자본을 축적했다.
일제의 반동적침략정책
1868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단행하며 <천황>중심의 <반막부>세력을 형성, 도쿠가와막부를 꺾고 <천황제절대주의정권>으로서 메이지정부의 전국지배권을 확립하면서 군국주의의 기초를 마련했다. 때를 같이해 등장한것이 <정한론>이다. <정한론>은 조선정벌론이다. 1901 낭인들을 결속해서 조직한 흑룡회가 1908~11까지 간행한 <서남기전>에 실린 <기리노도시아키의정한론에관한설화>에는 <지금영국·프랑스·프러시아·러시아와같은각국은서로맞서아직힘을중국·조선·만주에미칠여가가없다.이때에우리일본은마땅히그틈을타중국·조선·만주로건너가이를빼앗아가져이로써구주각국에침입하는기초를세워야한다.>고 적혀있다. 기리노는 이토히로부미의 스승이자 팽창주의를 주창한 요시다쇼인과 연결된다. 메이지유신의 주역 사이고다카모리등 <정한론>주창자는 <내치선결>을 내세운 세력에 밀려 정부에서 사임했으나 1875 운요호사건을 시작으로 한 일련의 대조선침략정책에는 <정한론>이 반영돼있다.
1928 일총리에 취임한 다나카기이치가 히로히토<천황>에게 올린 <상주문>에는 만주·중국침략, 대미전쟁의 내용이 담겨있다. 이는 10년뒤 발표된 <동아신질서> 즉, <대동아공영권>정책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1938.11 고노에후미마로내각이 <일본과만주국,중국의선린우호와공동방공,경제제휴>를 표방한 <동아신질서>성명은 구미제국주의·공산주의모두를 배격하고, 한때 국민당간부였으나 1937 중일전쟁이후 친일파로 변절한 왕조명을 내세워 국공합작을 파괴해 만주·몽골·중국을 통합·지배하는것을 초점으로 삼았다. 1940.7 2차고노에내각외무대신 마쓰오카요스케는 담화문에서 당면외교방침을 <황도의대정신에근거하여우선일본과만주,지나(중국)를하나로하는대동아공영권의확립을도모하지않으면안된다>고 언급하며 <대동아공영권>을 전면화했다. 일본국책은 <일만지(일본·만주·지나)>를 <동아신질서>의 근간으로 하고 여기에 1919~45 지배·통치한 미크로네시아섬들을 칭하는 <남양>을 추가해 <자급자족>경제를 확립한다는것이다. 무엇보다 <대동아공영권>은 정치·경제적으로 취약한 군국주의일본의 가혹한 식민지지배·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한 거짓근거로 사용됐다.
<아시아민족의해방>을 위해 일중심으로 <아시아전체의단결>을 해야하며 <팔굉일우(세계를천황아래에하나의집으로만든다)>를 정신으로 한 <성전>으로 서양세력을 몰아내야한다며 국가총동원령을 내렸고, 인적·물적자원을 마구잡이로 약탈했다.
일제의 파쇼탄압과 침략·학살
1868~1945 일본내에서의 <언론탄압(겐론단아츠)>은 진보세력·자유주의자·종교단체등 반군국주의활동에 대한 일치안당국의 탄압사건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불법>적인 일공산당·공산주의자와 관련한 대중운동조직, <합법>적인 사회민주주의·자유주의지식인, 일제체제내에서의 비판적그룹, 일부종교단체에 대한 탄압·숙청을 감행하는데 치안유지법을 법적근거로 했다.
1920.5 <사회운동의연구와보급·계몽,쟁의응원,투사양성>을 목적으로 결성된 효민회가 1921.1 <아나키스트·볼셰비키제휴>를 내걸고 <노동운동>지를 창간, 3월 일공산당임시집행위원회에 참여, 코민테른과 연계된 사실이 발각되며 발생한 <효민공산당>사건은 <언론탄압>이 본격화되던때의 대표적인 조직사건이다. 1926~32 <언론탄압>1단계는 절정에 달했다. 치안유지법을 적용해 공산당과 그주변의 합법적대중단체에 대한 탄압·숙청이 전개됐고 <치안유지법엄벌화개정>이 감행됐다. 특히 일공산당은 1932.11.12 <아타미>사건으로 2차전국대표자회의개최직전에 경찰의 급습으로 당중앙이 괴멸됐다. 1단계에서 2단계로의 이행시기인 1933~36에 2차일본공산당은 1933 옥중전향성명과 당내분열로 인해 중앙위원들끼리 서로 죽인 스파이사문사건이 발생했고, 1935.3 유일하게 남아있던 중앙위원 하카마다사토미가 검거돼 당중앙간부가 1명도 남지않게 되면서 붕괴됐다. 한편 이때 탄압대상이 자유주의자의 합법적언론활동으로까지 확대됐다. 1937~40 2단계탄압의 절정기에는 대학교원의 언론저작활동이 문제시됐고 사민주의자일부가 검거됐으며 문화동아리활동까지 탄압대상이 됐다. 2단계를 거쳐 체제비판세력이 절멸된 상태에서 1941~45 3단계탄압이 시작·확대됐다. 체제내부인사들에 대한 숙청과 일본민중일반이 감시대상으로 전락했다. 헌병·특별고등경찰이 암약했고 이때 나치비밀경찰수괴 라인하르트하이드리히의 부하 요제프마이징거가 일에 파견돼 헌병·특별고등경찰의 고문을 맡았다.
<언론탄압>법으로 악명높은 치안유지법은 민주주의·공화제·공산주의운동분쇄를 목적으로 1925 제정됐다. 이법의 전신은 1923 간토대지진직후 공포된 긴급칙령이다. 2차세계대전후 결성된 <치안유지법피해자연맹>은 이법에 의해 고문·처형된 피해자수를 일본내에서만 약7만5000명으로 보고있다. 이법은 식민지에서도 적용됐다.
1923 간토대지진당시 일당국은 지진의 원인을 황당하게 조선인으로 돌리면서 무고한 조선인들을 대량학살했다. 지진이 있기전 일본은 1차세계대전종전후 경제불황에 시달렸고 사회적갈등이 증폭됐으며 일본민중의 정치적진출이 가속화돼 1921 노동자총연맹, 1922 농민총조합·공산당이 조직됐다. 일당국은 지진발생다음날인 1923.9.2 계엄령을 공포했고 군을 치안에 동원했다. 계엄령하 6만4000육군병력·경찰력이 결집했고 150척이상 연합함대가 동원됐다. 동시에 <사회주의자와조선인에의한방화가다수발생하고있다>·<조선인이독약을사용해살해를기도하고있다>는 유언비어가 유포됐다. 조선인에 대한 폭력·학살이 9.2~6 집중적으로 자행됐다. 일정부는 당시 조선인사망자가 233명이라고 축소발표했지만 상해임시정부에서 발간한 <독립신문>에 따르면 피학살자수는 6661명에 이른다.
일제는 1931.7 만보산지역내 조선인·중국인을 이간질해 유혈충돌을 조장한 만보산사건을 일으켰다. 2달뒤 1931.9 일제는 만철선로를 폭파한뒤 중국 장학량지휘하 동북군소행으로 조작한 노구교사건을 거짓명분으로 삼아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일제는 1932.1 만주전역을 점령, 3월 만주국괴뢰정권을 조작했다.
1937.11 중일전쟁발발 4개월만에 일제침략군이 상하이를 점령했다. 이에 국민당정부는 <장기항전>을 위해 수도를 난징에서 충칭으로 이전한다고 발표했다. 12월 난징이 일제에 함락됐는데, 이때 피난하지못한 50만~60만난징민중들과 철수하지못한 10만여군인들중 많은 수가 일제에 의해 무참히 학살됐다. 일제침략군은 참수·생매장·강간후살해·총검술훈련중살해등 온갖 참혹한 방법으로 학살만행을 저질렀는데 그대상은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예외가 없었고, 그숫자는 최대30만명이상에 이른것으로 추정된다. 난징점령후 일제침략군은 1939.4 중국인대상으로 생체실험을 시도했는데, 이같은 만행은 조선인을 대상으로도, 대대적으로 감행됐다. 가장 악명높은 일관동군731부대에 의해 1940~45 희생된 <마루타(껍질벗긴통나무)>라 불리는 생체실험대상자수는 알려진것만 무려 3000명이며 공중살포된 세균전으로 인한 피해자는 수만명에 달했다.
한편 일제는 조선인 840만명을 강제징용, 20만명을 일본군성노예로 끌고갔고 이중 다수를 패망이 가까워진 시기 학살함으로써 인류최악의 제국주의침략세력이자 파쇼반동세력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냉전>시기 아시아·아프리카의 반동세력
제국주의미국의 신식민주의정책에 따라 <한국>에는 1948.8 이승만친미대리정권이 수립됐으나 1960.4 민중항쟁으로 이승만이 하야하자 1년뒤인 1961.5.16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박정희는 집권하자마자 정론지<민족일보>를 탄압, 조용수사장을 사형에 처했고 1964.6 <한>일회담반대시위를 겨냥해 계엄령을 선포, 1차인민혁명당사건을 조작했다. 1969 <3선개헌안>날치기통과, 1971 3연임시작, 1972 <유신>헌법제정등에 대한 민중저항을 억압하기 위해 1974.4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배후로 인혁당성원을 지목한 2차인혁당사건(인혁당재건위원회사건)을 조작, 1974.7 서도원·도예종·송상진·우홍선·하재완·이수병·김용원·여정남등8인을 사법살인했다.
1979.12.12 1차군사쿠데타와 1980.5.17 2차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은 5.18항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광주민중을 대량학살했고 1980.12~1982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국가보안법>을 적용한 공안사건들을 연달아 일으켰다. 한편 파쇼권력연장을 위해 자작모략극을 벌였는데 대표적으로 1983.10 미얀마아웅산폭탄테러사건과 1987 직선제대통령선거가 있기 약보름전 터진 KAL기사건이 있다.
박정희·전두환군사파쇼권력의 배후에 제국주의미국이 있다. 1960.4.21 앨런덜레스미CIA(중앙정보국)국장에게 보고된 비망록에 따르면 이승만권력제거를 위해 <한국>군협력을 구할것을 결정했고, 박정희는 적어도 1960.2부터 쿠데타를 준비했다. 덜레스는 <내가재임중CIA해외활동에서가장성공한것은이혁명(5.16쿠데타)>이라고 말했다. <신군부>의 12.12쿠데타당시 주<한>미군사령관 존위컴은 1·5공수, 9사단등의 부대이동을 승인했고, 5.18항쟁당시 미국은 광주민중을 <폭도>로 규정, 5.25 미7함대항공모함 코럴시호를 부산항에 입항시키며 전두환군사파쇼권력을 비호·지지했다. 1980.8.27 위컴은 <박정희피살후가장성공한미국의한국정책중하나는전두환정권의수립>이라고 말했다.
1965.9.30 인도네시아에서는 수카르노민중정권이 수하르토군부파쇼세력에 의해 전복됐다. 1965.9.30~10.1 <사회주의계열>의 젊은 영관급장교들이 <9.30거사>를 일으켰다. 친미육군장성6명을 살해한 이사건에 대해 가장 강력한 군지휘관중 1명인 수하르토는 사전에 이를 알고있었다. 이같은 이유로 <9.30거사>가 <역쿠데타>라고 분석되기도 한다. <9.30거사>가 인도네시아공산당에 의한것이 아니었음에도 미국·서방언론은 <공산당쿠데타>로 모략했다. 미국의 배후조종하에 수하르토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1955~56인도네시아대학살사건>을 총지휘, 최소50만에서 최대300만의 인도네시아공산당성원·민중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며 권력을 찬탈했다. 이과정에서 미국은 공산당당원명단5000여명을 수하르토에게 줬다.
남아공(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민당반동정권은 1948 아파르트헤이트(인종주의)를 법률로 공식화하면서 계급적, 민족적 차별과 탄압을 본격화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17세기 남아프리카에 이주해온 네덜란드인들의 후손들인 <아프리카너(보어인)>들이 주도했다. 국민당정권은 <아프리카너>를 핵심구성으로 하면서 모든 사람을 인종등급으로 나누고 인종별 거주지·출입구역분리, 통혼금지등을 강제하며 <백인지상주의>국가를 조작했다. 1956 남아공수도 케이프타운에서 유색인종의 일반적투표권이 박탈됐고 여러 아파르트헤이트관련법이 제정됐는데 그중 1960 반공법은 남아공공산당과 정부가 <공산주의정당>으로 지목한 모든 정당활동금지, 공산당원에 대해 최대징역10년형을 규정했다. 진보활동을 불법화하고 저항하는 흑인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살해하는식의 무자비한 탄압·학살을 가하는데 이법이 악용됐다. 아파르트헤이트기간 대표적으로 1960 샤프빌학살, 1976 소웨토학살이 발생했다. 이중 소웨토학살은 1976.4 최대흑인거주지역 소웨토의 학생들이 <아프리칸스어>수업을 전면거부하고 6월 1만여학생들의 평화행진에 경찰이 최루탄투척·실탄사격을 하면서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투쟁은 항쟁으로 발전했다. 이기간 600~700명이상 사망, 4000명이상 부상당했는데 대부분 어린 학생들이었다. 소웨토항쟁의 주역인 학생들은 추후 무장투쟁조직에 들어가 게릴라투쟁을 전개했다. 다른 한편으로 흑인노동계급의 투쟁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남아공반동정권은 1948~93 알려진것만 2000명을 교수형, 수십만명을 투옥, 수백만명을 체포했지만 반아파르트헤이트를 촉구하는 남아공민중의 투쟁은 꺾이지않았다. 1992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됐고 1994 2000만흑인들이 투표권을 처음으로 행사했으며 같은해 5월 넬슨만델라는 대통령에 취임했다.
<냉전>시기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친미파쇼책동
제국주의미국의 오래된 대라틴아메리카정책은 <먼로선언>과 <큰몽둥이정책>으로 대변된다. 1823.12 제임스먼로미대통령은 의회연두교서를 통해 유럽과 미주대륙간에 상호불간섭과 유럽국가의 미주대륙식민지건설배격을 주내용으로 하는 외교방침을 발표했다. 이는 아메리카대륙에 대한 유럽제국주의의 간섭·지배를 제외하면서 라틴아메리카를 미국의 <뒷마당화>하려는 책동의 반영이다. 이같은 속셈은 1901 미대통령직을 승계받은 시어도어루스벨트의 제국주의패권정책인 <큰몽둥이정책>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미국의 라틴아메리카식민지화정책은 <냉전>시기 친미반동세력을 배후조종해 정권을 찬탈하고 각국내 매판자본을 육성하면서 군사·정치적지배, 경제적착취·약탈을 심화하는것으로 드러났다. 1947.8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인근에서 미국·라틴아메리카19개국이 체결한 <리우협약>에 따르면 <어떤아메리카국가가내외의공격을받을경우아메리카대륙전체가위협당한것으로간주해반격>할수 있다고 규정했고, 1948.3 미주기구(OAS)가 설립되면서 미국의 라틴아메리카지배체제가 형성됐다. 이를 배경으로 1954.6 미CIA지원하에 과테말라의 친미군부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중도민족주의성향정부를 전복시켰다. 이를 계기로 미정부는 1958까지 라틴아메리카내 친미군부세력에게 연간 1억달러를 투입했다. 1954.9 파라과이의 친미군사쿠데타가 성공해 반동적인 친미파쇼체제가 구축, 35년간 지속됐다.
미국의 라틴아메리카지배책동에 제동을 건것은 1959.1 쿠바혁명이었다. 미정부는 쿠바민중정권전복을 위해 반카스트로세력의 히론해안침공을 조종했고 <몽구스>작전등 카스트로암살시도를 계속 벌였다. 피델카스트로쿠바수상은 <르몽드디플로마티크>편집장 이냐시오라모네와의 인터뷰에서 <1961.11~1963.1까지,14개월동안쿠바에대해5780건의테러가발생했>다, <쿠바는세계에서테러리즘과가장많이맞서싸운국가중하나>라고 언급했다.
쿠바의 등장과 라틴아메리카진보세력의 무장투쟁을 겨냥한 미국의 대라틴아메리카전략은 <또다른쿠바는없다>로 요약된다. 미정부는 라틴아메리카여러국가들에 자본주의시장정책을 고수하고 미독점자본이 경제적약탈을 할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며 진보적사상의식을 거부하도록 압박했다. 쿠바혁명이후 미국의 새로운 <국가안보론>을 바탕으로 라틴아메리카친미반동군부세력은 정치개입·쿠데타를 일삼았다. 브라질군부세력은 1945·1954 2번의 쿠데타로 정국에 개입한뒤 1964~85 군사파쇼통치를 감행했다. 1960~70년대 아르헨티나·우루과이·볼리비아·에콰도르등 여러국가의 친미군부세력은 정권을 찬탈하고 파쇼권력을 강화했는데, 이는 미<반공전략>의 핵심이었다. 이전략하에 미국은 칠레 아옌데민중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1973.9 피노체트군사쿠데타를 배후조종했다. 그외에도 라틴아메리카여러국가의 친미군부세력을 대상으로 교육훈련·자금·장비등을 지원하며 각국군대를 <반공전선>의 아성으로, 라틴아메리카민중지배의 근거지로 재정비했다. 일례로 닉슨미정부는 살바도르아옌데가 집권하기전인 1970.9중순 <아옌데가집권하지못하도록저지하든지권좌에서축출>하려는 미CIA공작을 승인했다. 미국가안보수석보좌관 헨리키신저는 <보이지않는봉쇄>를 주도하며 칠레경제위기를 조장했고 브라질·아르헨티나등의 군부파쇼체제를 미국의 이해관계관철의 매개체로 이용했다. 또 미정부를 대신해 포드·ITT(국제전화전신)·GM(제너럴모터스)등 미독점자본들이 비밀경찰·준군사세력에게 자금을 대줬다.
제국주의미국의 배후조종하에 각국의 반동적친미군부세력은 공산당·사회당·노동운동세력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자유주의·민족주의경향의 정치운동까지, 극우파쇼를 제외한 모든 정치세력에 대한 억압통치를 감행했고, 백색테러·고문·학살을 공공연히 자행했다. 대표적으로 <콘도르>작전이 있다. 1970.11이래 남아메리카여러국가의 군사파쇼정권이 공동으로 전개한 <콘도르>작전은 정치적반대파를 납치·고문·살해하기 위한 비밀정보·작전체계였다. 일례로 피노체트군사파쇼정권은 3000건이 훨씬 넘는 인권침해사건을 일으켰고 쿠데타직후 1973.9~1974.3 반정부인사에 대한 납치·고문을 집중적으로 벌였으며 1974.6 <국가정보원(DINA)>을 설치하고 파쇼통치에 반대하는 언론·출판매체를 검열·폐간했는데 이는 <콘도르>작전의 일부였다. 칠레·아르헨티나·우루과이·브라질·과테말라·페루등지의 친미반동군부세력의 진보세력·정적을 겨냥한 초법적폭력·살해는 계획적, 체계적, 지속적인 학살행위였다.
3차세계대전의 서아시아돌격대
시오니즘은 파쇼적반동사상이다. 1800년대말부터 본격화된 <정치적시오니즘>은 아랍민중의 땅인 팔레스타인지역에 유대인국가건설을 주창했다. 시오니즘의 파쇼성은 시오니즘과 나치즘의 결탁을 통해 노골화됐다. 1933 히틀러집권후 독일시오니즘연맹은 히틀러에게 <유대인의어려운처지는무엇보다도그들의비정상적인직업분포와고유한전통에뿌리를내리지못한정신적,도덕적결함때문>이라며 유대인일반을 멸시하는 내용의 문서를 보냈다. 이문서는 나치의 유대인학살에 영향을 미친것으로 평가된다. 현재 이스라엘은 <모든유대인들은저들만의기원을가진민족에속한다>는 나치의 반유대주의관점을 고수하면서 오히려 <고대유대인의후손>으로 분석되는 팔레스타인인을 잔혹하게 학살하는 <반유대주의>책동을 벌이며 심각한 모순을 드러내고있다. 한편 1942 뉴욕에서의 시오니즘회의에서 <빌트모어프로그램>이 발표됐는데 이자리에서 시오니즘운동은 팔레스타인전체를 유대국가로 전환할것을 공개적으로 압박했다.
시오니즘이스라엘은 1947~49 전쟁을 방불케하는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공격·추방·학살을 의미하는 <나크바(재앙)>를 일으켰다. 1949 신생이스라엘국가지역에 사는 아랍주민약80%가 자기집에서 쫓겨나고 토지·재산을 잃었다. 130만팔레스타인인중 최소72만명이 난민이 됐다.
시오니스트의 팔레스타인침략·지배는 제국주의세력이 배후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1944 영국총리 윈스터처칠의 지지하에 영국군내 유대인대대그룹이 구성되면서 시온주의군대는 상당한 수준의 훈련·전투를 경험했다. 전후 미대통령 해리트루먼은 이스라엘건국을 지지하면서 시오니즘을 서아시아에 새롭게 등장하는 미패권의 요체로 삼았다. 미국·이스라엘의 결탁은 1951 이스라엘유력일간지 하레츠의 <이스라엘은(미국의)경비견이돼야한다>보도를 통해 확인된다.
1970년대후반부터 시오니즘극우정객으로 행사한 베냐민네타냐후는 1996~1999.7과 2009.3~2021.6 2차례집권에 이어 2022.12 3번째집권했다. 2022.11 이스라엘총선에서 극우정당들을 대거규합해 당선된 네타냐후가 2022.12 이스라엘역사상 가장 극우적인 정부를 구성했다. 주요연정구성정당들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2국가해법>을 거부하고 반아랍인종혐오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파쇼적사법개악인 <사법개혁>을 시도하는것에 반발하는 이스라엘인들에 대한 공안탄압으로 이스라엘내정치위기가 격화됐다. 일례로 2023.4 23만명이 결집한 <사법개혁>반대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최소19명의 시위자가 체포됐다. 시위대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기마경찰은 곤봉으로 여성시위자를 폭행하고 물대포를 쏘며 살인적인 진압작전을 벌였다.
시오니즘당국은 2022.2 시작된 제국주의세력의 3차세계대전정책에 따르는 한편 이스라엘내부갈등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전쟁도발로 알아크사사원에 대한 침략·테러행위를 감행하고 가자지구를 침략, 팔레스타인인을 학살했다. 유엔에 따르면 2023초~9월 이스라엘군대·정착민에 의해 살해된 팔레스타인인이 227명이었다. 이스라엘군사작전은 2023.1부터 있어왔으며 여름부터 무력대치수준이 심화됐다. 2023.7 이스라엘군병력1000여명을 동원해 20년만에 최대규모작전을 개시한 결과 90여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죽고 다쳤다. 시오니즘이스라엘의 침략·학살을 참지못한 하마스는 2023.10 <알아크사홍수>작전을 단행했다.
팔레스타인보건당국에 따르면 전쟁개시이래 이스라엘군에 의한 팔레스타인피학살자수는 2025.2.19기준 4만8297명이지만 의학잡지<랜싯>에 실린 글에 따르면 2024.7기준 실제사망자수는 18만6000명으로 추산된다. 이스라엘은 서아시아(중동)전폭발을 흉계로 2024.9 레바논헤즈볼라무선통신기·무전기폭발사고와 레바논폭격, 2024.12 시리아반미정권전복과 골란고원점령을 감행했다. 2025.1.19 하마스·이스라엘간휴전이 발효됐지만, 구호품차량·중장비진입과 환자들이 치료를 위해 이집트에 가는것도 가로막으며 휴전합의를 공공연히 위반하고있다. 뿐만아니라 서안지구에 대한 공습을 심화하면서 2025.2.20 수도 텔아비브인근 버스폭발사건을 촉발시켰다. 오늘날 시오니즘이스라엘의 주변아랍국가에 대한 침략은 제국주의진영의 3차세계대전책동에 따르는것이면서 동시에 <대이스라엘정책> 즉, 유프라테스강에서 나일강까지의 레반트지역을 모두 점령하겠다는 반동·파쇼·패권정책을 실행하기 위한것이다.
신나치세력에 의한 내전과 국지전, 전쟁
우크라이나전은 2014 <유로마이단>쿠데타로 시작, 2014~22 돈바스전으로 심화, 2022.2 러시아<특수군사>작전으로 본격화됐다. 각각은 실상 내전·국지전·전면전의 성격을 띄고있다. 전쟁을 개시·심화·본격화하는데 있어 그도발자는 우크라이나반동세력인 신나치세력이고, 그배후조종자는 제국주의미국이다.
2013.11.21 수도 키예프에서 시작된 <유로마이단>시위는 2014 유혈충돌·폭동·발포등, 내전을 방불케하는 극단적사태로 전변되면서 친러정권수반인 빅토르야누코비치를 축출했다. 야누코비치는 수개월간의 대규모폭동을 잠재우기 위해 2014.2.21 유럽연합·러시아대표가 중재한 <우크라이나의정치적위기해결에관한>협정에 서명했지만, 다음날 극우반동폭도들이 정부건물을 무력으로 점거하고 키예프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이협정은 파기됐고 극우세력들은 권력을 탈취했다. 2014.3 미CNN은 <극우,반유대주의,반러시아,공공연한파시스트집단은현대우크라이나에해악으로존재해왔고지금도존재한다>며 <<스보보다>와<우익섹터>의극우국수주의자들을포함한우크라이나의극우정당과집단이2014키예프의정권교체에중요한역할을했으며,이후국가안보및국방위원회,검찰총장사무실,임시정부의생태부,농업부에서직책을맡았다>라고 보도했다.
불법으로 권력을 장악한 신나치키예프정권이 러시아어사용을 금지하고 친러세력을 위협·탄압하는 와중에 2014.4 크림반도는 자치권획득·러시아편입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돈바스에서는 친러시아시위가 열렸으며 수만명의 민중들은 오데사에서 반<마이단>평화시위에 나섰다. 반면 2014.5 신나치민병대 아조프대대가 조작되면서 반나치세력대 신나치세력간 갈등과 충돌은 갈수록 첨예해졌다.
2014.5.2 오데사학살이 발생했다. 약2만5000명이 모인 반<마이단>평화시위에 800명의 신나치세력이 습격했다. 인근검문소는 <마이단>사령관·우크라이나국가안보및국방위원회비서 안드리파루비가 감독하는 신나치민병대가 통제하고있었고, 이들의 비호를 받으며 신나치세력이 평화시위대에 폭력을 휘둘렀다. 일부시위대가 노조건물로 피신하자 신나치세력은 건물을 불태웠다. 그결과 116명이 맞아죽거나 불타죽는 참사가 벌어졌다.
2014.5.9 마리우폴학살이 벌어졌다. 마리우폴시민들이 승전기념일행진을 시작하자 마리우폴내무국부근에서 총격이 발생했다. 신나치민병대와 마리우폴경찰간 싸움이 총격전으로 이어졌는데, 도시곳곳에 배치된 신나치민병대저격수들은 행진참가자들을 향해 발포했다. 2014.5.11 마리우폴시민들은 유혈사태속에서 <도네츠크인민공화국의국가독립법지지>에 대한 국민투표를 진행했고 96%이상의 사람들이 투표에 참가했다.
2016.6중순 신나치세력이 돈바스를 침략, 대량학살을 감행했다. 2014.9기준 무려3500명이 실종됐다. 증언에 따르면 아조프대대는 모든 구금자를 마리우폴공항에 끌고가 고문했고, 그들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도서관>으로 불린 이비밀고문감옥을 아조프대대가 운영하고 SBU(우크라이나보안국)가 감독했다. 구금된 사람들은 일명<책>이라 불렸다. 마리우폴공항에 약3000명이 매장된것으로 확인된다. 2016 유엔인권고등판무관사무소는 2015.1 연대로 승격된 아조프대대가 대량약탈·불법구금·고문등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 공식화했다. 러시아가 중심이 돼 2014·15 민스크협정으로 돈바스전을 중단시키려했으나 키예프신나치당국과 미·서방의 협정파기로 실패했다.
2022.1 볼로지미르젤렌스키는 신년기자회견에서 돈바스침략을 선포했다. 한편 2023.6.5 올가페도로브나크림공화국행정기관대표는 <젤렌스키가자신을총통이라고생각하면서우크라이나가자체군사핵프로그램을시작하고자한다고발표하자푸틴의인내심은한계에도달했다>고 밝혔다.
전체과정에서 미제침략세력은 신나치세력을 지지하고 자금·무기를 투입하면서 배후조종했다. 미국은 2014.2 우크라이나정권교체를 공식적으로 지지했고, 2014.3 미·우크라이나군사협력이 시작됐다. 2014.12 미대통령 버락오바마는 키예프로의 자유로운 무기이전을 허가하고 군대훈련을 지원하는 내용의 <우크라이나자유지원법>에 서명했다. 2015~22 미국의 우크라이나원조예산총액은 21억2500만달러였고 2018부터 살상무기를 투입했다. 독일킬연구소집계에 따르면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2022.1~2024.12 1197억달러를 지원했고 중거리미사일 에이태킴스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를 대거투입했다.
극우반동세력이 획책하는 내전·<한국>전
2024.12.3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내란·반란을 일으켰다. 국회·중앙선관위(중앙선거관리위원회)등 헌법기관에 군대·경찰을 투입했고 국회의원체포·국회해산·선관위서버탈취등을 시도했으나 우리민중의 저항에 가로막혀 실패했다. 12.4 01시경 국회계엄해제가 의결됐으나 무려 3시간30여분이 지난 04시27분에서야 윤석열은 계엄해제를 발표했다. 12.14 국회윤석열탄핵소추가 가결됐고, 2024.12.31~2025.1.15 윤석열체포영장이 집행됐다. 1.19 윤석열구속영장이 발부되자 극우반동폭도들은 서울서부지법을 대상으로 폭동을 일으키면서 경찰·기자·시민다수를 폭행해 유혈충돌을 일으키고 공수처·법원의 기물·건물을 파손했으며 법원방화를 시도했다. 내란·반란수괴 윤석열은 11차에 걸친 헌재탄핵심판에서 <경고성계엄>·<탄핵·내란공작>을 궤변하고 <1.19폭동>을 일으킨 폭도들을 두둔하면서 재차 폭동을 부추겼다. 국민당(국민의힘)은 12.3비상계엄이 <합법>적이라고 주창하고 <윤석열석방>을 촉구, 헌법재판소를 겨냥해 윤석열탄핵인용부결을 압박하면서 내란잔당임을 드러내고있다. 특히 전한길·전광훈류의 <극우반동스피커>는 <헌재파괴>와 <2차계엄>을 획책하면서 폭동선동과 내전책동을 심화하고있다.
윤석열의 본색은 히틀러·박정희·전두환을 능가하는 살인마·파쇼광이다. 2025.2.14 보도된 <노상원수첩>에 따르면 윤석열무리들은 국회의원·언론·민주노총·전교조·민변·법조인등을 <1차수거대상>으로 지목했다. <체포조>인원편성은 5~7명씩 1조로 하고있다. <수거조처>는 1·2차기무사(현방첩사), 3~10차경찰을 활용한다고 적혀있다. 1차<수거대상>이 약1만명임을 감안할때, 10차까지, 전국적으로 <수거조처>를 할경우 최소10만명이상의 대량학살을 모략한것이다. 그방법도 <막사내잠자리폭발물사용>·<확인사살>·<교도소1곳을통째로수감음식물,급수,화학약품>등 매우 잔학하다. <북한>을 접촉하겠다는 내용을 통해서는 학살만이 아니라 자작극·국지전도 계획된것이 확인된다. 뿐만아니라 비상계엄후속조처로서 <법개정>·<3선집권구상>·<후계자>등을 모략했다. 윤석열은 <경고성계엄>을, 극우반동폭도들은 <계몽령>을 망발하지만 실제는 대량학살·영구집권을 모략한것이다.
윤석열내란·반란무리는 미제침략세력의 동아시아전·3차세계대전책동에 맞춰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미제침략세력은 미일<한> <동북아판나토>를 2023.8 캠프데이비드선언으로 완성, 2023.12 조선미사일경보정보실시간공유체계로 심화, 2024.6 <프리덤에지>다영역합동군사연습으로 실전화했다. 미제침략세력은 2024.7 나토워싱턴정상회의로 <나토의태평양화>를 완성하고 일군국주의세력아래 윤석열친미호전세력을 편제하면서 동아시아전개시를 위한 준비를 완료했다. 한편 윤석열내란·반란무리들은 2023상반기부터 비상계엄을 본격적으로 준비했고 2024.3 <프리덤실드>미<한>합동군사연습시기에 맞춰 이례적으로 2주간에 걸친 <충성8000>계엄훈련을 실시했다. 미<한>호전세력들은 3차세계대전·동아시아전의 신호탄이 되는 <한국>전을 2024.10 무인기평양공격을 통해 일으키려했으나 이는 조선의 <전략적인내>로 파탄됐다. 12.3비상계엄, 친미친위쿠데타로 재차 내전·<한국>전을 일으키려했으나 이는 우리민중의
12월항쟁으로 분쇄됐다. 미제침략세력과 그하수인인 극우반동세력들은 현재 충돌·폭동·발포·계엄으로 내전을 일으키려고 한다. <1.19법원폭동>을 능가하는 <헌재폭동>을 선동하면서 동시에 헌재판결을 앞둔 3.8 돌연 불법적으로 윤석열이 석방된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죽기직전인 내란·반란무리들의 유일한 살길이 내전이며, 3차세계대전·동아시아전에 필사적인 제국주의호전세력의 최고노림수가 <한국>전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2차세계대전당시 가장 반동적인 실체는 독일·이탈리아·일본파쇼세력이었다. 2차세계대전종전후 지금까지 미국은 각국친미반동세력들을 배후조종하고 오늘날 전쟁대리인으로 내세우면서 탄압과 약탈, 침략과 학살을 공공연히 벌이고있는, <가장반동적인국가적실체>다. 미제침략세력의 전쟁꼭두각시에 의해 <한국>은 <미국의철저한반공전초기지>로 전락했다. 3차세계대전의 첨예한 정세속에서 우리민중·세계민중은 반동세력이 조성한 모든 도전과 난관, 시련과 역경을 딛고 반제의 기치하에 의연히 전진하고있다. 역사의 주체인 세계민중이 사회역사를 주동적으로 발전시키며 세계자주화와 진정한 평화,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것은 정의이자 과학이며 대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