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 항쟁의기관차〉 중국의 중심부를 흔든 천안문사태

1976 모택동서거후 화국봉이 집권했으나 10년간 지속된 <문화대혁명>의 후과를 수습하기에는 한계가 명확했다. 이후 등소평주석이 나서 <문화대혁명>을 정리하고 <개혁>·<개방>을 추진했으나 초기의 개혁조치는 일부 후과도 있었다. 등소평은 중국사회주의를 초급단계로 놓고 중국의 경제발전이 일정수준이상에 이를때까지 이조치가 불가피하다고 설파했다. <개혁>·<개방>과정에서 지방정부와 기업에 준 자율권은 중국의 경제력을 급속히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으나 반면 부정부패와 노농간 빈부격차가 커졌다. 경영자율화와 외국기업의 대규모 진출에 따른 경기과열과 수출활성화를 위한 고환율정책으로 통화수요가 급속히 늘어나며 1985 9.3%, 1988 18.8%로 물가상승률이 두자리수까지 치솟았다. 1988.5 당중앙정치국확대회의에서는 현경제위기의 타개책으로 가격개혁·임금개혁을 결정했으나 개혁실패로 오히려 고인플레이션현상이 발생했다. 정국은 등소평의 지지아래 지속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조자양의 노선과 개혁을 잠시 멈추고 체제내부통솔에 힘써야한다는 노선으로 나뉘었다. 그러던중 리붕이 국무원총리로 취임하며 1988.9 중국공산당13기3중전회에서 <경제환경을정비하고경제질서를조정하고개혁을전면심화하자>라는 정책조정안을 제기했다. 이조치가 개혁을 반대하는것으로 여겨지며 사회적우려를 샀다. 외부적으로는 소련의 고르바쵸프가 다당제를 수용하는등 기회주의적모습을 보였는데 이것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중국공산당기관지 인민일보는 <천안문사태>에 대해 <이는계획적인음모이며동란으로그본질은근본적으로중국공산당의영도를부정하고사회주의제도를부정한것으로당전체와전국각민족과인민앞에놓인엄중한정치투쟁이다…그들의구호는(중국)공산당타도와사회주의제도의전복>이라고 평했다. 2021.11 시진핑중국가주석의 중국공산당은 3차역사결의에서 <천안문사태>에 대해 <1980년대말과1990년대초소련이해체되고동유럽이격변했다>며 <국제사회의반공산주의·반사회주의적대세력의지지와선동으로인해국제적인큰기류와국내의작은기류는1989봄에서여름으로가는시기에우리나라에엄중한정치풍파를초래했다>고 평가했다. 시위진압에 대해서는 <당과정부는인민을의지해동란에선명하게반대하는것을기치로사회주의국가정권과인민의근본이익을수호했다>고 분석했다. 미국작가 블룸은 자신의 저서에서 2차세계대전이후 미국은 50여개국의 전복을 시도했으며 최소한 30개국선거에 관여했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 미·영·캐나다·호주·뉴질랜드의 5개국정보동맹인 <파이브아이즈>는 수년간 세계여러곳에서 <색깔혁명>을 선동하고 여러주권국내부에 침투해 전복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폭로했다. <천안문사태>의 본질은 이런 제국주의의 음모중 하나로 제국주의미국이 사회주의중국의 중심부를 강하게 흔든 사회주의분열책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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