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는 해외동포단체의 자금을 개인활동비로 받은 비용이라며 소송까지 벌였던 이승만의 면모를 공개했다. 또 이승만은 <한인학교>의 토지구비명목으로 자금을 모으도록 했지만 해당토지구매기록은 없었다. 반면 이시기 막대한 자금을 자신의 <동지회>건설에 투자했다가 결국 부채만 늘어 파산했다. 이승만은 당시 동포들이 모아준 돈으로 생활했는데 해당시기 하와이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하는 4인가족기준월소득의 3~4배에 이르는 규모였다. 이승만은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미주동포들의 재정지원금을 독자적으로 관리하면서 임정측과 갈등을 빚었고 임정은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탄핵하기에 이른다. 해방후 <대한민국>의 초대대통령이 된 뒤에는 권력유지를 위해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허용·조장했다. 이승만정부는 1950.12 전쟁당시 <국민방위군설치법>을 공포하고 3개월분 총209억원을 책정했다. 50만명의 인원이 충원됐으나 사령부간부들의 보급품부정착복으로 식량·피복을 지급받지못해 수만명이 아사·동사하고 집단탈출현상도 나타났다. 당시 군부는 이를 적당한 선에서 무마하려 일부책임자들을 사형시켰으나 여론의 반발로 이승만은 국방장관 신성모를 면직할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그후임으로 이기붕을 임명했다. 이기붕은 이후 이승만의 후계자가 돼 이승만정권의 정쟁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1960 3.15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됐으나 4.19항쟁당시 그의 부패와 비리가 민중의 분노의 주대상이 됐고 결국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켰던 친아들에 의해 4.19정국에 일가가 모두 죽임을 당하는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이승만은 1952.8 대선을 앞두고 정권유지를 위해 무기제조용 중석(텅스텐)을 미국에 수출하고 그대금으로 받은 달러를 불하해 일부업자들에게 폭리를 주고 막대한 정치자금을 거둬들였다. 이당시 <중석불>(텅스텐수출외화)350만달러, 그외정부보유120만달러가 일반기업에 불하됐다. 당시 조사에 따르면 기업들은 환차익505억원, 가격조작265억원등 총770억원의 부당이익을 취했다. 이승만정부의 <농지개혁> 또한 반민중적으로 진행돼 상당한 몰수대상토지가 사전에 임의처분되거나 은닉되고 사실상 지주들의 재산권을 보장해줬다. 정부의 이런 반민중행태들이 시장을 교란시키며 민중생활을 파탄시키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했으며 결국 민중항쟁의 도화선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