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12 소련이 공식적으로 붕괴되기전에 이미 동구사회주의는 붕괴되고있었다. 1989 폴란드의 인민공화국이 붕괴하고 헝가리·불가리아·체코슬로바키아·루마니아의 사회주의 또는 인민공화국의 정치체제가 무너졌다. 1989.11 동·서독의 분단선인 브란덴부르크장벽이 무너졌다. 동아시아의 중국에서도 <천안문사태>가 벌어졌다. 서방의 북핵개발의혹제기가 처음 이뤄진것도 1989이다. 1990 유고슬라비아공산주의자동맹은 중앙정부중심의 <연방>을 지지하는 입장과 각지역의 자치를 중시하는 <연합>안의 입장으로 나뉘어져있었다. <연방>권력강화입장인 밀로셰비치는 유럽의 5대군대로 꼽히는 유고슬라비아인민군의 군권을 쥐고있었지만 당은 혼란스러웠고 나라는 쪼개졌다. 1991.10 인민군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로부터 철군하고 1992.4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신)유고슬라비아연방을 구성했지만 1992.4 유럽경제공동체(EEC EU전신)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독립을 인정하자 이지역의 세르비아계주민들이 반발해 나섰다.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에 맞서 공동행동을 취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양자사이에도 분쟁이 계속됐다. 1991.9 유엔안보리(안전보장이사회)는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무기금수조치를 취하는 결의를 채택하고 1992.2 유엔<보호군>(UNPROFOR)파병을 결정했다. 1994.3 미국의 주선으로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측의 결탁이 이뤄졌다.(워싱턴협정) 이후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합동으로 조율한 첫군사작전으로 세르비아계에 맞서 우세를 점하기 시작했다.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가 개입해 세르비아에 폭격을 가하고 경제제재를 가했다. 나토는 유엔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상공의 비행금지구역시행을 승인한 후 1993.4 비행금지작전을 개시했으며 1994.2.28 비행금지구역을 침범한 4대의 전투기를 격추했다. 이후 여러차례 유엔<보호군>의 요청에 따라 미군과 나토의 공습이 이뤄졌다. 1995.5 나토는 중무기를 반환하지않았다는 이유로 세르비아계의 진지를 공격하며 보스니아·크로아티아측을 지원했다. 이시기 동아시아에서 중국공산당은 1989 사태를 수습한 이후 <개혁>·<개방>노선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북은 사회주의권이 크게 흔들리는 새로운 국제환경속에서 <평양선언>으로 사회주의권을 결속시키는 한편 핵개발을 고리로 미국과의 협상국면을 조성해갔다. 미국은 1991 미군사보고서에서 윈윈전략을 거론, 이는 1993 공식적으로 채택돼 1990년대 미국이 해외군사분쟁에 대응하는 전략으로 알려졌다. 이는 한쪽에서 전쟁이 벌어질때 다른 한쪽의 전쟁은 억제시켰다가 이후 병력을 이동시켜 양쪽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한다는 전략이다. 북은 1993 준전시상태를 선포하고 NPT탈퇴를 선언했다. 1993.5 북은 처음으로 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했고 그며칠뒤 북의 NPT탈퇴유예기간종료직전 북미고위급회담으로 협상이 이어졌다. 1994.7 김일성주석이 서거하자 미·서방은 북의 붕괴를 요란히 떠들어댔다. 미·서방의 북<악마화>와 경제파탄에 대한 음해모략은 더욱 강력하게 전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