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94 1차북미대결전의 결과, 카터방북과 북남수뇌회담합의가 이뤄졌다. 그러나 1994.7.25 수뇌회담을 앞두고 7.8 김일성주석의 서거로 남북관계는 경색됐다. 북은 김일성주석서거와 미제의 고립압살책동, 자연재해까지 겹치며 <고난의행군>·강행군을 했다. 이시기 김정일국방위원장은 1995.1.1 다박솔초소를 현지지도하며 선군정치를 시작했다. 1998~2000 북은 2차북미대결전을 치렀다. 미국은 노골적인 대북선제타격계획인 <5027-98>작전계획을 공개하고 경수로건설약속을 지키지않는등 1994.10.21 체결한 북미기본합의를 위반했다. 북은 1998.8.31 광명성1호·백두산을 발사하고 <금창리>이슈를 역이용했다. 금창리는 미국에게 <트로이목마>가 됐다. 이후 미의회에 제출된 페리보고서에서 클린턴정부의 대북정책은 고립압살전략에서 <평화공존>전략으로 바뀐다. 이런 정세에서 2000 북과 남의 수뇌는 평양에서 사상첫상봉을 하고 6.15공동선언을 발표했다. 6.15공동선언이라는 상층민족통일전선형성의 바탕에는 북남해외3자연대를 통한 하층민족통일전선의 강화가 있었다. 6.15공동선언의 한축인 김대중대통령은 통일이 아니라 평화공존을 추진해온 화해협력세력중 하나였다. 6.15공동선언은 낮은단계연방제와 연합제의 공통점인 화해협력의 단계로 시작해 우리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통일하기로 합의한 통일의 이정표가 됐다. <6.15시대>가 되면서 하층민족통일전선운동의 중심축은 범민련에서 6.15공동위(6.15공동선언실천민족공동위원회)로 이동했다. 2007 노무현정권말기에서야 2차남북수뇌회담이 진행됐다. 남북관계발전과평화번영을위한선언인 10.4선언이 채택됐다. 6.15공동선언이 조국통일의 이정표라면 10.4선언은 그실천강령이라고 할수 있다. 6.15공동선언이 낮은단계연방제와 연합제의 공통성인 화해·협력의 단계를 강조했다면 10.4선언은 사실상 낮은단계연방제로의 진입이다. 그러나 2달뒤 대선에서 반통일수구세력인 이명박정권이 들어서면서 정국은 경색됐다. 이명박정권은 5.24조치로 금강산관광을 중단시켰고 이후 박근혜정권은 개성공단마저 폐쇄시키며 남북관계를 6.15시대이전으로 되돌려놨다. 이룬것이 없는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반민족반통일세력이 있는 조건에서, 언제든지 그들이 재집권할수 있는 상황에서 어렵게 쌓아온 통일의 토대들이 무너질수 있다는것이 명확해졌다. 김정은시대에 통일논의가 북미정상회담까지 이뤄내면서 진행됐음에도 미국의 대북적대시정책은 달라지지않았고 남코리아에는 윤석열반북호전파쇼정권이 들어서며 그취약성이 재차 입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