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8 항쟁의기관차〉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우리민족의 투쟁

일제해방이후 우리민족은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투쟁했다. 1945.12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에 따라 1946.3 코리아임시정부수립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소·미공동위첫회의가 열렸다. 미국은 코리아에 대한 침략야욕으로 1947 소·미공동위를 파탄내며 코리아문제를 미국의 거수기나 다름없는 유엔으로 넘겼다. 1948 코리아에는 유엔감독하에 이승만의 <대한민국>과 남북연석회의에 기초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개의 국가가 수립됐다. 유엔은 남의 단독선거를 감시하기 위해 유엔임시코리아위원단을 꾸리고 1948.1.8 남에 들어왔다. 이에 전체조선민족은 1948.2.7 미군즉시철거와 남단독정부수립반대 투쟁을 벌였다. 5.10남단독선거가 확정되자 4.3 제주민중은 무장을 들고 봉기했다. 미군과 이승만은 제주도를 <붉은섬>으로 규정하고 계엄령발포후 민중들을 학살했다. 당시 30만제주도민중 7만명이 학살당하고 총400개마을중 295개마을의 민가가 초토화됐다. 4월연석회의는 남북정당·사회단체대표들이 정치정세를 토의하고, 민족분열의 위기를 타개할 근본대책을 강구한 역사적인 회의였다. 회의에는 전체남북민중의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56개정당·사회단체대표695명이 참가했다. 5.2 쑥섬회의에서는 통일전선강화와 그를 기반으로한 통일정부수립을 결정했다. 남으로 돌아온 김구·김규식은 조국통일전선체인 통일독립촉성회를 건설했다. 김구는 남민전(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과 북민전(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조국전선(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으로 통합하는 대회가 열린 1949.6.26 CIC(미군방첩대)요원에 의해 암살당했다. 미군정에 의해 남단독선거가 강행된 조건에서 남북연석회의남북지도자협의회는 6.29~7.5 2차회의를 개최하고 전체민족의 염원인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8.25 헌법제정과 입법기관선거를 결정했다. 북의 각지역에서 대의원선거가 진행됐으며 남의 각지역에서도 총1080명의 대표를 선출해 8.21~26 해주에서 남측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남측대의원360명을 선출했다. 9.9 남측대의원360명과 북측대의원212명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헌법을 채택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수립을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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