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91 인티파다의 물결이 중동전체를 뒤흔들자 미국과 이스라엘은 유화책을 모색하며 <2국가해법>을 제안했다. 이제안에 따라 미국과 이스라엘은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포섭해 1993 오슬로협정을 추진했다. PLO는 1974 아랍정상회담에서 팔레스타인민족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기구로 승인받으며 개량주의노선을 걸었다. 서방의 물자지원속에서 PLO지도층은 부패했고 유럽과 레바논등에서 호화생활을 누렸다. 오슬로협정은 팔레스타인인 스스로가 이스라엘에 대한 점령을 합법화시킨 굴욕적인 협정이었다. 1994 아라파트는 라빈이스라엘총리, S.페레스이스라엘외무장관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오슬로협정이후 서안지구는 ABC 3지구로 나뉘게 됐고 A지구는 PA(팔레스타인자치정부)가 행정권·경찰권을 가지고, B지구는 PA가 행정권, 이스라엘이 경찰권을 가지며, C지구는 이스라엘이 행정권과 경찰권을 가진다. 팔레스타인민중에 대한 봉쇄정책은 오히려 강화됐다. 이스라엘은 자치구곳곳에 분리장벽을 설치해 팔레스타인민중의 통행을 막고 일상을 통제했다. 오슬로협정에서 아라파트는 주요경제분야에 대한 공식적인 지배권을 이스라엘에 양보하면서 자치정부의 수입·수출과 관련한 모든것을 이스라엘관리들이 결정하게 했다. 오슬로협정이 이스라엘의 불법적인 점령촌의 철수나 확장중단은 명시하지않으면서 팔레스타인의 수자원과 토지를 차지하기 위한 이스라엘의 점령촌은 더욱 확대됐다. 1998 샤론은 <모두가서둘러행동에나서더많은고지를점령해야한다>·<우리는영토를확장할것이다.점령하는것은우리것이될것이고점령하지않은것은저들에게떨어질것>이라며 유대인정착민들을 부추겼다. 오슬로협정은 이스라엘의 안보논리와 팔레스타인에 대한 점령과 지배구조를 더욱 정교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자치정부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모이는 구심으로 됐다. 1987.12 가자지구에서 창설된 하마스는 1차인티파다당시 처음으로 팔레스타인민중봉기를 촉구하는 공식성명을 발표했고, 가자지구와 요르단강서안 전지역의 팔레스타인조직을 묶어 인티파다를 주도했다. 1993 오슬로협정즈음에는 PLO의 온건노선에 대한 환멸에서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피력했다. 2000.9.28 샤론이스라엘총리가 군인들을 동원해 팔레스타인인의 성지 알아크사사원에 난입했다. 2차인티파다가 시작됐다. 9.30 이스라엘군의 총격에 의한 12살어린이의 희생사건이 벌어졌다. 시위군중과 이스라엘군사이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은 TV를 통해 전세계로 생중계되며 팔레스타인인과 전세계에 충격과 분노를 일으켰다. 격화된 팔레스타인의 폭력투쟁을 명분으로 이스라엘은 2002 높이8m에 이르는 콘크리트장벽과 전기가 흐르는 철망장벽을 약730km에 걸쳐 쌓았다. 이는 베를린장벽의 2배에 이르며 <고립장벽>으로 불린다. 농지를 몰수하고 마을을 파괴하며 팔레스타인민중을 추방했다. 팔레스타인민중은 <거대감옥>에 갇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