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세계대전이후 프랑스는 나치독일의 점령에서 해방된 뒤 제헌의회총선을 하고 의원내각제형태의 4공화국을 수립한다. 선거에서는 나치에 맞서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레지스탕스를 이끈 프랑스공산당·대중공화운동·노동자인터내셔널프랑스지부연합이 승리한다. 그중에서도 프랑스공산당이 최다득표로 1당이 됐다. 1949 공산당은 나토가입을 반대했지만 프랑스의 중도정부가 나토조약에 서명했다. 공산당지도자 토레즈는 <프랑스민중은결코소련과전쟁하는일은없을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인들은 코리아전쟁도 반대했으며 미국이 코리아에서 세균전을 벌이고있는것을 규탄했다. 주남미8군사령관이었던 릿지웨이가 아이젠하워의 후임으로 나토군사령관으로 발령받아 1952.5 파리로 왔을때는 반릿지웨이시위를 격렬하게 벌였다. 약2주일간 수만명의 시민들이 세균전과 코리아전을 반대하는 시위를 전개했으며 경찰진압으로 372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1954 프랑스는 1차인도차이나전쟁에서 패배했고 알제리해방전쟁이 발발했다. 1958.5 프랑스사회당정부의 알제리정책을 반대한 프랑스군부의 쿠데타가 벌어졌고 이들은 보수민족주의의 반나치전쟁영웅 드골의 복귀를 요구했다. 드골의 등장과 함께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한 이원집정부제의 5공화국이 수립됐다. 드골은 유럽내에서 서독과의 양국간조약을 체결하고 영국이 유럽경제공동체에 가입하는걸 막았다. 프랑스는 1964 서방국가로서는 처음으로 중소대립이후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했으며 미국의 베트남전쟁에 대해서는 프랑스가 끈 베트남전쟁의 불씨를 되살렸다며 비난했다. 또 드골은 프랑스핵무장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프랑스는 1960.2 알제리에서 최초핵실험에 성공했다. 드골은 1966.5 프랑스안에 주둔하는 외국군대의 철수를 요구하면서 핵개발에 장애가 됐던 나토사령부에서 탈퇴했다. 당시 파리에 있던 나토본부는 벨기에로 이전했다. 동구와해이후 각국국방예산이 감축되면서 프랑스와 미국간의 무기수출경쟁이 심화됐다. 미국은 전략적우위를 이용하고 정치적압력을 행사했으며 프랑스가 대만에 잠수함을 수출했을때 프랑스의 로비커넥션을 미정보부가 폭로하는 일도 있었다. 프랑스는 미국의 무기시장독점에 불만을 가졌으며 1990년대 시라크는 미국과의 무기수출경쟁에서 일정한 지분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나토에 참여했다. 1999 코소보전쟁에서 나토군의 폭격직후 프랑스의회국방위원회는 <나토군이미국식전략개념을도입하고있으며유엔의결정을따르는시도조차않은점,앞으로나토군의행위에어떻게제한을가할것인가하는점>등에 관해 비판적인 보고서를 조스팽정부에 전달했다. 10년뒤 2009 사흐코지는 서방동맹국들사이에 프랑스의 영향력이 커질것이라며 나토복귀를 선언했다. 마크홍은 지난해 독일총리와의 회담에 앞서 유럽의 군사적독자성과 나토는 양립할수 있다며 지지입장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