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12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코리아의 임시정부수립을 위한 소미공동위원회구성이 결정됐다. 3상회의에 대한 미언론의 왜곡조작보도는 코리아에서 찬탁·반탁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46.1 소미공동위예비회의가 개최됐고 1946.3.20 본회의가 시작됐으나 임시정부구성대상과 관련한 논란이 계속됐다. <좌우합작>이 추진됐으나 1947.3 <트루먼독트린>이후 미군정은 좌우합작운동을 반대했고 그중심인물이었던 여운형이 7.19 암살됐다. 9.17 마샬미국무장관은 코리아문제를 미국의 거수기나 다름없는 유엔에서 논의할것을 주장했다. 9.26 소련측은 소미양국군대의 동시철거를 제의하면서 코리아의 임시정부수립을 코리아인들에게 맡기자고 제안했다. 10.18 유엔에 맡기자는 미국측의 주장으로 인해 결국 소미공동위는 결렬됐다. 11.14 유엔에서는 소련및동구권국가들이 퇴장하고 코리아의 입장을 대표할 발언권도 갖지못한채 코리아문제에 대한 안건이 상정돼 처리됐다. 1948.1.9 유엔임시코리아위원단이 서울에 입국했다. 김일성주석은 1948.1.9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중앙위의장단회의에서 남북협상을 제기하고 남측인사들에게 서한을 보낼것을 토의했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는 <유엔조선위원단항의남조선총파업위원회>를 조직하고 2.7 파업투쟁을 전개했다. 한자료에 의하면 2.7~9 전국적인 투쟁에 파업투쟁8만471명·동맹휴학투쟁5만3357명·시위57만5119명·집회72만9407명·봉화2만9588명·쌀투쟁9375명등 총약150만명이 동참했으며 총파업으로 57명이 사망하고 146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1만854명이 검거됐다. 2.10 김구가 〈삼천만동포에게읍고함〉을 발표해 단선단정을 반대했다. 이승만은 이미 1946.6 미소공동위가 무기한 휴회상태에 들어갔다고 하면서 <정읍발언>에서 남지역만의 단독정부수립을 주장했다. 미군정은 2.7구국투쟁을 진압하고 2.26 유엔소총회는 남지역만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수립을 결정했다. 이를 반대하며 4.3 제주무장항쟁, 10월 여순군인봉기등이 이어졌다. 유엔감시하에 단독선거를 반대한 코리아의 절대다수 정치세력은 1948.4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했다. 5.10 유엔감시하에 남지역내에서 단독선거가 진행되자 6월말 2차남북지도자협의회에서 남북총선거를 결정하고 8월 남북전지역에서 총선거를 진행한데 이어 9.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설했다. 유엔감시하단독선거에 참여한 이승만세력은 8.15 <대한민국>건국을 선포했다. 미국을 등에 업고 정권을 쥔 이승만정권은 계엄령을 발포하고 제주민중항쟁과 조선인민유격대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 이미 코리아반도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