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 항쟁의기관차〉 일극화된 세계의 첫희생물이 된 유고슬라비아

소련붕괴이후 동유럽의 유고슬라비아와 동아시아의 중국·북코리아가 소련과 구별되는 사회주의권을 형성해온 세력으로 미제국주의패권에 새로운 타깃이 됐다. 다민족에 종교적차이까지 결합돼있는 유고슬라비아는 쉬운 대상이었다. 중국은 <개혁>·<개방>의 길을 선택했지만 북은 1992 <평양선언>을 발표해 사회주의기치로 세계진보세력의 단결의 길을 밝히고 북 자신은 코리아에서 주남미군을 철거시키기 위한 반제과업수행의 전략을 모색했다. 북은 2020 발표한 한자료에서 1999.3~6 미국이 일으킨 코소보전쟁은 <제2의조선전쟁>을 가상한 부정의의 전쟁이었다고 지적하면서 코리아반도와 비슷한 자연지리적조건을 갖추고 미본토로부터의 거리도 코리아반도와 유사한 구유고슬라비아는 미에 있어서 새로운 코리아전쟁을 위한 시험마당이었다고 서술했다. 그자료에서 북은 <나토와함께아무런작전적의도도없는무차별공습을끊임없이들이댄사실,열화우라늄탄과독성세균을전파하는대량살육무기도꺼리낌없이사용한사실은미국이계획하고있는제2의조선전쟁을엿볼수있게하는대목>이라고 지적했다. 이시기 미국은 금창리핵시설의혹을 확인하겠다며 페리전국방장관이 방북하고 의회에 관련사실을 보고하는 절차를 진행중이었다. 또 나토가 당시 공습에서 베오그라드의 중국대사관을 폭격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는 한쪽은 힘, 다른 한쪽은 대화라는 양면전술이면서도 힘을 앞세운 압박전술이다. 2017.10 미아태외교전문지 디플로매트에는 <지금코리아반도대치상황을초래한북의외교안보정책의주요성향이1999코소보전쟁의직접적결과>라는 주장이 실렸다. <미국외교의2중성에대한북의인식은2003이라크전쟁과2011카다피정권의전복으로이어진리비아군사개입에서더분명해졌다>는 주장은 북의 선군혁명전략에 대한 서방의 인식을 반영하는데, 주목되는것은 이런 결론에 이르는 논거보다 그출발점을 1999코소보전쟁, 2001밀로셰비치체포구속의 일련의 과정으로 확장한것에 있다. 1992~95 보스니아전쟁에서 이분쟁의 3세력은 1995 데이턴평화협정을 합의해 전쟁을 종결지었다. 그중 한세력 세르비아의 지도자가 밀로셰비치였다. 그로부터 3년후 세르비아의 코소보에 분리독립문제가 불거졌고 밀로셰비치는 인종학살자가 됐으며 나토는 세르비아에 무차별공습을 가했다. 2000.9 유고슬라비아대선을 며칠 앞두고 클린턴미대통령은 유고연방에서 밀로셰비치가 부정선거를 통해 당선된다면 그의 지위를 무효화하고 쿠데타를 지원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투표후 이틀뒤 선관위는 과반득표자가 없어 결선투표를 실시할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크로아티아앞바다에서 미·영군과 크로아티아군의 대규모합동상륙작전이 진행됐다. 이후 반밀로셰비치시위가 벌어졌고 10.10 대선결과가 수정발표돼 밀로셰비치의 낙선이 확정됐다. 서방에서는 이를 <불도저혁명>이라고 이름붙였다. 2000년대 <색깔혁명>과 일련의 <자유주의시민혁명>의 처음으로 볼수 있을것이다. 유고슬라비아의 사회주의는 처음부터 기회주의적이었다. 그리스공산주의자들에게 가장 필요할때 등을 돌렸고 서방의 경제지원을 선택했다. 스탈린의 서거와 흐루시쵸프의 등장은 티토의 우경기회주의와 수정주의를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다만 3세계 블록불가담운동에 적극 나섰고 반제노선에 서게 됐다. 그리고 소련이 사라진 후 본보기대상으로, 동유럽에서의 대표적인 희생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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