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세계대전에서 일제가 패망했으나 우리나라는 미제가 그은 38°선으로 분단돼 약80년에 이르는 기간 제국주의침략위협에 항시적으로 시달리게 됐다. 1945 일제패망뒤 미군정청이 설치되자 남민중은 미군정의 반민중적시책들을 반대해 투쟁했다. 제주민중항쟁은 해방직후 우리민중의 통일독립에 대한 절절한 염원과 이를 짓밟은 미제와 이승만세력의 비법성과 악랄성을 단적으로 보여주고있다. 1946 9월총파업·10월항쟁은 남측지역의 73개시군에서 총230만여명이 동참했으며 60여일간 시위가 계속되면서 전개됐다. 제주도에서는 1946하반기를 거쳐 1947.2 제주민전(제주도민주주의민족전선)이 조직됐다. 1947.3.1 제주민전은 <28주년3.1절기념제주도대회>를 개최했다. 대회장은 기념사에서 <3.1혁명정신을계승하여외세를물리치고조국의자주통일민주국가를세우자!>고 호소했다. 표어는 <모리배소탕!3상회의결정즉시실천!친일파민족반역자친파쇼분자근멸!조국의신속한통일독립의성취!>였다. 이날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당했다. 이튿날 제주경찰은 3.1행사위원회간부와 중등학생들을 검속하기 시작했고 3.8 <제주3.1발포미군중앙조사단>이 제주에 도착했다. 3.10~13 <발포책임자와발포경찰의즉각처벌>을 요구하며 제주민관총파업이 진행돼 166개기관단체 95%의 직원들이 동참했다. 미군정청경무부 최경진차장은 <원래제주도는주민의90%가좌익색채를갖고있다>며 이념대결로 몰아갔다. 사태를 지켜보던 일부경찰들은 사직서를 제출하기도 했고 민관총파업에 참여한 경찰들은 파면당했다. 육지에서 <응원경찰>들이 증원됐고 서북청년단이 빈자리를 채웠다. 서북청년단은 제주민중항쟁의 진압군에 전면적으로 참여해 대립을 더욱 격화시켰다. 유엔코리아임시위원단이 입국하고 유엔감시하 총선거가 가시화되자 2.7총파업·구국투쟁으로 항쟁은 고조됐다. 1948.3 5.10단독선거가 공식화되며 그에 대한 반발이 컸다. 거기에 서북청년단의 잔혹한 고문치사사건들까지 제주민중의 분노를 증폭시켰다. 4.3 새벽2시 남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해 350여명의 무장대가 봉기해 12개경찰지서를 습격했다. 경찰·우익인사10여명이 사망했다. 무장대는 <매국단선단정을결사적으로반대하고조국의통일독립과완전한민족해방을위하여!>·<반미구국투쟁!>·<응원경찰과서북청년단추방!>·<(경찰과우익단체의)탄압이면항쟁이다!>라는 구호를 들었다. 미군정은 4.5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미군함정을 동원해 해안을 봉쇄했다. 5.10 총선거에서 제주도3개선거구중 2개선거구의 선거가 불발됐고 이날 초토화작전이 개시됐다. 7.21 미군정청의 3여단소속 2개대대가 제주도에 출동하면서 군주도의 토벌작전으로 전환됐다. 8.15 <대한민국>출범후 8.24 미<한>군사안전잠정협정을 체결하고 미군이 철수할때까지 미군이 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뒤에 벌어진 여순사건과 제주도토벌작전은 미군사고문단이 주관했으며 미군사고문단이 직접 전투작전을 지휘했다. 당시 백선엽을 비롯한 토벌대의 지휘관들은 일제간도특설대출신이었다. 서북청년단과 구친일주구들은 반일민족해방세력이 전국적범위에서 인민정권을 수립하는것을 막는데 사활적이었고 미국은 제국주의적 침략과 이익을 위해 이들을 앞세웠다. 제주민중은 무장을 들지않을수 없었다. 1949.4.21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는 남로당당수 김용관을 사살했다며 <이로써소탕전은완전히종결됐다>고 발표했다. 제주무장대초대사령관 김달삼은 인민유격대로 태백산지구에서 활동하다가 1950.3.22 강원도 정선에서 사살됐다.